흙먼지
풀썩거리는
거리에서
쓰레기와 휴지가
난무하는
거리에서
사람과 차, 자전거, 오토바이들이
뒤엉키는
거리에서
문득,
어린 시절의 나를 만난다
머리카락 엉겨 붙고
누런 코 달고
얼룩 때 가득한 얼굴을 본다
하염없이
쳐다보는
초점 없는 눈을 본다
힘없이
늘어진
바짝 마른 팔다리를 본다
그 옛날
힘겹고
시름 많았던
나의 유년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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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여 년 전에 캄보디아에서 6개월을 산 적이 있었다. 안식년을 보낼 곳을 찾다가 지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를 찾아가자는 생각을 하였다. 대단한 고생을 한 것도 아닌데 안식년을 갖는다는 것이 사치라는 생각이 있었고 그동안 받은 사회적, 개인적 혜택을 되갚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찾은 곳이 캄보디아였다. 캄보디아의 수도에서도 4시간 여를 달려야 가는 곳, 캄보디아의 가장 남쪽 시아누크라는 항구도시였다. 그곳에 머물면서 만난 캄보디아는 나에게는 전혀 낯설지가 않았다. 내가 어렸을 때 겪었던 세상이 그곳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곳의 더러움과 불편과 결핍이 새삼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그때까지 내 나라에서 아슬아슬한 불안과 함께 누렸던 풍요가 벗겨지면서 내가 누렸던 그동안의 불안이 거품 속의 풍요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멀지도 않은 1970대에 크메르루주 군의 킬링필드 사건으로 모든 지식인들이 몰살당하고 인구의 1/4이 학살당한 곳, 그 공포와 폭압의 그림자가 아직 가시지 않고 가슴의 한을 극복하지 못한 사람들, 사람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을 보면서 인간에게 내재된 폭력성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하던 나라였다.
캄보디아의 모든 도시는 파괴와 먼지와 오물과 쓰레기로 뒤덮여 있었지만 우리가 그 시절을 극복하고 일어섰던 것처럼 그들에게도 우리가 누리는 풍요와 번영을 나눠주고 싶었다. 그동안 지나친 풍요로움을 나 혼자 누리면서 불안했던 이유가 함께 나누지 못한 것 때문이었다는 자각을 하면서 혼자만의 성공, 혼자만의 행복, 혼자만의 안식은 뿌리 없는 성공이요 행복이요 안식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했다.
캄보디아를 떠나온 지 십 년이 지났다. 지금의 캄보디아는 얼마만큼 질서와 발전과 안녕을 이루어 냈을까.
그때의 그 어린아이들은 이제 살이 좀 올랐을까. 이제는 두려운 눈빛이 아니라 당당하게 마주 볼 수 있을까. 허물어진 집들은 복구가 되었을까. 저녁마다 꺼지던 전깃불은 밤새 켜 있을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