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호밍웨이 Jan 01. 2024

좋은 아빠가 되고 싶어

아이에게 물려주고 싶은 것

지금은 제 품 안의 새끼이지만 어느 정도 나이가 된다면 떠나보낼 준비를 해야 하고 다른 인생을 사는 남으로 맞을 준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독립된 삶을 살기 위해 여러 가지가 필요하고 내가 꼭 물려주고 싶은 것들이 있다.

돈을 물려주면 제일이지만 재벌이 아닌 이상 돈을 물려줘도 그게 얼마나 갈까

그거보다 더 오래가는 걸 물려주고 싶다.


타산지석

일반적 사람들과 좀 다른 길을 걸으며 내가 겪어본 신기한 경험 그리고 실수 그걸 통해 깨달은 부분을 알려주고 싶다. 나를 보고 딸이 앞으로 마음 아프게 힘들게 겪지 말아야 할 일들을 미리 알고 대비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 스스로도 보통 머릿속으로 계산한 후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머릿속 계산대로 되지 않을뿐더러 가끔은 안될 것 같은 일들도 잘될 수 있는 희망 같은 것들이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예이 그건 안돼 말도 안 되는 일이야 무모해'라고 말해도 가끔 기적이 일어나곤 한다.

그걸 겪어본 자들은 실낱같은 희망에 운을 걸어보기도 하지만 그걸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실낱같은 희망은 거의 없는 거로 봐도 무방하다며 그대로 운에 순응을 하게 된다.

내가 겪은 여러 일들 중 하나는 대학교 입학이었다.

중학교 때 인문계를 가냐 마냐 하던 녀석이 국립대학교를 가게 되었다.

물론 인문계를 간신히 가서 거기서도 10등 밑으로 하던 아이였다.

수능은 물론 내신을 잘 받아서 수시로 대학교를 지원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일반인들에게는 도저히 납득되지 않는 시간낭비일 뿐이었다.

10등 미만의 친구가 국립대 수시로 가는 경우는 정말 드물었다. 우리 고등학교는 엄청 잘난 고등학교도 아니었다.

1년에 서울대 1명 정도? 그리고 인서울(in seoul) 몇 명 가는 걸 따질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보통 지방의 고등학교는 그런 걸 따져서 서울에 몇 명을 보냈는지에 따라 명문고인지 아닌지 따지지 않나? 라테는 그랬다.

아무튼 그런 상황에서 수시 날이 왔고 내가 수시를 넣는다고 하자 선생님은 말리면서 '넌 승산이 없다'라고 말씀 주셨다. 하지만 난 어차피 떨어져도 본전이니 그냥 넣어보겠다 했다.

선생님께서는 그러면 대학교를 직접 가서 수시 마지막날에 미달되는 과에 넣으라고 말씀 주셨다. 설루션을 주는 입장에선 최선의 방법이었다. 하지만 난 내가 가고 싶은 과가 있었고 선생님 말씀을 무시하고 그 과에 그냥 인터넷으로 지원을 하였다.

그리고 수시 서류전형에 합격을 하였다. 운이 좋았다.

면접을 보러 오라고 대학교에서 말을 하였다. 면접을 보러 갔는데 면접 주제는 중국에 고구려에 대한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였다. 그때 당시 이슈가 엄청나게 된 사건들이었다.

난 뉴스를 전혀 보지도 않았고 그때 당시 핸드폰도 없어서 인터넷뉴스를 보지도 못할뿐더러 그때 핸드폰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집에서 인터넷이 된다 하더라도 라이코스, 천리안, 네이트 이런 거 기 때문에 거의 뉴스를 어디서 보는지도 몰랐다.

문외한 상황에서 난 그냥 순수 내 생각을 준비하였고 면접 바로 직전 화장실을 가서 볼일을 보았다.

그때 내 옆칸에 어떤 할아버지가 오셨고 나는 볼일을 보는 도중 자동으로 인사를 드렸다.

그러고 나서 면접을 들어갔는데 아까 옆에 있던 할아버지가 내 앞에 계셨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추후 그분은 나의 대학교 담당교수님이 되셨고 당당하고 인사성이 밝아서 그거 보고 뽑아주셨다고 했다.

면접 이후 수능은 국영수 과목 중 4등급 2개만 맞으면 수시 합격이었고 난 잘 해내서 수시로 내가 가고 싶은 과에 우리 집에서 불과 20분 거리의 학교로 가게 되었다.

사람은 살면서 해보는 게 중요하다는 걸 알게 해 준 나에겐 정말 큰 사건이었다.


이거 이외에도 정말 여러 가지 사건들이 었었고 난 무모함으로 잘 헤쳐 나왔다.


때때로 바보 같아야 일이 잘 풀리는 경우도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다.



딸이 살아가면서 여러 남자를 만날 것이다. 

물론 모솔로 갈 수도 있지만 일반적이라면 1~2명 정도는 만나보겠지

나중에 결혼의 대상이 되는 남자의 기준을 알려 주고 싶다.

물론 나는 그 기준을 알려줄 만한 남자가 아니었고 나의 부족한 부분도 지금의 아내가 사랑해 주어서 결혼한 운이 좋은 케이스이다.

하지만 우리 딸이 태어난 이후로 난 스스로 내 딸에게 남자의 기준이 되는 남자가 되고 싶었고 이상적인 남자의 모습이 되려고 노력하였다.

그 방법은 딸에게 좋은 남자로 대하는 게 아니라 내 아내에게 잘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기준이 너무 높아 버리면 남자를 만나기 쉽지 않을 것을 알지만 그래도 못난 남편을 만나 맘고생하면서 사는 거보다 혼자 사는 게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물론 못 낫더라도 본인을 사랑해 주는 사람을 만나면 정말 좋겠지만 최악의 경우는 피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특히 술 먹고 꼬장피고 폭력적인 사람, 결혼하고 여자를 하대 하는 사람, 옛날 사람들의 남아선호 사상을 가진 옛사람, 어떤 중요한 일이나 둘이 헤쳐나가야 하는 일을 혼자 단독적으로 일을 저지르거나 행동하는 사람 등 최악의 경우를 좀 피하게 하고 싶다.

내가 겪지는 않았지만 여러 유형의 못난 남자의 유형을 보았기 때문에 행여 우리 딸이 그런 못난 놈들을 만날까 봐 조마조마한 게 사실이고 그런 걸 분별하게 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남자를 고를 눈을 키워주기 위해 가식적으로라도 난 내가 생각한 이상적인 남자의 행동으로 살아가고 있다.

물론 그게 맨 처음에는 좀 어색하기도 했고 내 몸에 밴 행동이 아니라 꼭 이래야 하나 싶기도 했지만 그런 행동들들이 1년, 2년 그리고 6년 7년이 되다 보니 나의 매너가 되었고 몸에 밴 행동이 되어갔다.

덕분에 처음에는 딸에게 남자의 기준을 알려주기 위한 행동들이 주변 사람들로부터 애처가, 가정적인 남자의 표본 등 칭찬을 받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딸이 꼭 알아뒀으면 좋겠다.


앞으로 결혼할 남자는 이 아빠 같은 남자를 만나야 한다.


어려운 고난을 받아 좌절하더라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법을 알려 주고 싶다.

물론 지금은 공황장애가 좀 심해서 그런 모습을 보여주기 힘든 부분도 있지만 앞으로 그런 부분 좀 노력을 해서 보여줘야 하는 면도 분명히 있고 이전에 내가 어려움을 극복해 낸 걸 이야기해 주고 어떤 어려운 부분이라도 힘내서 다시 살아볼 수 있는 힘을 길러주고 싶다.

예전에 뉴질랜드를 갔을 때였다.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받고 갔고 어학연수를 시작하기 전 한국에서 유학원과 이야기한 건 뉴질랜드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받을 시 뉴질랜드 현지 매니저가 일자리를 주선해 주는 조건으로 간 것이었다.

하지만 유학원에서는 약속을 저버렸고 나는 딱 한 달 살 돈만 가지고 있던 상태였다.

어떻게 해서든 일자리를 알아봐야 했다.

영어도 못했다. 

지금 오클랜드 퀸즈스트릿에 있는 한국인들이 일하는 식당에 CV를 만들어 뿌렸다. 지금 생각하면 식당에 서빙이나 주방에 써달라며 식당에 내 이력서를 자세히 써서 낸 거랑 똑같은 것이다.

웃기기도 하고 무모하기도 했지만 일단 하루에 다 뿌리고 그다음 날에 같은 곳들을 돌며 자리 있냐고 물어보았다.

세 번째 날도 또 물어보며 다녔는데 한 아주머니께서  나를 붙잡고 말씀 주셨다. 지인이 청소일을 하는데 가서 일할 수 있겠느냐였다.

정말 아무것도 없던 상황에서 실낱같은 희망이 보였고 난 그걸 잡았다.

그렇게 한 여고 청소를 하게 되었다.

계약된 집에서 나가기 일주일 전 내가 일한 지 3일째 되던 날 사장님한테 가불 좀 해달라고 했다.

집에서 나가야 하는데 다른 집에서 살 돈이 없었다. 

청소일이라는 게 일반적으로 장기적으로 하는 사람이 거의 없고 다 힘들어서 빨리 그만두는 일이라 사장님도 날 믿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난 뉴질랜드 살면서 쭉 이일을 할 거라고 어필했고 사장님은 고민 끝에 현금을 주셨다.

다음 주 난 어디 가서 살까 하는 막막함에서 고정적인 집과 수입이 생겨버린 것이다.

세상은 말로 표현 못할 기적 같은 일들이 종종 벌어진다. 그게 그저 나랑 상관없는 남의 일이 아니라 나에게도 통한다는 걸 알려주고 싶고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그 상황을 즐기며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그런 쿠션 같은 배짱을 키워주고 알려주고 싶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


살면서 자신에게 힘을 주는 건 무얼까

먹고살아야 한다는 이유 그런 게 있을까? 만약 그런 것도 다 없어지고 아무것도 아닌 상태에서 정말 아무것도 되지 않은 이룬 것도 없는 상태라면 내가 뭘 할 수 있는 사람이란 걸 나 스스로 믿을 수 있을까?

살면서 사람을 조건이 아니라 그냥 그 사람만으로 사랑해 줄 수 있는 건 가족이라고 생각한다.

존재의 이유를 알고 있는 상태라면 어떤 일이든 조건이 맞춰지든 아니든 좀 더 여유 있게 상황을 보고 어려운 상황도 잘 헤처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행복한 가정, 가족의 든든하게 베이스를 깔아 준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그 부분을 유산으로 물려주고 싶다.

언제 어디서나 고민을 털어놓을 가족이 있고 힘듦을 함께 해줄 가족이 있고 세상에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려줄 가족이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다.

내 진심을 알아줄까?


아빠와 엄마는 우리 딸에게 아무 조건 없이 그냥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딸을 진심으로 사랑하지만 온실 속의 화초만으로 키우고 싶진 않다. 모진 비바람을 겪어 단단한 아이로 키우고 싶다. 이런 것들을 몸소 깨닫고 본인이 헤처 나가면 제일 좋겠지만 지금의 아이들은 너무 조심성이 많고 주변환경도 너무 좋기 때문에 삶에서 내가 겪어본 어려움들을 겪는 일이 많진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이런 상황도 있었다는 걸 알려주고 만에 하나 그런 일들을 겪었을 때 내가 해준 이야기들을 떠올리며 용기를 갖고 어려운 상황을 인생의 한 장면으로 즐기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