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사회복지사가 되었나요?
아침부터 전화가 빗발친다. 잠결인데도 예감이 좋지 않다. 중등부로 온 뒤로 가능하면 오전엔 전화를 받지 않는데 늘어지도록 늦잠을 자던 상태에서 전화를 받으면 아직 잠이 덜 깬 목소리가 상대방으로 하여금 이 양반이 도대체 몇 시까지 퍼질러 잔 거야, 같은 느낌을 주고 싶지 않아서이다. 몇 번을 울려도 본체만 체 하다가 목소리를 찾을 즈음 수신 확인을 해보니 '학벌 없는 사회'의 ㅊ선생님에게 전화와 문자가 와있었다. 예상은 적중했다. 오늘 인문학 강의를 해주실 선생님이 몸이 안 좋아지셔서 수업을 하기 힘들다는 내용이었다. 확인 전화를 했다. 갑자기 선생님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단다. 마이크를 써볼까도 싶었지만 그것도 힘들다고 하셨단다.
오랜만의 변수다. 머리끝이 멍하다가 뒷골이 당긴다. 그냥 수업 진행할까? 아니면 월요일 보기로 한 영화를 오늘 볼까? 정자동에서도 올 텐데. 전화를 끊기도 전에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M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럼 영화를 보잔다. 그래 그럼 오늘은 롯데시네마에서 영화를 보자. 정자동에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했다. 아이들에게도 문자를 보냈다. '오늘 인문학 대체수업으로 영화 본다.'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어디서요? 뭐 보는데요? 몇 시까지 오면 돼요? 문자가 쇄도했다. 몇몇은 아예 영화관으로 오겠단다. 아 쫌, 그냥! 이쪽으로 오면 안 되겠니? 이틀 전 감정평가를 받았다. 감정평가를 받기 전 세입자 대책위를 찾았다. 혹시나 싶지만 역시나. 신흥 2구역 재개발. 대책위, 조합. 주택공사. 이건 완전히 개뼈다귀 들이다. 아무리 뒤져봐도 공부방은 법적 보호 장치가 없다. 영업이익이니 감가상각이니 관리처분이니 들려오는 말들이 낯설다.
기다리지만 상황은 호전될 기미가 안 보인다. 옆에선 도움되지 않는 충고들만 난무한다. 아마도 9월, 10월. 이제 '투쟁'이란 단어는 더 이상 어색하거나 낯설지 않다. 다만 말에서만 끝날게 아니라 온 몸으로 두둥 거릴 상황이 올 수도 있다는 것. 그것이 두렵지는 않지만 딱히 기분 좋을 것도 없다. '케세라 세라'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4시가 조금 넘어서 j의 담임 선생님에게 전화가 왔다. 일전의 일이 떠올랐다. 담임선생님인 줄 알고 전화를 했는데 j의 사촌동생이라니. 수업 끝나고 방과 후 수업을 해야 하는데 공부방을 가야 한다고 해서 확인 전화를 하셨단다. j는 가정방문한 다음날 한번 오더니 무소식이다. 방과 후 수업이 6시 30분에 끝난단다. 공부방으로 보내달라고 했다. 담임 선생님은 j의 무기력함을 염려했다. 가정형편이나 좋아하는 것 등 이것저것을 물었다. 학생들을 대하는 열정이 남달라 보였다. 아는 대로 대답했다.
학교별로 중간고사 시험성적이 나왔다. 아이들의 성적은 저조했다. 그것도 상당히. 성적 때문에 집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모양이다. 특히 중학생이 되고 첫 시험이었을 1학년들이 더 심했다. 남매인 m과 j가 오지 않았다. 하루도 빠지지 않던 아이들인데 성적이 좋지 않다고 집에서 많이 혼났던 모양이다. 전화를 했다. 목소리가 착 가라앉았다. 오늘부터 푸른 학교 가지 말고 집에서 공부시키겠단다.
"별로 도움이 되는 것 같지 않아서요."
성적만 가지고 말한다면 딱히 할 말은 없다. 그래도 아이들은 잘 다니는데. 다니고 싶어 하는데. 나름 열심히 준비를 시킨다고 했는데 결과가 이러니 할 말이 없다. 입학 상담을 할 때 성적보다는 다른 것에 가치를 둔다고 말씀드리지만 그래도 중심은 언제나 성적이다. 학교와 공부방은 갑과 을의 관계다. 정들었던 아이들과 작별 인사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냐고 했더니 아이들과 다시 이야기해 보겠단다. 잠시 후 m에게서 전화가 왔다. 내일부터 다시 나올 수 있단다.
어제는 1학년 s가 오자마자 상담을 신청했다. 그룹 홈에 들어간 h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h는 그룹 홈이 맘에 안 들어서 할머니 집에서 지내고 있다고 했다. s는 안자마자 씩씩거리며 말하는데 그도 성적 때문에 할머니랑 삼촌에게 꽤나 혼이 났던 모양이다. 점점 감정이 고조되더니 급기야는 그 커다란 눈망울에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어트렸다. 혼자만의 방을 갖고 싶고. 아빠랑 함께 살고 싶고. 최선을 다했는데도 왜 욕을 먹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단다. 언제나 밝고 명랗하던 '캔디'를 연상시키던 s다. 그동안 쌓아두었던 감정을 한꺼번에 표출하는데 나는 그냥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지금 내가 이 아이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렇게 삼십 분이 흘렀다. 가슴을 치며 답답해했다. 나도 답답했다.
오후 5시가 되기도 전인데 교실마다 아이들이 웅성거린다. 이렇게 일찍, 이렇게 많은 아이들의 왁자함은 참 오랜만이다. 문자의 효과인가? 영화의 효과인가? 아마도 후자겠지. 평소에도 그랬으면 얼마나 좋을까. 7시 10분 롯데시네마, 영화는 '페르시아의 왕자'. 여기서 사십 분쯤 출발하면 될 것 같았다. 분위기는 상당히 떠있다. 출발하기 전 청소를 했다. 표를 미리 끊어 놓아야 해서 먼저 출발했다. 십여 분후 영화관의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왁자하다. 1관이다. 인숙 샘과 태호가 아이들을 데리고 들어갔다. 잠시 후 명숙 샘이 오셨다. 아직 y가 오지 않았다. 휴게실에서 y를 기다리던 명숙 샘이 갑자기 생각난 듯 말했다.
"요즘은 통 위에서 사람이 안 내려와요, 개밥의 효과인가 봐요."
몇 달 전부터 밥이나 반찬이 남으면 며칠간 모아서 5층 주인집 계단에 갖다 놓으면 집주인이 그걸 개밥으로 주고 있다. 때문인지 아이들이 조금만 뛰어도 내려와서 레이저를 쏘고 가던 주인이 요즘은 통 안 보인다. M샘 말처럼 정말 개밥의 효과일까? 앞으로도 잔반 열심히 모아야겠다. 늦게 오는 y와 d를 기다리느라 영화는 중반부터 볼 수 있었다.
아이들과 함께 보는 영화는 내용을 이해할 생각은 애초부터 버려야 한다. 그래도 이런 때나 되어야 영화관을 찾는다. 영화는 후반부에서 박진감이 넘쳤다. 잠시나마 몰입했다. 중간중간 잡념들이 스쳐 지나간다. 영화관을 나오는 아이들의 표정을 보니 재미있게 본 듯했다. 급하게 프로그램에 실을 증명사진을 찍었다. 찍고 보니 배경이 휑하다. 다시 찍었다. 아! 이제 이런 식의 증명사진을 찍고 싶지는 않다. 미리 주문한 햄버거와 콜라를 나눠주고 나니 밥 아홉 시가 훌쩍 넘었다. j는 오늘도 오지 않았다.
2010년 5월 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