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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경민 Sep 27. 2022

역경을 이겨내고 피워낸 쿠스코행

머피의 법칙이 성립되었던 쿠스코로 향하는 하루

역경을 이겨내고 핀 꽃이 가장 아름다운 꽃이다.
-디즈니 뮬란 中-


유독 그런 날이 있다.

모든 시련의 화살이 나를 겨누고 있는 기분이 드는 날,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실수들을 모조리 놓치지 않는 모범 열등생이 되는 날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날들이 있었기에 더 아름다운 기억이 피어나지 않나 싶다.

쿠스코로 향하던 길은 바로 그런 역경이었고 도착한 쿠스코에서의 기억은 아름답게 추억되었다.



엎질러진 커피


차가운 와카치나의 새벽. 따뜻한 인사말과 포옹으로 멕시코 친구들이 배웅해줬다. 나무와 풀장이 화려하게 치장된 호스텔은 왁자지껄한 온기를 가진 어제와는 사뭇 다르게 아무도 눈 뜨지 않은 듯이 고요했다.  


'바나나 샌드위치 커피'

조식을 받아 새벽에도 운행하는 콜택시를 타고 터미널로 향했다.

"앗 뜨거워"

커피를 엎질렀다. 손과 옷이 커피 범벅이 되어서 끈적끈적해졌다. 손가락을 움직이면 큰 일이라도 나는 듯이 미동 없이 뻣뻣하게 손가락을 펴고 화장실을 찾아 헤맸다.

"바뇨!(화장실!)"

다급해 보이는 나의 목소리에 건조한 표정의 직원은 빠르게 손으로 2층을 가리켰다. 잠도 덜 깬 상태로 손을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이건 단지 신호탄이었다는 것을.


거뭇했던 밤하늘에 붉은빛이 스며들면서 해가 솟아올랐다. 하늘에 누가 장난을 친 듯 검은 하늘은 보라색이 되었고 이내 뜨거운 태양과 함께 빨개졌다.

'일출을 보다니'

평소 같으면 누구보다도 깊게 잠들어 있을 시간에 일어나서 일출을 보는 건 특별한 일이었다.



지연된 버스



"혹시 버스 왔나요?"

"한 시간 지연되었어요."

"지연이요?"

아뿔싸. '미리 말해줬으면 잠이라도 더 잤지' 불만 가득한 표정이 감춰졌을지는 의문이다. 남미에서 버스는 자주 지연되지만 어쩔 때는 제시간에 와서 바로 떠나는 변덕쟁이다. 현재는 기다림만 남았다. 앞 뒤로 맨 가방, 손으로 쥐고 있는 신발과 옷가지들을 모두 짊어지고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할 일이 없다. '휴대폰이나 해야지' SNS로 사람들의 삶을 훔쳐보았다. 어떻게 사는지 볼 수 있지만 선택적으로 올리는 글들은 실제를 보여주지 않았다. 나만 하더라도 SNS에선 버스의 기다림, 오랜 시간 버스행, 위험했던 경험이 없는 무탈하고 행복한 여행자로만 보이니까. 1시간 반이 지나서야 버스가 도착했다.


다음 목적지는 리마를 거쳐가는 쿠스코이다.

'이번엔 호텔을 예약해놓자'

걸어 다니며 발견한 호텔을 들어가는 우연성이 주는 즐거움보다 피곤함을 풀어줄 침대로 가능한 한 빨리 점프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드는 날이었다. 이때까진 리마로 향하는 4시간의 버스가 남미에서 제일 짧게 탄 버스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버스 하차장

맥을 못 추리고 잤다. 과음, 수면부족, 버스 지연, 엎질러진 커피. 피로가 쌓이니 잠은 금방 들었다.


"내리세요." 

침을 흘리며 자던 나를 흔들어 깨웠다. 화장끼 없는 얼굴, 산발인 머리, 앞뒤로 든 짐까지. 피곤해서 현실 분간이 안 되었다. 밖에선 또 사람들이 몰려와 길을 막는다. 


"택-씨?" 

우버 값으로 흥정한 택시를 짐과 함께 물아일체가 되어 탑승했다.  


멍을 때렸다. 큰 아울렛, 현대자동차들, 색깔별로 지은 낮은 건물들, 거미줄 같은 전깃줄 등. 눈앞에 처음 보는 리마가 지나갔다. 



공항 앞에 도착하자 시장통 같은 분위기가 보인다.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나가니 어느 때보다 집요하게 사람들이 들러붙었다.

'아니 저기도 사람 많잖아요. 왜 저예요?'

안전요원에게 표를 검사받아 공항 내부로 들어가는 시스템이다. 안전요원에게 가까워지기란 쉽지 않았다.



비닐랩이요?



"저 이미 표 있어요"

냉랭한 표정으로 말하고 길을 뚫고자 했다. 나의 냉랭한 표정보다 험악한 표정을 지은 아저씨는 길을 가로막았다. 그리곤 굳건하게 말했다.

"그게 아니야, 가방에 랩을 둘러야 해."

"그게 무슨 소리예요?"

"코로나 때문에 가방에 비닐랩을 싸야지 공항에 들어갈 수 있어."

멀리 있는 사람에게 동의를 구했다.

"맞지?"

"필수지! 당연히 필수야!"

"코로나 때문에 꼭 해야 해!"라는 대답이 반복적으로 돌아왔다.


당황한 나를 보며 가방을 벗겼다. 어안이 벙벙했다. 무슨 상황인지 파악이 되지 않았다. 한 몸처럼 등에 붙어있던 가방은 남정네 네 명에게 허무하게 빼앗겼다. 


'저 사람들은 랩 안 씌우고 공항에 들어가는데' 

단체 여행객들이 안전요원의 검사를 통해 씌워진 비닐랩 없이 공항에 들어갔다. 나는 알았다. 한통 속으로 날 속여서 돈을 채가려는 무리라는 것을.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은 당황한 나를 보자 먹잇감을 찾은 것처럼 노동요를 부르며 랩을 신나게 감쌌다. 그리곤 내 가방 앞에 서서 손을 내밀었다.


"20달러"

"저 돈 없어요"

험악했던 표정이 악랄해졌다. 랩을 씌워줬으니 돈을 달라는 것이다. 가방을 막곤 스페인어로 나를 꾸중했다. 알아듣지 못하는 꾸중이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수도 없는 지경이다. 도움의 눈빛을 안전요원과 경찰에게 보냈다. 그들은 이들을 눈감아주는 듯했다. 난 그들의 안중에도 없었다.


"그냥 5달러만 줘"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었다. 솔깃했다. 그래서 돈을 주려고 꺼냈는데 20달러짜리밖에 없었다.

"혹시.. 잔돈 있어요?"

"당연히 있지."

20달러를 건네자 한 청년이 내 가방을 들고 안전요원에게 데려다주었다.

"잔돈은요?

무시하곤 사라졌다. 아마 가방 들어주는 값으로 나머지 돈을 가졌나 보다.


안전요원에게 물었다.

"(비닐랩을 가리키며) 이거 필수예요?"

"아니요"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믿지도 않으면서 당하다니' 

앞에서 실소하는 나를 보며 안전요원은 "경찰 불러드려요?"라고 물었다. 앞에서 날 본 척도 하지 않았던 경찰. "아니요" 대답을 하고 공항으로 들어섰다.








호객꾼은 들어올 수 없는 공항. 비교적 평화로웠다.

분노로 비닐랩을 뜯어냈다. 엄청나게 큰돈은 아니지만 거짓으로 똘똘 뭉친 사기를 당한 기분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비행기를 탈 때쯤 진정이 되자 '그 사람들도 오늘 돈 벌어서 가족들과 외식은 할 수 있겠다.' 싶었다. 그냥 그들에게 따뜻한 밥 한 끼를 사줬다고 생각하기로 마음을 다잡았다.


약 1시간의 비행으로 도착한 쿠스코. 버스로는 12시간이다. '시간이냐 비용이냐?'의 질문에 따라서 가는 방법이 달라질 것 같다. 쿠스코라는 마을은 지금까지 봤던 도시들과는 달랐다. 주황과 갈색의 집들이 장엄한 산을 타고 올라갔다. "우와"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첫인상이었다.


그냥 제발 가주면 안 될까요?


쿠스코 공항

꺼지기 직전인 휴대폰으로 우버를 불렀다.

'제발 빨리 와라'

남았던 페루 돈을 몽땅 비닐랩에 쏟았다. 쿠스코에서 택시비만 남기고 다시 환전하려 했던 계획은 무너졌다. 다행히도 택시가 잡혔고 휴대폰이 꺼질 때 우버 택시가 내 앞에 멈춰 섰다. 기막힌 타이밍이라고 생각하며 택시를 탔다. 그런데 택시 기사는 출발할 생각이 없었다. 번역기를 돌리더니 나에게 건넸다.


"우버에서 측정된 돈이 너무 적어. 그 돈에서 나는 70% 밖에 못 받아서 돈을 더 줘야 해"

현금이 없는 상태였다. 상황을 말과 몸으로 시도하다가 결국 번역기로 돌려주었다.

"세뇨리따(아가씨!)"

나를 조르기 시작했다. 돈이 정말 없다면서 주머니를 뒤집어 깠다. 피곤함은 최대치를 향했다.



"제발 가주세요!"

현금이 없어서 우버를 불렀다. 정당한 돈을 내고 탔다. 그냥 편하게 '다 왔어요'라는 말을 듣고 싶었다. 현금이 있었다면 더 줄 테니 빨리 가자라고 했을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상황은 나 자신을 더 힘겹게 만들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짜증이 이만치 났다. 주머니에 있던 멕시코, 미국 동전들을 털어서 건넸다.


"이번만이에요"

그는 드디어 출발했다. '뭐가 이번만이라는 거야. 장난하나' 당연히 출발해야 하는 기사는 생색을 냈다. 택시 아저씨와의 실랑이는 남아 있던 진까지 빼놓았다. 하루가 굉장히 길고 고단했다. 나중엔 그저 출발해준 걸로 감사했다. 택시기사는 가는 내내 여자 친구와 연락하는 듯했다. '아 여자 친구랑 데이트 비용이 부족했으려나?' 혼자 어림짐작만 할 뿐이었다.


재가 되어버린 충전기, 그리고 뜻밖의 환대


입구를 찾기 힘든 호스텔. 다른 여행객의 도움으로 들어섰다. 드디어 방에 들어섰다. 고대하던 순간이었다. 자리에 눕기 전 배터리 충전을 위해 충전기를 꽂았다.


충전기 상황

"지지직 퍼-엉"

내 눈을 의심했다. 스파클이었다. 나의 새하얗던 배터리 충전기가 검은색으로 변했다. '미국 전류가 더 센가? 뭐가 잘못되었지?' 하마터면 큰 일 날 뻔했다. 황당했고 사실 같지 않아서 웃음이 나왔다. 까매진 충전기는 더 이상 쓸 수 없었다. 나는 호스텔 안내 데스크로 갔다.


"충전기를 꽂았는데 충전기가 터졌어요"

직원도 믿지 않는 눈치였다. 정말 미안하다며 방을 바꿔주었다. 충전기를 살 곳을 물었다. 당장 휴대폰 배터리가 없으니 혼자 인터넷으로 찾을 수도 없었다. 그녀는 지도에 두 군데를 표시해서 건넸다.

'2022년, 지도를 들고 길을 찾다!'

사람들은 모두 휴대폰으로 길을 찾는 시대이다. 나는 지도를 보며 탐험가라도 된 마냥 길을 나섰다.



첫 번째 매장은 휴대폰 케이스를 잔뜩 팔 것 같은 매장이었다. 직원에게 물으니 듣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없다고 했다. 하지만 뜻밖의 호의가 갑자기 찾아왔다. 줄을 서던 소녀는 이야기를 듣더니 도와주겠다고 나섰다. 지도를 보더니 함께 가주겠다고 했다.

'또 무슨 일 생기는 거 아니야?'

타인의 환대가 절실히 필요했지만 갑작스러운 친절에 의심부터 했다. 일단 같이 가되 이상한 길로 빠지면 도망가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녀는 매우 친절했지만 경계심을 한껏 놓지 않았다.


쿠스코 축제

"쿠스코 축제 기간이라 남자 친구 만나러 왔어요. 그런데 갑자기 일이 늦어졌다고 약속이 취소되어서 할 일이 사라졌었는데 잘 되었네요."

그녀가 말했다. 도착한 휴대폰 매장에는 충전기가 존재했다. 그녀는 모국어로 자연스럽게 구매까지 모든 것을 도와주었다. 그녀가 여행자에게 베푸는 환대로 평정심을 얻을 수 있었다.


"감사해요! 어떻게 갚아야 할지.."

"괜찮아요. 다른 사람들을 똑같이 도와주면 그게 저한테 갚은 거예요!"

그녀는 싱긋 웃는다. 잠깐의 순간이지만 나를 배신하지 않은 그녀의 친절함에 의지했었다. 고마움을 담은 작별인사를 하면서 나 또한 다른 누군가에게 호의를 베풀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엎친데 덮친 격. 찾아온 고산병


드디어 누웠다.

갑자기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바로 투어 예약을 하려던 계획은 무산이 되었다. 설사와 두통 등까지도 몰려왔다. 축제를 뒤로하고 한숨 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서 잠도 안 왔다.

'아 이게 고산병인가'

 높은 고도로 인한 두통, 설사 등 고산병의 징후였다. 뜬 눈으로 고통받으며 누워있었다.


"꼬르륵"

그런 아픔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배가 미친 듯이 고팠다. 쓰러질 듯한 배고픔이다. 생각해보니 아침 먹고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너무 많은 일들이 계속되니 밥 먹는 것도 까먹은 것이다. 힘없이 나섰더니 얼음장 같은 쿠스코의 겨울과 마주했다. 쌀쌀한 바람을 맞으니 걷기도 힘들었다.


"그냥 들어가서 쉬어야겠다."

조금 걷다가 다시 왔던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악"

그 순간 길에 깊게 파인 구멍에 걸려 엎어졌고 무릎에서는 피가 났다.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오늘 무슨 날이길래 이런 시련들을 계속 주시나요'

평소라면 별거 아닌 것처럼 털고 일어나서 걸을 것이다. 유독 끊이지 않는 시련이 이어지던 이 날은 무너질 것 같았기에 눈물을 삼키면서 힘겹게 일어섰다.



진주는 조개가 모래알에 의한 고통을 이겨내고 만들어진다


"충전기 사셨어요?"

"네. 구매했어요! 이젠 배가 고프네요"

"2층에 식당 있어요!"

내부에도 식당이 존재했다. 지친 몸을 이끌고 올라가서 음식을 주문하고 고산병 약과 함께 비웠다.


"빨리 내일이 되었으면 좋겠다."

내일은 또 다른 해가 뜬다. 빨리 내일이 와서 고생스러웠던 하루가 나를 무너뜨릴 수는 없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세상은 멍청비용과 고생비용을 지불했다고 앞으로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한 배움을 주었다.


"어쨌든 살아남았고 결국은 이 도시에 도착했지 않았는가?"

아이러니하게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룸메이트들과 여행담을 나누니 날카로웠던 고통들을 견딜 힘이 생겼다. 현지인의 호의와 여행자들과의 대화는 소설로 치면 조력자의 역할을 했다. 예상치 못한 적들이 찾아오더라도 다시 맞설 에너지를 주는 것이다.


 고생 끝에 도착한 쿠스코는 아름다운 기억들로 가득했다. 여러 유명한 사람들을 보면 역경을 이겨내고 마침내 이뤄낸 것들에 대한 서사가 넘쳐난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쿠스코로 향하는 고통의 모래알들이 쿠스코에서 발견할 진주들을 빛내기 위한 과정인 듯했다. 인생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듯했다. 시련이라는 모래알의 크기와 모양은 모두 다르지만 그로 인해 자신만의 크기와 모양을 지닌 진주가 만들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쿠스코

세상의 중심 ‘배꼽’이라는 뜻을 가진 쿠스코는 과거 잉카 제국의 수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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