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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경민 Oct 02. 2022

최절정 고도의 무지개 산을 정면에서 마주하다

해발고도 5000m가 넘는 비니쿤카 

다른 언어를 가진 사람들

새벽 네시 출발. 큰 차에 탑승하자마자 마취총을 맞은 것처럼 깊은 잠에 빠졌다. 차가 멈춰 섰다. 밥을 먹으란다. 잠에서 덜 깼다. 밖에 나오니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때린다. 얼어있는 웅덩이가 보인다. 내리기 싫다. 뒤에선 다른 사람들이 내가 먼저 내리길 기다렸다. 어쩔 수 없이 밀려 나왔다.


아는 사람이 없다. 동양인마저도 없다. 혼자 등반은 자신이 없다. 다들 짝이 있는 듯했다. 

"같이 먹어도 될까요?"

옆자리였던 친구에게 같이 밥을 먹자고 했다. 

영어와 스페인어가 가능한 페루 친구 피에르, 영어가 조금 가능한 페루 친구 한스, 영어를 아예 할 줄 모르는 페루 친구 가브리엘과 베네수엘라 친구 클라우디아. 그리고 스페인어를 못하는 나.

이렇게 다섯 명이 모였다. 


'언어'라는 장벽은 서로의 정보를 알기 힘들게 한다. 하지만 친해지는 데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침을 함께하며 

옆자리 베네수엘라 언니가 몸으로 표현하는 배려는 손을 타고 전달된다. 

추워 보이는 나에게 따뜻한 물을 따라주는 손길. 

커피를 타 주고 빵을 나의 그릇에 담아주는 온기가 가득한 손길. 

손발이 녹는 것 같다. 몸으로 추위와 배고픔을 나타내곤 마주 보고 웃었다. 

베네수엘라 언니가 말을 걸면 페루 친구가 번역을 해줬다. 

베네수엘라 언니는 카메라를 페루 친구에게 건네며 사진을 찍으라고 했다. 우리는 손을 꼭 마주 잡고 고개를 서로 기대곤 사진을 찍었다. 


덜컹덜컹 거리는 차 안에서


페루 친구들은 피우라라는 지역에서 함께 놀러 왔다고 했다. 

베네수엘라 언니는 페루의 수도 리마에서 놀러 왔다고 했다. 

"리마?"

"베네수엘라에서 페루로 많이 이민 와"

옆에서 페루 친구가 설명을 덧붙인다. 


베네수엘라. 전 국민의 96%가 빈민층이 되어 버린 나라, 500만 명의 국민이 해외로 이탈해 버린 나라, 2018년 한 해에만 인플레이션이 170만% 오른 나라. 한때 남미의 최고 부자 나라였던 베네수엘라는 초인플레이션의 터널 끝에 경제가 몰락했다. 마두로 대통령의 경제 정책 실패와 가장 큰 돈줄이었던 석유 가격 폭락, 미국과의 관계 악화로 인한 경제 제재, 장기 집권을 위한 부정부패가 겹겹이 쌓인 것이 원인이었다. 굶주린 국민들은 쓰레기통을 뒤지거나 주변 남미 국가로 떠나게 되었다.


책인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의 한 장면이 그려진다. 

‘꿈속에서 그물을 쳤다. 나는 물안경을 쓰고 물 속으로 들어가 내 그물로 오는 살찐 고기들이다. 그물코에 걸리는 것을 보려고 했다. 한 뗴의 고기들이 내 그물을 향해 왔다. 그러나 그것은 살찐 고기들이 아니었다. 앙상한 뼈와 가시에 두 눈과 가슴지느러미만 단 큰 가시고기들이었다. 수백 수천 마리의 큰가시고기들이 뼈와 가시 소리를 내며 와 내 그물에 걸렸다. 나는 무서웠다. 밖으로 나와 그물을 걷어올렸다. 큰가시고기들이 수없이 걸려 올라왔다. 그것들이 그물코에서 빠져나와 수천 수만 줄기의 인광을 뿜어내며 나에게 뛰어올랐다. 가시가 몸에 닿을 때마다 나의 살갗은 찢어졌다. 그렇게 가리가리 찢기는 아픔 속에서 살려달라고 외치다 깼다.’


높은 산에 둘러 쌓여 이동한다. 초록색이지만 건조해 보이는 산들이다. 산에 둘러싸인 비포장도로에선 차가 심하게 덜컹거렸다. 창문에서의 덜컹거리는 소리가 배경음악처럼 깔린다. 



무지개산으로 떠나자


"이거 껴"

피에르는 나에게 장갑을 건넸다. 손발이 얼 것 같은 날씨다. 바람막이와 패딩으로 무장했지만 얼굴과 손은 바람에게 세차게 두들겨 맞았다. 장갑을 끼고 나니 나를 이끌어줄 지팡이도 주었다. 등반이 시작되었다. 

'숨 쉬기 힘든데?'

높은 고도는 다른 세계였다. 

'쉽지 않겠구나'

처음부터 느껴졌다. 단순한 스페인어를 배우며 올라갔다.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수브레(위로)" "밤모스(가자)"

냅다 소리 질렀다. 허파로 들어오는 공기를 모조리 들이켰다. 우리는 하나의 공동체로 똘똘 뭉쳤다. 서로 응원하며 올라갔다. 쌀쌀한 바람과 함께 강렬한 햇볕은 눈을 뜨지 못하게 했다. 옆 길엔 말을 타고 이동하는 사람이 보인다. 건너편엔 눈이 덮인 산도 보인다.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천천히 장면이 포착된다. 금방 지치기 일쑤였다. 높은 고도는 나의 본래의 체력을 1/3로 만들었다. 다리엔 힘이 안 들어갔다.  


"우린 할 수 있어!"

옆에선 지치지도 않는다. 웃으면서 할 수 있다고 외친다. 나를 지탱해주는 끈을 그들이 쥐고 있다. 그 얇은 끈을 부여잡고 얄팍한 용기를 잃지 않고 나아간다. 


비니쿤카 등산길의 상인들. 그리고 나타나는 산들의 무지갯빛

'끝이 있을까?'

스르륵 날아온 모래들이 나에게 앉는다. 구불구불한 황야로 걸어가는 모습. 넓고 광활하다. 숨을 고른다. 베네수엘라 언니는 내 옆을 지켜줬다. 우리는 머레이와 랜만이라는 알코올을 손에 부어 코로 들이킨다. 와사비보다 맵다. 코 끝이 찡하더니 숨이 뻥 뚫린다. 이렇게 숨을 쉬기 힘든 곳에도 음식을 판매하는 사람들이 있다. 라마와 사진 찍게 해주는 사람들도 있다. 대단하다.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무지개 같아!"

붉은 먼지가 나부끼는 땅바닥만 볼 게 아니었다. 고개를 드니 산이 무지개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자연보다 아름다운 빌딩을 좋아했다. 생각의 변곡이 찾아온다. 압도적인 풍광에 매료된다. 왔던 길을 돌아본다. 거대한 우물에 걸어온 길은 기다란 지렁이가 꿈틀 거리는 것 같다. 산맥이 계속 형성되는 끝없는 길. 


"쁘리오(추워)"

최절정이다. 가파른 계단이 남았다. 말 탄 사람들도 내려서 오르기 시작한다. 진짜 추위도 시작이다. 고도가 높을수록 춥다는 건 글이 아닌 몸으로 체감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줄을 잡고 한 걸음씩 떼어 앞으로 나아갔다. '조금만 참자'고 생각하며 이를 악물었다. 

"저기 봐!"

주저앉을 뻔했다. 체력 소진으로 돌아갈 걱정부터 했는데. 무지개산이라는 대자연에게 겸손해졌다. 가쁜 숨을 멈추고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았다. 

'값진 시간이었구나.'

치열하게 올라왔다. 갑자기 지팡이를 짚어가며 걸어온 길은 아름다운 순례길로 느껴졌다. 친구들과 하이파이브를 나누며 서로를 축하했다. 꼭대기에서 아름답게 치장하고 있는 라마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 머리가 헝클어지는 바람을 그대로 맞으며 있는 그대로 사진을 남겼다. 


아름다운 비니쿤카


"해발고도 5,036m! 우리 해냈어!"

한쪽은 무지개산, 한쪽은 눈 덮인 산. 꼭대기에 쓰러지듯 앉았다. 우리는 서로 기대앉아서 그 순간이 영원하길 바랐다. 질식할 만큼 드라마틱한 장면이다. 나란한 층이 쌓은 형형색색함은 햇빛을 받아 근육질의 윤곽을 드러냈다. 


"우리 좀비 같아"

내려가는 길에 베네수엘라 언니가 좀비 흉내를 내며 말한다. 나도 따라 한다. 내려가는 길은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모래바람이 더욱 심해졌다. 온몸은 모래로 칭칭 휘감겼다. 입에 들어오는 모래를 무시하고 계속 떠들고 장난쳤다. 노력은 언어의 장벽을 허물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이 사회에는 같은 언어를 쓰더라도 서로 다른 얘기를 하는 두 명을 보기 쉽다. 한 귀로 듣는 경우 말이다. 우리는 적어도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왜 사서 고생을 하냐고?'

자연의 영광을 눈앞에 마주하는 것, 서로를 이끄는 끈을 붙잡고 응원해주는 것. 이 두 가지만으로도 몽글몽글한 아름다운 기억이 되었다. 선택하지 않았다면 후회했을 것이다. 



페루 친구들과 함께 하는 저녁


배가 고팠다.

분명 등산이 끝나고 뷔페식을 먹었다. 이동길엔 페루 빵인 "츄타"를 먹었다. 화려하기보단 담백한 맛에 이끌려 심심할 때마다 뜯어먹었다. 그럼에도 도착해서 자고 일어나니 다시 배가 고팠다.


"아르마스 광장에서 만나자!"

오늘 본 페루 친구들과 저녁을 먹기로 했다. 친구의 여동생에게 추천받은 맛집으로 올라갔다. 친구들은 치킨 수프를 꼭 먹어야 한다면서 강조했다. Limbus. 레스토랑의 뷰는 끝내줬다. 쿠스코의 야경이 한눈에 보이는 식당이었다. 

"닭윙, 치킨 수프, 맥주 주세요"

치킨 수프는 라면 같았다. 그들은 면을 숟가락으로 먹었다. 치킨 수프에 자파라는 것을 넣어 먹는다. 땅콩 같은 식감이다. 페루엔 중국음식이 많다. 익숙한 아시아 음식을 많이 접할 수 있었다. 

식당뷰와 치킨수프

한국. 그들은 북한에 대해 궁금해했다. 어디를 돌아다니든 한국(south korea)에서 왔다고 하면 북한에 대해 묻는다. 얽히고설킨 이야기를 한다. 이외에도 한국 관광지, 유명한 음식들을 입이 마르지 않도록 설명한다. 

페루. 피우라는 광활한 태평양과 눈부신 해변이 있는 곳이라고 했다. 따뜻한 해변뿐만 아니라 남극대륙에서 볼 수 있는 혹등고래를 만날 수 있다는 것에 놀랐다. 친구들은 한 번 놀러 오라고 했다. 그 아름다움을 사진으로 보고 들으니 다음 목적지를 피우라로 하고 싶어질 정도였다.



"Oa miwita"

친한 친구에게만 주는 칭호라고 한다. 피에르는 오늘 아침에 내가 예쁘다고 한 팔찌를 건넨다. 선물이란다. 이 팔찌를 보면서 오늘의 추억을 기억해달라고 했다. 감동을 주는 사람들이다. 지금도 연락을 주고받으면서 서로의 삶을 응원한다. 번역기로 언어의 한계도 넘어선 우리는 다양한 이야기를 즐긴다. 그날 그때의 힘든 등반을 함께한 우리는 동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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