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로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은혜는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선뜻 믿을 수가 없다. 꿈, 그래 꿈이었을 것이다. 모든 게 꿈이야. 나는 나도 모르게 깜박 졸았을 거야, 지선의 전화도 꿈의 일부였겠지. 은혜는 핸드폰을 들어 통화목록을 살폈다. 그러나 거기엔 지선의 이름이 있었다.
띵동, 현관 벨소리가 울린다. 지선이다. 제 아빠 장례 치를 때보다 더 수척해 보인다. 장례식 이후, 계속 경석의 유품만 들여다봤던 것일까, 이제 부모 모두가 곁을 떠났으니 지선의 마음은 더욱 헛헛할 것이다. 오랫동안 못 보던 것과 아예 이 세상에 없는 것은 너무도 다르다. 매일 보고 지내던 가족은 아니었고 성인이라고 해도, 그 상실감의 무게란 당사자가 아닌 이상 감히 상상하기 어렵다.
"첨부터 불쑥, 아무 설명 없이 막내 고모 꿈에 침입할 생각은 아니었어요."
지선은 현관에 선 채로 사과부터 한다. 은혜는 지선의 손을 잡아주며 부드럽게 안으로 이끈다. 지선을 소파에 앉힌 채 물 한 잔을 내주고, 은혜 자신은 커피콩을 곱게 간다. 평온한 침묵, 아늑한 집, 지선은 안도한다. 눈앞에 놓인 물을 보니 그제야 자신이 목말랐음을 깨닫는다.
은혜의 집 안 가득 커피 향이 퍼진다. 묵직하고 진한 원두의 향, 인도네시아 만델링이다. 선물 받은 것인데, 진하고 단단한 풍미 끝에 느껴지는 약간의 단맛이 좋았다. 은혜와 지선은 나란히 앉아서 커피를 마셨다. 꿈속 상황만 없었다면, 그저 한가롭고 좋은 시간이었을 텐데, 슬몃 밀려드는 두통을 다행히 커피가 눌러주었다.
"막내 고모, 고맙고 미안해요."
"급하게 말 꺼내지 않아도 돼. 오빠라면 뭔가 했을 법한 일이야. 그런데 왜 네가 이런 일에 휘말리게 됐는지 나는 그게 걱정이 돼."
지선은, 장례식 이후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을 모두 은혜에게 털어놓았다. 그때 느꼈던 감정들, 혼란스러움과 두려움 그리고 공포까지 남김없이 말했다. 이제와 더 숨기는 것은 은혜의 걱정만 더 키우는 일이다. 솔직히 말하고 그다음을 은혜와 함께 고민하고 싶었다.
은혜는 지선의 말을 모두 듣고 난 후, 차분히 커피를 마셨다. 어떤 게 지선을 위해 나은 선택인지를 고심했다.
"지선아, 그 사람은 행복해 보였어?"
"그건 모르겠어요. 너무 짧은 순간이어서... 다만, 그는 세월만큼 늙긴 했지만 건강했고... 고모, 그 사람은 살아있었어요. 엄마가 아닌, 그 사람이 살아서 세상을 활보하고 있었어요. 나는 그게 소름 끼치게 싫었어요. 무섭죠?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