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꿈 방문자 27화

그날

by 하늘위로

비가 세차게 내리는 깊은 밤이었다. 은혜는 오랜만에 술을 마셨다. 마음껏 취해도 괜찮은 날이다. 은혜는 크고 단단한 얼음 하나를 술잔에 담았다. 40도 내외의 진갈색 술은 입술에 닿을 땐 차갑고, 속에선 뜨겁게올랐다.


일주일 전, 지선은 그의 꿈에 방문했다. 그를 바라보는 지선의 눈은 이제 평온했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심장, 옳은 선택을 할 것이다. 지선이 그를 심판하기만 하면 이 오래된 사건은 종결된다. 한 가족의 가장 소중한 것을 앗아갔으니, 그는 그저 제대로 된 벌을 받기만 하면 된다. 죄에 유효기간이란 없다. 처벌받지 못한 벌은 다소의 이자와 함께 빚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김종도는 자신 앞에 서 있는 지선을 보자, 그전 꿈과 이어진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깨고 나면 필시 꿈일 테지만, 제법 선명한 통증과 흔적을 남겨 종도에게는 꿈인지, 저승인지 혼동되는 공간이었다.


지선이 처단하고픈 김종도라는 사람은 타고나길, 강한 생존본능이랄까, 동물적 감각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위험한 냄새를 잘 맡았으며, 약육강식과 임기응변에 능했다. 때에 따라서는 곧잘 우격다짐과 무논리도 내세웠다. 또한, 본래 체격이 크고 힘도 센 편이었다. 두려움 없고, 거칠 것 없이 그렇게 살아온 인생이었다. 그런데, 생전 꿈이라곤 안 꾸던 그가 혹독한 악몽을 꾸었다. 마치 현실처럼 생생한 통증을 느끼면서. 지선을 보면서 종도는 먼저 찾아온 지옥의 신을 떠올렸다. 자신을 신이라 칭하던 그 여자는, 표정을 읽을 수 없는 무채색의 인간이었다. 그는 직감적으로 그런 인간은 피하는 게 옳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대부분 그런 인물은 상대가 어떻게 발버둥 쳐도 끝까지 자신의 뜻을 관찰시킨다.


종도에겐 지선이 그가 오래전 죽게 한 젊은 여성의 딸이라는 의식 따윈 없다. 알았다한들 별다른 죄책감은 없다. 그저, 지나간 일일 뿐인 것을. 한낱 실수였지 않은가, 그로 인해 자신은 생업인 운전에 필요한 면허를 잠시나마 잃게 됐으니 뼈아픈 건 본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만난 지옥의 신이다. 무슨 변고인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종도의 살갗이 불에 그을린 것처럼 따가워진다.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은 기억이 종도를 압박한다. 무슨 일이든 일단 내지르고 보던 그였지만, 지옥불의 경험을 또 하고 싶지는 않다. 적당히 잘 넘어가는 방법은 없을까? 그런데 눈 앞의 있는 이 여자 역시 만만하지 않아 보인다. 암담하다.


은혜가 미리 찾아가 심어둔 강한 공포 탓인지, 종도는 저항할 생각을 잃었고, 대항할 수 있는 상상력을 완전히 가두었다. 그가 조금이라도 저항하려고 뭔가를 떠올렸다면 꿈의 세계는 당장 뒤틀렸을 것이다. 다양한 상황에 대비해, 몇 가지 대처법을 생각해두었지만, 결국은 꿈의 주인 뜻대로 세계는 바뀔 것이고, 그렇게 되면 방문자에겐 절대적으로 불리한 입장이 된다. 다행히 강한 암시에 걸린 종도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제 꿈의 세계는 지선의 손에 완벽히 들어왔다.


지선은, 계획대로 그를 죽였다. 그는 자신의 꿈속에서 황망히 사라졌고, 꿈의 세계가 소멸했으므로 곧이어 지선도 튕겨나갔다. 현실에 있는 지선의 몸이 충격으로 움찔거렸지만, 은혜가 지선의 몸을 가볍게 마사지하며 몸이 충격을 무리 없이 흡수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잠시 후, 후욱하고 큰 숨을 내쉬며 지선이 깨어났다. 그 순간 바로 앞에서 지선을 내려다보고 있던 은혜와 눈이 마주쳤다.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를 바라보았다. 한참을 두 눈이 마주친 채 그렇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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