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에서 깬 지선이 느긋하게 외출 준비를 했다. 가볍게 화장도 하고, 밖으로 나갔다. 햇살이 좋다. 걷다가 마음에 드는 카페에 가서 브런치를 먹었다. 토마토와 얇은 햄, 치즈, 사과가 크루아상 안에, 약간 매운맛이 나는 달콤한 소스와 함께 들어있었다. 맛있다. 없던 식욕이 생기는 맛이다. 오랜만에 남이 내려준 커피를 마셨다. 좋은 원두 덕인가, 좋은 기계 덕인가... 집에서 먹던 것보다 풍부한 맛이 났다. 굿모닝, 좋은 오전이란 이런 것일까 하고 지선은 생각했다. 그녀는 지금까지 이 사소한 기쁨을 잊고 있었다. 일상은 이렇게 평범하게 달달한데, 그동안 왜 보이지 않았을까... 그건 아마, 지선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혼자 행복하기 미안했던 것 같다. 그날 꿈속에서의 복수, 남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지선에겐 꼭 필요한 일이었다. 그런다한들 엄마가 돌아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죄를 지은 자, 정의사회 구현 목적이 아닌 오직 피해자를 위해 정당한 벌을 받게 하고 싶었다.
20년 전 그날은 참 서러운 날이었다. 누군가 죽는다 해도 세상은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내게는 전부인 사람은, 내게만 전부인 사람이었던 것, 그러니 세상이 아무렇지 않게 돌아가는 것도 당연하다. 그건 어쩔 수 없다. 세상은 나만의 것이 아니니까. 내가 불행하다고 해서 모두 불행해질 필요는 없다. 변함없이 평범한 일상은 모두를 위한 것이다. 단, 그는 아니어야 한다. 지선은 그가 그 사고 이후에도 아무렇지 않게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것이 목에 가시가 걸린 듯 불편했다. 그래서 지선은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이 불편함을 되돌려줄 수 있는 날을, 엄마 이제 편히 쉬어.라고 거리낌 없이 말해줄 수 있는 날을. 지선 본인의 평범한 일상을 매일매일 저당 잡힌 채 기다렸다. 그리고 모든 준비가 끝났을 때 지선은 이제 그만 그의 평범한 일상을 가져오기로 했다.
누군가 그랬다. 아무것도 내려놓지 않고 하는 사과는 사과가 아니라고, 다른 이의 것을 파괴시켜놓고, 다른 이의 것을 취해놓고 입으로만 하는 진심 어린 사과, 그것은 사과가 아니라고. 그건, 그냥 위기를 피하고 싶은 것뿐이다.
난, 아주 나쁜 사람은 아니야. 뼈저리게 반성하고 있어. 진심으로 미안해. 이거? 이건 왜? 이건, 포기할 수 없어. 사과했잖아. 내가 이것을 포기한다고 너한테 득이 되는 것도 아니고... 그 문제와 이건 관계없어. 그건 겨우 실낱같은 관계야. 관계없는 거와 마찬가지야. 미안하다고 했잖아. 이렇게 반성하고 사과하는데 그만 용서해주면 안 되니? 벌써 지난 일이고... 돈? 그 돈은 안 되고, 나는 지켜야 할 누군가가... 그걸 다 내놓으면 나더러 죽으라고? 나는 진심으로 반성하고 후회하고 있어. 일? 그 일은, 내 전부야. 그만 둘 수가... 안돼. 알리지 말아 줘. 이건 당신과 내가 풀 문제지. 굳이 다른 사람들이 알 필요 없잖아. 어차피 과거 일 꺼내봐야 다른 사람들은 기억 못 해. 오히려 이야기 꺼내면 그때 일만 더 상기될 뿐이고, 이제 그만 당신도 그 일에서 벗어나. 당신만 손해야. 내가 이렇게까지 사과하잖아. 결국 돈이야? 날 파멸시킬 거고? 꼭 이렇게까지 해야겠어? 내가, 내가 미안하다고 하잖아. 봐? 무릎까지 꿇었어. 이 나이에 내가...
눈물과 사과는 오직 자신을 지키기 위한 것이다. 지선은, 앞으로 무얼 할까 생각했다. 그동안 그녀가 원하던 건 아주 단순한 거였다. 한 사람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제대로 된 처벌. 그걸 바란 것뿐이다. 햇살이 잘 보인다. 음식이 맛있다. 그랬구나, 지선은 그제야 자신이 그 사고 이후 단 한순간도 편하지 않았음을 알았다.
황지선, 잃어버린 일상을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