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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혜영 Jan 01. 2022

아홉 살, '마음'을 들여다보자


나의 어린 시절을 생각해 보았을 때, 어린이가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안 돼'의 세계에서 '돼'의 세계로 어서 진입하고 싶기 때문다. 어린이와 학생이라는 신분으로 세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고, 존재의 가치도 미미했다. 사회적인 동물인 인간이 사회에서 차지하는 비중다고 생각하스스로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중요한 결정을 하고 책임을 지는(거라 생각한) 어른들이 어린 내게 하는 '안 돼'는 합당한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나도 어서 커서 그들만이 갖는 무한 '돼'의 세상에서 멋진 어른 되어 중요한 역할을 고 싶었다. 그게 내가 어른이 되고 싶었던 가장 큰 이유였다.


막상 어른이 되고 보니 민망한 어른의 모습에 순수한 아이들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기가 자주 부끄러워진다. 어린이 앞에서 함부로 말하고 행동하는 어른들의 모습이 아이들의 글에 비칠 때, 그때라도 나를 돌아볼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으로 여긴다.


신호등을 걷는데 우리 반 친구 00 이가 있었다. 그래서 "안녕."하고 인사했다. 우린 같이 걸었다. 뚜벅뚜벅. "야아옹~"
"응? 무슨 소리지? 새소린가?"
갑자기 00 이가 "저기!"라고 하며 손가락으로 나무를 가리켰다. 우와! 나는 너무 놀라 눈을 끔벅끔벅거렸다. 바로 아기 고양이었다. 나는 태어나 이렇게 귀여운 고양이를 본 적이 없다. 걷기도 힘든 거 같은데 아장아장 걸었다. 귀엽기도 하지만, 불쌍한 마음이 들었다. 왠지 아기 고양이가 "엄마!" 하며 소리치는 것 같았다. 마침 어른이 보였다.
"여기, 아기 고양이요!"
하지만 어른은 무시하고 가 버렸다. 그때 어떤 오빠가 "아기 고양이!" 하며 소리쳤다. 오빠가 아기 고양이를 만졌다. 나는 조마조마했다.
'내 오빠가 (고양이는) 사람 냄새나면 어미가 버린다고 했는데...'
나는 고양이가 버려질까 봐 걱정됐다. "아, 늦겠다." 우린 아쉬운 마음으로 떠났다. 난 내 말을 무시하고 간 어른이 미웠다. 물론 사정이 있겠지만, 난 00 이에게 "어른이 대처를 더 잘해줄 것 같았는데..."
하며 계단을 올라갔다. 고양이 걱정을 하다 보니 교실 앞에 도착했다. 걱정된다.


유채(가명)가 <아기 고양이>라는 글에서 만난 어른은 바쁜 출근 시간에 아이의 말을 들어주기 곤란했을 것이다. 어린이는 어른들의 사정을 고려해 준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그러나 어린이를 대하는 어른의 '태도'는 어린이 스스로가 존중받고 있는지 판단의 이유가 된다. 아무리 바쁜 사정이 있었더라도 어린 생명을 걱정하는 어린이의 눈빛에 드러났을 간절함을 모른 척해서는 안 되었다. "에고, 추운데 어쩌면 좋을까?"와 같은 공감의 말 한마디라도 있었다면 유채는 어른을 끝까지 이해해 주었을 것이다. 대부분의 어린이들처럼.


지나간 기억은 새로운 기억들로 채워지기 마련이라 우린 어린 시절의 나가 얼마나 어른들로부터 존중받지 못했는지 잊어버렸다. 어른께 감히 말대꾸를 하면 버르장머리 없는 아이가 되었고, 수업 시간에 선생님께 쓸데없는 질문을 많이 하면 소위 '성가신' 학생이 되었다. 어른들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 줄 알았다.


어린이의 마음을 알기 위해 들여다보려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절대로 그 마음과 가까워질 수 없다. 유채의 말을 무시하고 가버린 그 사람은 이 아이들이 자신의 힘없는 노후를 책임져줄 막강한 어른으로 성장할 거란 생각을 오늘은 미처 하지 못할 것이다.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어린이의 마음을 알아주는 어른이라야 진정 어린이들이 사정을 고려해 줄 가치가 있다.


나는 지난주 토요일에 할머니 댁에 갔다. 엄마가 사촌 동생이 온다고 해서 기분이 좋았다.
도착하고 큰외삼촌, 큰외숙모가 나를 쳐다보실 때, 오랜만에 봬서 낯가렸다. 치킨과 피자가 왔을 때, 맛있게 먹기는 했는데 너~무 낯가려서 눈물이 나왔다. 엄마는 내 마음도 모르고
"너 왜 그래? 엄마 기분 좋게 나왔는데 이게 뭐야?!!"
엄마는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나는 참았던 눈물이 터지고 말았다. 그리고 (사촌) 동생은 내가 놀아주지 않아서 삐져 버렸다. 앞으로는 낯가리지 않도록 노력해야겠다.


찔레(가명)는 모처럼 방문한 할머니 댁이 <눈물 났던 할머니 댁>이라는 글로 남고 말았다. 평소 밝고 명랑한 찔레의 본성을 아는 사람은 찔레가 이렇게 낯을 가리는 아이 었나, 의아할 정도다. 그만큼 스스로도 그 상황에서 마음대로 조절되지 않은 자기감정에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 찔레의 엄마 역시 오랜만에 만난 친지들 앞에서 아이가 보이는 낯선 모습에 저으기 당혹스러웠나 보다. 아이의 감정을 살필 겨를이 없었던 것을 보니.


부모들은 자주 오해한다. 타인들 앞에 보여주는 내 아이의 모습이 부모의 육아 방식과 교육관을 평가받는 잣대라고. 아이에 대한 칭찬은 부모가 잘 가르친 탓이요, (부모 입장에서 보았을 때) 아이의 못난 모습은 부모가 잘 돌보지 못한 탓이라고.

그러나 이 또한 알아야 한다. 아이가 혼자가 된 듯한 마음일 때, 아이의 마음 곁에서 든든히 지켜주어야 할 사람은 부모라는 것을. '넌 혼자가 아니야. 걱정하지 않아도 돼.'라는 신호를 주는 믿음직한 부모 곁에서 아이는 잠시 주춤할 수는 있을지언정, 계속 불안해하지는 않는다. 아이의 불편한 낌새에 "괜찮니?" 물어봐주는 부모의 관심, 그것이 부모가 받아야 할 '진짜 평가'가 될 것이다.


오늘은 너무 바쁘다.
일어나자마자 학원 숙제한다. 열심히 해야 한다. 그다음에 피아노를 한다. 그리고 내려왔는데 불 끄는 걸 잊어버렸다. 일단 왔다. 그러고 나서 도란(글쓰기)을 쓴다. 다 쓰고 나면 영어책 8까지 읽어야 한다. 하~ 많다, 많아. 공부가 적었으면 좋겠다.  


<아이, 바빠>라는 제목의 괭이(가명) 글이다. 대한민국에서는 초등 2학년마저도 바쁘다. 아이들 하교 시간이 평소보다 늦어졌다간 전화통에 불이 난다. 학교 앞에서 대기 중인 학원 차량에 제시간에 타지 않는 학생들이 있으면 바로 집으로 연락이 가기 때문이다. 처음엔 학원 때문에 학교가 하교 시간마저 눈치를 봐야 하는 현실이 개탄스럽기도 했지만, 학생들의 안전한 귀가와 연결된 문제라 웬만하면 하교 시간은 맞춘다. 바쁜 우리 아이들의 마음까지 동동거리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어떻게 하면 창의적인 아이로 키울 것인가? 부모들의 끊임없는 고민거리지만 타의에 의해 바빠진 시간에 아이들의 창의적인 생각이 자랄 틈은 없다.

괭이가 얼마나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인지 알고 있는 나는 조금 걱정이 된다. 언젠가 괭이의 자유로움이 틀에 갇혀 다른 친구들과 똑같은 색깔을 갖게 될까 봐. 자주 시를 쓰고 넘실대는 상상의 세계를 글로 표현하 괭이만의 세계가 좁아지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오늘의 나는 언젠가는 아홉 살 어린이였다.

타인 앞에서 하는 실수를 두려워하고 칭찬에 목말라하면서도 자신만의 색깔을 가졌었던 아홉 살 말이다. 지금, 그 색깔을 얼마나 유지하고 있는가.


2022년 잃어버린 나만의 색깔 찾기.

새해가 되어도 별로 큰 목표를 세우지 않는 인간 유형인 내가 모처럼 갖는 목표다.


마음을 그리고 읽다 by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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