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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혜영 May 23. 2022

어린이들의 문장엔 편견 없는 사랑이 있다


누군가 나에게 어린이에게 배울 점을 하나만 꼽아보면, (매우 어렵겠지만) 그중 '편견이 없는 사랑의 마음'을 꼽겠다.


어린이에게 가장 부족한 것이 있다면 '경험'일 테다. 경험이 많다는 건 어른들이 이미 만들어 놓은 세상을 그만큼 많이 겪게 되는 과정일 테니 과연 어린이의 경험이 많아진다는 것이 좋기만 할 것인가. 그런 경험에는 온갖 편견과 선입견으로 얼룩진 어른들 생각까지 덧씌워지는 과정도 포함될 테니 그런 경험이라면 차라리 겪지 않는 게 낫지 않을까, 싶다.


영상을 봤어요. 눈도 안 보이고 귀가 안 들리는 친구가 나왔어요. 그 친구들이 놀이터에서 불편하지 않게 놀면 좋겠어요.


'장애인의 날'을 맞아 관련 영상을 보고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눈 후 쓴 소라(가명)의 이다. 모두가 함께 놀아야 할 놀이터에서 소외되는 친구들이 있다는 사실에 아이들은 안타까워했다. 한 아이가 자기네 아파트 놀이터에서는 영상에 나온 몸이 불편한 친구들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런 친구들이 없는 게 아니라 아파트 놀이터가 그 친구들이 놀기에는 불편하고 위험해서 나와 놀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내 말에 그 아이눈동자가 순간 커졌다.


어른들의 세계에서는 왜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이 (그들에게도 마땅히 보장된 권리인) 이동권을 보장해 달라 필사적 시위를 벌이는 것인지 아이들이 묻는다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왜 자꾸 출근 시간대에 시위를 벌여 출근길에 불편을 초래하냐는 비장애인들의 불평은 또 어떻게 이해시켜야 할까. 사회적 약자들의 권리가 마땅히 보장될 때, 모두에게 편한 세상이 된다는 당연한 사실을 우리는 어린이만큼만 이라도 알고 있는 것일까.


오늘은 미술학원에서 그림을 그렸다. (중략) 집에 가는 길에 꽃을 따 아픈 엄마에게 주었다.
오늘 친할머니 댁에 갔다. 할머니는 돌아가셨지만 나도 행복하게 살고 친할머니와 할아버지도 하늘나라에서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꽃을 따 아픈 엄마에게 건네고, 돌아가신 할머니, 할아버지의 행복을 바라는 어린이의 마음 앞에 무장해제되지 않을 어른들이 있을까.

가정의 달 5월은 가족 간의 사랑을 확인하고 공고히 하는 달이다. 나와 연결되어 있는 가족을 생각하는 마음이 깊을수록 누군가의 외로움은 더 커질 수 있음을 아이들이 잊지 않기를 바란다.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를 염려하는 아이들의 마음이 소외된 이웃에 대한 관심으로까지 연결되기를 소망한다.


오늘 (강아지를) 입양하고 처음으로 강아지와 산책을 했다. 처음이라 조이(강아지 이름)가 조금 무서워했지만, 내가 안아주기도 하고 발맞추어 걷고 뛰며 금방 적응했다.
오늘은 구찌(강아지 이름)와 신나게 놀아줬다. 구찌가 놀고 자는 모습을 관찰했다. 귀엽고 깜찍한 구찌는 겁쟁이지만 그게 구찌의 매력이다. 구찌는 어쩌면 지구 최강 귀요미일지도.


어린이의 문장에는 반려동물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하다. 입양된 후, 처음 산책을 나선 강아지가 무서워하지 않도록 발맞춰 걷고 뛰어주는 어린 견주의 배려에 입양된 강아지는 얼마나 안심이 됐을까.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면 상대의 단점도 예쁜 법. 반려견이 가진 모든 특성을 매력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까닭은 아이의 마음에 사랑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다정도 병인 양하여 자기 강아지가 '지구 최강 귀요미'로 보일지라도 그것은 사랑에 빠진 모든 존재들의 속성 아니던가. 지금은 겁이 많은 강아지에 불과하지만, 사랑을 실컷 받은 구찌가 언젠가는 늠름하게 성장하여 어린 견주를 지켜줄 날이  것이다.  


큰아빠와 '00 곱창'이라는 곱창 가게에서 안 매운 곱창을 먹었다. 먹었더니 그렇게 맛있지는 않았고, 아저씨의 수염을 깎은 냄새가 났다.
매운 곱창은 이상한 냄새가 안 난다. 그런데 아직 나는 매운 음식을 잘 못 먹는다. 우리나라에서 맛있는 음식은 거의 다 맵다. 얼른 매운 음식을 먹는 연습을 많이 해서 빨리 다 먹어버리고 싶다.


죽순은 대나무류의 땅속줄기에서 돋아나는 어리고 연한 싹으로, 성장한 대나무에서 볼 수 있는 형질을 다 갖추고 있다고 한다. 아이들의 문장에서 죽순처럼 옹골진 표현을 만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푸름이(가명)가 곱창을 글감으로 쓴 글에서 안 매운 곱창에서 아저씨의 수염을 깎은 냄새가 났다표현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아저씨가 수염을 깎은 냄새가 과연 어떤 냄새 일지는 잘 른다 하더라도 얼마나 이상한 맛이었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은유 작가는 <글쓰기의 최전선>에서 자기 삶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갖지 못할 때 누구나 약자라고, 자기 언어가 없으면 삶의 지분이 줄어든다고 했다. 아직은 충분히 즐길 수 없는 매운맛의 세계를 푸름이가 제대로 알게 되는 날, 세상이라는 가장 매운맛까지 한꺼번에 맛보게 될지도 모르겠다. 푸름이가 차근차근 매운맛의 단계를 연습해서 세상의 매운맛을 자기의 언어로 거뜬히 설명하고 삶의 지분을 충분히 누렸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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