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혜영 May 01. 2022

어린이의 문장으로 본 '우리가 몰랐던' 어린이의 세계

[어린이날 100주년] 아홉살 어린이의 문장에서 알 수 있는 것


23년 여의 교직 생활 중 올해로 8년째 초등 2학년 담임을 맡고 있다. 아, 초임 교사 시절에 한 번 2학년을 맡은 적이 있으니 도합 9년째인가. 초임 시절엔 뭐든지 서툴렀으니 아무리 최선을 다했다 해도 그때의 나를 떠올리면 언제나 부끄러움이 앞선다.


"지금부터 모두 선생님을 봅니다. 두 번만 이야기할 테니 집중해서 들으세요."

별의별 집중 방법으로 아이들의 시선을 붙들어 천천히, 또박또박 말해 주어도 도로아미타불. 용기 있는 한 아이가 손을 들어 "근데요..." 하며 이미 다 말해준 것에 대해 묻기 시작하면 내 말을 한 번도 안 들은 것처럼 돌변하여 같은 질문을 무수히 반복하던 아이들. 그 아이들을 충분히 수용하기에 그때의 나는 한없이 미숙했다.


나는 저학년 체질은 아닌가 보다,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이건 아니다, 싶어서 한동안 고학년 아이들만 맡기도 했다. 그러다 어느 해 운명처럼 다시 2학년 아이들을 맡게 되었을 때, 초임 시절 좌충우돌했던 2학년 담임 시절을 소환하며 슬쩍 걱정이 된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다시 만난 2학년 아이들은 초임 시절에 만났던 아이들과 뭔가 달랐다. 초등 입학 연령이 달라진 것도 아니니 1년씩 더 자라 학교에 들어온 것도 아닐 텐데, 이상하게 아이들이 더 의젓하고 더 똘똘했다. 나도 모르는 새 아이들이 훌쩍 성장한 것이 아니라 아이들을 대하는 내 태도가 변했음을 안 것은 한참 뒤였다.


쌓인 교직 경력만큼 다양한 아이들을 만나며 나도 어느샌가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한층 노련해진 나의 집중 잡기술(?) 덕분이 아니었다. 집중도가 짧은 어린이들은 같은 말도 최소 30번은 해야 알아듣는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만큼 말해 줄 준비가 된 내 마음가짐의 변화 때문이었다. 아이에 맞는 속도로 조금 기다려주면 대부분의 아이들이 성장하는 힘을 가졌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2학년 아이들과 만들고 오리고, 오카리나, 리코더를 부르며 그림책을 읽고 글을 썼다.


특히 아이들과 함께한 '글쓰기'는 겉으로 보이는 아이들의 모습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아이들의 마음까지 알게 해 주었다. 어린아이들에게 글쓰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알기에, 아이들에게 글쓰기 거름이 되기를 바라며 아이들이 쓴 문장보다 더 긴 코멘트는 달아주었다. 맞춤법도, 띄어쓰기도 개의치 않는 담임 선생님의 "오직 너의 마음만을 보고 싶다"는 진심을 확인하면, 아이들은 대부분 흔쾌히 글을 써 마음을 보여주었다.


그렇게 오로지 한 독자만이 완독 하는 아이들의 보석 같은 문장들이 켜켜이 쌓여 갔다. 아이들의 글을 읽으며 나는 때로는 미소 짓고 때로는 코끝이 찡해졌다. 때로는 아이들의 기발한 생각에 절로 감탄사가 나오기도 했다.

그렇게 나를 들었다 놨다 했던 아이들의 문장들을 지면상 몇 가지만 추려 소개한다. 2학년 아이들의 글이라 때로는 문법상 오류도 있고 문장 간 연결이 매끄럽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래서 오히려 상상력이 발동할 여지가 많은 것은 아이들 글의 '묘미'다.


오늘은 엄마가 회사 간 날이었다. 엄마 첫 회사 가는 날인데 걱정이 된다.


오늘 드디어 배을 탄다. (중략) 근데 아빠는 배를 안 탄다고 했다. 왜냐하면 그 배는 3명밖에 못 타기 때문이다. 아빠는 괜찮다고 했지만 난 아빠의 마음을 다 안다.


오늘 샤워실에서 엄마가 무섭게 문을 닫고 갔다. 무서웠다. 엄마가 미웠다. 엄마가 안아줬다. 그런데 엄마 옷이 젖었다. 엄마가 에라, 모르겠다 이러고 엄마와 물장난 샤워를 했다.


아직은 엄마, 아빠가 세상의 전부인 어린아이들이 부모와의 관계에서 가장 많은 마음의 변화가 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엄마, 아빠를 걱정하고 그 마음을 헤아리는 어린 마음들을 만나면 난 교사가 아니라 그냥 '엄마' 마음이 되고 만다. 이런 아이들의 글을 마음 가득 담고 좀 더 좋은 엄마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한다.


나는 놀던 중에 선생님께 물었다. "일광욕은 햇빛으로 하는 거고 만약 월광욕이 있으면 달빛으로 하는 거예요?" 선생님께서 "그런가?" 하셨다. 나는 밤에 방에서 커튼을 열고 월광욕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빠는 나를 '0채소'라고 부른다. 한 번, 두 번 0채소라고 부르면 화가 난다. 그래서 자꾸 하지 말라고 얘기해도 오빠는 계속한다. 그래서 나도 오빠를 '0주스'라고 불러야겠다. 그래야 오빠도 내가 화난 느낌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일광욕'이라는 말에만 익숙한 나는 '달빛 샤워'를 떠올리는 아이의 생각에 감탄했다. 아이가 밤에 커튼을 열고 월광욕을 했을지 확인하지 못한 점은 내내 남는 아쉬움.

이름으로 백가지 별명도 만들 수 있는 아이들의 세계를 우리도 지나왔다. 내 어린 시절, 이름으로 온갖 별명을 짓던 기억을 소환하며 미소 짓다 아이가 계획한 통쾌한 '이름 복수'에 응원을 보탠다.


오늘 아빠와 독감 예방 접종을 했다. 처음에는 안 떨었는데 점점 숨이 막혀가면서 떨려왔다. 내 차례가 오는 순간, 가슴이 쿵쾅쿵쾅 식은땀이 뚝뚝 떨어졌다. 내가 맞을 차례가 됐다. 사나이의 명예를 걸고 꼭 울지 않겠다. 무서웠지만 꾹 참고 울지 않았다. 정말 무서웠다.


오늘 놀이 공원에 갔다. 처음에 바이킹을 타고 싶었는데 위로 갔다가 아래로 가고 도는 놀이 기구를 탔다. 정말 무서웠다. 나는 태어날 때 무서운 걸 잘 못 견디게 태어났고 동생은 잘 견디게 태어나서 나는 무섭고 동생은 안 무섭다.  


나고 자란 9년 여의 생애 동안 씩씩함을 강요받은 남자아이들의 자존은 독감 주사 앞에서, 동생과 함께 탄 놀이 기구 앞에서 시험대에 오른다. 아이 아빠의 아빠도 아들에게 사나이는 함부로 울지 않는 거라고 했을 것이다. 두려움을 꾹 참아낸 순간, 더 큰 사나이의 세계로 한 발 내디뎠을 아이들. 더 잘나고 더 못나서가 아니라 모두가 다르게 태어난 것일 뿐이라는 지혜를 아홉 살 인생은 어디에서 배웠을까.

이 아이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 더 큰 세상 속에서 사나이의 '진정한' 명예가 뭔지 알게 될 날을 고대한다.


직업 놀이를 했다. 나의 직업은 떡볶이 가게 직원이다. 장사가 안 된다.ㅠㅠ 70% 세일로 했다. 그래서 사람이 올 줄 알았는데 사람이 안 온다. 요즘 사람들은 양심이 없다.


이 글을 읽고 마음이 쿵, 내려앉았던 기억이 있다. 글을 쓴 아이의 엄마가 떡볶이 가게를 운영해서 놀이에 임했던 아이의 마음이 진심이었음을 나중에야 안 것이다. 코로나 기간 동안 장사가 잘 되지 않아 가게를 폐업하게 된 엄마를 지켜본 어린아이의 마음을 잘 몰라줘서, 미리 알지 못해 한 번도 팔아주지 못하고 영영 양심 없는 사람으로 남고 말아서, 내내 아쉽고 미안하다.


4교시에 여행 풍선 놀이를 했다. (중략) 우리가 졌지만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괜찮았다.  1팀(이긴 팀)에게 박수를 쳐줬다.


이 아이들이 중, 고등학교에 올라가도 최선을 다했다면 이기지 못해도, 꼴등을 해도 괜찮다고 말해 줄 어른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잘못을 인정할 줄 알고 규칙을 지키며 구성원 누구도 배제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이에게 진심으로 손뼉 쳐 줄 수 있는 세상. 우리 아이들에게 물려주고 싶은 세상이다.


오늘은 너무 바쁘다. 일어나자마자 학원 숙제한다. 열심히 해야 한다. 그다음에 피아노를 한다. (중략) 그러고 나서 도란(글쓰기)을 쓴다. 다 쓰고 나면 영어책 8까지 읽어야 한다. 하~ 많다, 많아. 공부가 적었으면 좋겠다.  


대한민국에서는 초등 2학년마저도 바쁘다. 어떻게 하면 창의적인 아이로 키울 것인가? 부모들의 끊임없는 고민거리지만 타의에 의해 바빠진 시간에 아이들의 창의적인 생각은 자랄 틈이 없다.

자주 시를 쓰고 넘실대는 상상의 세계를 글로 표현하곤 했던 이 아이. 아이만의 세계가 틀에 갇혀 다른 친구들과 똑같은 색깔을 갖게 될까 봐 걱정이다.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아홉 살 어린이였던 때가 있었다. 타인 앞에서 하게 될 실수를 두려워하고 칭찬에 목말라하면서도 자신만의 색깔을 가졌던 아홉 살 말이다. 그 아이들에게 놀이동산도, 선물도 좋지만, 이번 어린이날에는 그 마음을 좀 더 들여다보았으면 좋겠다. 가족을 걱정하고 세상의 모든 두려움과 맞서느라 고군분투하는 어린 마음을.


'우리가 몰랐던' 어린이의 세계에 귀 기울여 들으려는 어른들의 진정이 닿으면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주지 않을까? 100주년을 맞은 어린이의 날, 얘들아 마음을 다해 축하한다!



100주년을 맞은 어린이날을 축하합니다! by 네이버



* 100주년 어린이날을 축하하며 그간 <어린이의 문장> 매거진에 실었던 아이들의 글을 몇 개 모아봤습니다. 가정의 달 5월, 어린이날을 시작으로 모든 가정에 감사와 행복이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이전 14화 어린이의 든든한 '뒷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