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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수민 Oct 30. 2022

8.

- 읽으며 들으면 좋은 플레이리스트 : 멈춘 시간 (https://www.youtube.com/watch?v=fHlisUM1E6M&t=834s




 ⎡치익.. 오늘 새벽 2시경에 남해 바다 부근으로.. 치익.. 작은 태풍이 지나갈 것으로 보입.. 치익.. 칙..⎦


잘 안 되네. 세하는 곳곳에 녹이 슨 라디오 카세트를 두어 번 두들겼다. 고장인가… 컴퓨터를 작동시켜봤지만, 오늘따라 인터넷도 작동도 심각하게 느렸다. 카세트와 컴퓨터 전원 버튼을 끄고 켜기를 몇 번이나 반복한 지 어연 50분째. 지나친 제동과 실행에 과부하가 걸렸는지, 날씨 소식을 알려주어야 할 라디오는 소리를 알아듣기 힘들었고, 컴퓨터는 무기한 휴식 상태에 들어갔다. 무의식적으로 핸드폰을 켰지만, 이제는 계통을 해두고 있지 않기 때문에, 터치되는 시계로 사용한 지 오래였다. 

세하는 눈을 질끈 감으며 엄지 손가락을 들어 오른쪽 관자놀이를 지압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내가 살다 살다 너처럼 핸드폰을 장식으로 갖고 다니는 녀석 처음 본다.” 세하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현서가 말했다. 

“딱히 연락할 사람도 없는 걸요. 그리고 여기 인터넷도 되고, 전화기도 있는데. 정 급할 땐, 여기 꺼 쓰면 돼요.” 세하가 말했다.

“그래도, 비상시라는 게 있잖아. 우리 근무 초창기에 그러니까 너랑 나, 그렇게 두 사람이서 교대 근무할 때 너 당번인 기간 동안, 그때에도 한 번 여기 전체 정전되는 바람에, 너 막.”

“아, 선배.” 

“왜 이야기를 끊고 그래, 아직 안 끝났어.” 현서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다. 장난칠 때 특유의 표정으로 세하를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무슨 일 있었어요?” 옆에 서 있던 주원이 물었다. 해단도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세하와 현서를 번갈아 바라봤다. 

세하는 주원을 한 번 쳐다보고 그 옆에 서 있던 해단을 살핀 다음 다시 주원을 바라보며 답했다. “아닙니다.” 그리곤 현서를 향해 고개 돌리며 말했다. “제가 복무할 당시 처음 정전이 났던 날 이후로 전부 제대로 수리했고, 후에 한 번 더 살펴봤습니다. 그때에 기기도 바꿔서, 모두 신형이고. 따라서 장비 노화로 인해, 정전이 일어날 일은 더 이상 없습니다.”

“그래, 알았다. 그래도 만약이라는 게 있잖아. 바다 한복판에서 여자애가 겁도 없어.”

“선배, 저 애 아닙니다. 그리고 여기서 여자가 왜 튀어나옵니까. 그리고 선배도 여자이시잖습니까. 성별로 사람 가르지 말라면서요. 군인에 그딴 거 없다고 가르치신 것도 선배이시잖습니까.”

“그건 군대에서의 이야기이고… 그래, 내가 미안해. 근데 너는 섭섭하게 언제까지 선배라고 부를 거야. 화나면 다나까 말투 쓰는 버릇도 여전하구나. 여튼 언니라거나 너 편한 대로 부르라니까.”

“… 편한 게 선배라는 호칭입니다.”

“그렇게 나오면 나도 할 말 없지… 그래도, 세하.”

세하는 순간 생각했다. 대답하지 말까.

“…네.” 세하가 말했다. 

“그래도 넌 나한텐 아직 애야. 요것아.”


두통이 가실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안 되겠다 싶었는지 세하는 약상자를 찾아 두통약을 꺼내 먹었다. 위의 대화는 불과 한 달 전 1팀과 교대할 때 현서와 나눈 대화였다. 왜 하필 지금에서야 선배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지. 육지에서 핸드폰 개통하고 넘어오는 건데. 이번에 나가면 개통 좀 해야겠다. 따지고 보면 지난번 정전 때도, 내게 핸드폰이 있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으면 그 사단까진 안 날 수 있었을 텐데. 또 이미 지난 일을 가지고, 나도 정말이지. 어느새 세하의 오른쪽 귀 위쪽 옆 부근이 벌겋게 되어 있었다. 생각하느라 관자놀이를 지나치게 누른 탓이었다. 어쨌든, 단단히 긴장하고 있어야 한다. 이 시기의 바다와 날씨는 들쑥날쑥하기에. 예전 이후로 그러니까 6년 동안은, 그때처럼 큰 태풍이 지나간 적은 없었지만, 또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일이었다. 


깊은 새벽으로 접어들어가자 점차 예사롭지 않은 바람 소리가 문틈 사이로 들이치듯 새어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시작인 건가. 벽에 걸린 시계가 새벽 세 시를 지나가고 있었다. 관리실 철문이 불규칙하게 덜컹거렸다. 바람이 어디서 이렇게. 밖에 정문이 열린 걸까. 아까 들어오면서 분명 문을 닫았던 것 같은데. 만약을 대비해 비상 발전기를 가동 시켜 두기 위해 세하는 지하실로 내려갔다. 

발전기 시스템을 자동으로 바꿔두고 세하는 몸을 일으켜 철문 앞으로 다가섰다. 문 손잡이를 붙잡으려는 순간, 지하실 불이 꺼졌다. 순식간에 사방은 암흑으로 뒤덮였다. 해단, 이 사람이 또. 세하는 반사적으로 기계판을 쳐다봤지만, 비상 발전기를 제외하곤 나머지는 완전히 전원이 나간 상태였다. 무엇보다도 발전기 가동을 멈추려면 지금 세하가 있는 관리실로 와야 했다. 관리실에는 세하, 자신밖에 없었다.  아무리 해단이라고 해도, 그 후로 봐왔지만 자신의 장난을 위해 다른 어선들에 피해가 되는 행동까진 할 사람은 아닌 듯했다. 그렇다면 이번은 진짜 정전이었다. 

핸드폰, 핸드폰이 어디 갔지. 불빛을 비추기 위해 세하는 핸드폰을 찾아 바지 주머니를 뒤적거려봤지만, 조금 전에 꺼내어 확인하고는 그대로 책상 위에 두고 나왔음을 깨달았다. 세하의 호흡이 점점 불규칙해졌다. 이럴 때가 아니었다. 소용없는 걸 알면서도 불안정한 호흡이 가다듬어지길 바라며, 세하는 주먹으로 심장 부근을 눌렀다. 등대 전체의 정전이라면, 빨리 관리실로 올라가 비상 발전기와 연결해야 했다. 그러나 세하는 짙은 어둠에 온 몸이 짓눌리고 심장이 죄어드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갑자기 들이닥치는 불안정한 심장과 호흡, 그리고 이내 그러다 심장이 터져서 죽을 것만 같은 느낌은 좀처럼 친근해질 수 없었다. 다른 한 손으로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머릿속 뇌가 움츠러드는 동시에 팽창하는 것만 같은 느낌이 쉼 없이 번쩍거리는 두통으로 일었다. 주변과 머릿속의 경계가 점차 흐려져갔다.


“한 번만, 한 번만 용서해주세요.” 어린 세하는 벽에 내몰린 채로 벌겋게 부어오른 볼 한쪽을 부여잡고 울고 있었다. 겁에 잔뜩 질린 표정이었다. 

“말 안 들으면, 독방에 들어간다고 말했지.”

“저, 엄마 보러 가야 돼요. 엄마가 데리러 온다고 했어요. 거기서 딱 기다리라고 했어요.”

“너희 엄만 이제 이 세상에 없어. 몇 번을 말해야 하니. 너 두고 다른 곳으로 갔다고.”

“아니에요. 엄마가.. 엄마가.. 저 데리러 온다고 했단 말예요.”

“얘가 정말. 정선생, 어서 데려가!”

“원장님..! 원..!”

어린 세하가 갇힌 독방의 지하실은 창 하나 나 있지 않았다. 빛이라곤 굳게 닫힌 문을 탈출구라고 가리키고 있는 초록색의 비상등이 전부였다. 그마저도 거의 희미해져가고 있었다. 어린 세하는 그 불빛 옆에 웅크려 앉아 있었다. 주위엔 곰팡이 핀 퀴퀴한 냄새에 습기가 얽혀 갑갑한 공기가 가득했고, 발의 개수를 알 수 없는 벌레들이 지나다니는 소리만이 적막 사이로 꺼림칙하게 들려올 뿐이었다. 


“잘못.. 했어요… 잘못..”

“선배, 세하 선배! 정신 차려요!”

“살려.. 주세요..” 세하는 눈을 뜨고 있었지만 눈에 초점이 없었다. 그 와중에도 신경이 곤두서 있는 듯 세하의 눈 주위는 경직된 채로 조금씩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언니, 저 해단이에요. 리해단! 정신 좀 차려 봐요!” 

해단은 세하를 들쳐업고 계단을 위로 올라갔다. 복도에 세하를 눕혀 두고 해단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다시 해단이 나타났을 때 해단의 손엔 물이 든 종이컵이 들려 있었다. 해단은 종이컵에 든 물을 다른 한 손에 조금 묻혀 세하의 얼굴에 조심스레 흩뿌렸다.

“선배. 세하 선배. 정신 좀 차려 봐요.” 해단이 세하의 어깨를 흔들었다. “언니!” 해단이 말했다. 

순간 언니라는 말소리에 세하의 눈 주위에 서려있던 긴장이 누그러졌다. 세하는 자신의 어깨 위에 얹힌 해단의 손을 붙들고, 

“강이서. 이서야. 이서니?” 

“네? 언니 아니. 선배, 저 해단이에요. 리해단.”

그제야 눈을 뜨고서도 먼 기억을 바라보고 있는 듯했던 세하의 눈동자에 다시금 초점이 잡혔다.  

눕혀져 있는 채로 있던 세하는 자신이 지금 바닥에 누워 있었음을 인지하곤 “미안합니다.”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아,” 밀려드는 두통에 자리에 도로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어지러운 듯,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면서 번번이 다시 일어나려는 세하에게 해단이 말했다. 

“앉아 계세요. 바로 일어나시면 안 좋아요.” 

“먼저, 등대부터…”

“제가 확인하고 왔어요. 통신 안테나가 바람에 꺾였던 것 같더라구요. 수리하고 왔고, 2층 들러서 재가동시켜서 다시 시스템 돌아가는 거 확인하고 왔어요. 안심하셔도 돼요.”

후. 그제야 세하는 안심한 듯 제자리에 멈추어 숨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자고 있을 시간 아닌가요..?” 몸을 일으켜 앉아, 해단이 새로 길어다 준 물을 받아 마시던 세하가 물었다. 

“오늘 아침에 예보에서 태풍이 온다고 들었어서요. 혹시 몰라서, 대기하고 있었어요.” 

“아…..” 그동안 해단에게 모질었던 스스로의 행동들이 빠르게 눈앞을 지나쳐갔다. 기억이었지만 보고 있기가 괴로웠다. 부끄러웠다. 눈을 감는 동시에 자신의 눈가에 손을 가져다 대어 짚으며 세하가 말했다. “… 감사합니다,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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