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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은지 피디 Jun 02. 2023

이 나이에 나를 심쿵하게 하는 사람

나이 들면 감정도 무뎌질 줄 알았는데.

어제 퇴근하고 집에 왔더니 놓여 있던 택배상자.

올해 초등학생이 된 아들이 내 택배상자에 마음대로 잔뜩 써놓은 말들.


6월'에', '틱'별 선물ㅋㅋ

삐뚤삐뚤 오타 가득이지만, 입학 당시 본인 이름 빼곤 한글 하나 제대로 읽고 쓸 줄 몰랐던 것에 비하면 대단하고 귀여운 발전이다.


학습지 풀었냐고 잔소리를 하기 전에 이 택배상자를 보고 일단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30대 중후반.

설렐 일이 사실 잘 없다.

긴장되는 일은 여전히 많지만, 그마저 기분 좋은 긴장보다는 스트레스를 동반한 긴장이 더 많다.


물론 가족이 있지만, 남편을 보고 이 나이에 설레면 부정맥을 의심해 보라는 아재스러운 농담이 있을 정도니, 사실 나에겐 두근두근 할 일과 대상이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래서 덕질이라도 하면 닿기 힘든 연예인이지만 그래도 '사람'을 상대로 설레는 거니까 물건에 집착하는 것보단 긍정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나에게 말 그대로 '심쿵'하는 감정을 들게 하는 유일무이한 존재는 바로 아들이다.


예전에 정주리 씨랑 촬영할 때였나, '아이를 낳기 전에 웃었던 웃음은 진짜 웃는 게 아니었다고.' 한 적이 있다.


혼자 아무것도 못했던 존재가 어설프게 뭔가를 하나씩 해내는 걸 보면,

정말 내가 과일도 아닌데 얼굴로 즙을 짤 수 있을 정도의 찐웃음이 바로 나온다.


아들이 제일 좋아하는 친할머니. (정작 키워주시는 외할머니는 잔소리가 많아서인지 늘 인기투표에선 하위권이다.)


제일 좋아하는 할머니가 잘하는 건 '칭찬', 별명은 '천사'.

아이나 어른이나 그저 나 예쁘다고 해주는 사람이 좋구나. 지적하지 않는 사람이 좋구나 하는 깨달음.


예전엔 객관적으로 누가 봐도 별로 잘 그리지도 않은 아이의 그림과 글씨를 왜 이렇게 냉장고나 집에 덕지덕지 전시하듯 붙여놓을까 하는 생각을 나 또한 했었다.


그런데 그야말로 무無의 상태의 아이를 낳고 지켜봐 오다 보니, 연필로 선 하나를 긋는 것도, 혼자 밥을 먹는 것도, 생각을 가지고 누군가의 별명을 지어주는 것도 기적이자 역사와도 같다.


저 삐뚤삐뚤한 글자 몇 개로, 온 가족이 행복했다.

대단하다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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