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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란 Jun 11. 2024

너는 왜 옆을 안봐?

평행이론 혹은 유유상종

“야. 왜 안 쳐다봐. 내가 손 흔들었잖아.”
“아. 그래? 몰랐네.”

나는 누가 내 코앞에 나타나기 전까지 잘 못 알아챈다. 무관심한 건지 감각이 둔한 건지 나도 잘 모르겠다. 그냥 앞만 보는 성향이 내 천성인 것 같다. 마치 옆을 보지 못하게 하는 차안대를 씌운 달리는 경주마 같다. 앞만 보며 달리는 경주말이랑 오래 함께 하다 보니 내 성향까지 변한 걸까? 아니면 원래 그런 인간이기에 나랑 비슷한 경주말에 매력을 느껴서 지금껏 함께 하고 있는 걸까?


어쩔 때는 이런 내 성향이 너무나 싫다. 그게 사람들에게 잘못하는 것 같기도 하고, 온갖 분위기를 빨리 캐치하고 상대를 편하게 해주는 그런 센스가 결여된 것 같아서 스스로가 답답하기도 하다. 그런 고민들이 나를 조그맣게 만드는 최근이었다. 해결도 안 되고 더없이 한심하게 작아진 나 자신을 어떻게 할 수도 없는 답답한 마음에, 그냥 운동화끈을 묶고 운동장으로 나갔다.


해 질 녘 달리기를 어쩌다 시작하게 되어서 지금껏 이어가고 있다. 말처럼 달리고 싶어서, 내가 운동을 시작한 건 전혀 아니다. 오히려 업무와의 분리를 위해서 시작한 운동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나는 내가 아끼는 동물과 같은 행위를 흉내 내게 되었다. 나는 평소에는 달리는 게 주업인 말을 치료하고, 집에 와서는 달리는 게 주업인 말을 흉내 내듯이 달린다.



다만, 말과 나의 차이는 있다. 나는 승부를 위해서 전력으로 달리지는 않는다. 런데이 앱에서 성우가 나보고 달리라고 지시하면, 포대자루가 누군가에게 들쳐매져서 이끌려가듯이 쥐어짜며 달리는 것에 가깝지, 그게 누구를 이기려고 하는 달리기는 아니다.

결승선의 기록을 깨기 위한 달리기가 아니다 보니, 나는 힘주고 앞만 보지 않는다. 때로는 달리면서 옆도 쳐다본다. 학교 안에서 농구를 열심히 하는 아이들도 쳐다본다. 두어 바퀴 돌면 점점 하늘색이 변하면서 노을이 지는  초여름의 분홍빛 구름도 쳐다본다. 때로는 나보다 더 빨리 뛰거나 더 느리게 걷는 이름 모를 메이트도 흘끗 쳐다본다.

딱 그 정도 주위를 둘러보며 생각 없이 뇌를 놓고 달리는 행위가 좋아지고 있다. 테니스처럼 누군가와 호흡을 맞춰야 할 필요가 없다. 골프처럼 스코어를 목표로 하는 운동이 아니다. 수영처럼 강사에게 수업을 받으며 신경 써야 할 수 있는 운동이 아니다. 원래 내가 잘하는 앞만 보며 가면 되는 운동이다. 밋밋할 법 하지만 그래도 어플에서 인증도장도 찍어주고 끝나면 칭찬도 엄청 해줘서, 나처럼 시키는 거 그냥 하고 칭찬 좋아하는 인간에게는 딱 좋다.


앞뒤 다 돌아보며 주위 상황 판단 못한다고 스스로 자책 속에 파묻혀 있다가, 그저 딱 30분 생각 놓고 달리고 나니 어플 속 AI님이 칭찬을 내 귀에 퍼부어 주었고, 그 인위적 칭찬조차 고팠는지, 어이없게도 달리기 전의 나의 자책 기운이 살짝 사그라들었다.


그래. 세상에는 오만가지 군상의 사람들이 있는데, 내가 내 모양대로 태어난 걸 가지고 나까지 가혹하게 미워하면 어떡하랴. 나라도 우쭈쭈 해주고 살아야지 뭐.


*우리나라 아님.


경주말들은 정해진 양의 풀과 사료를 먹고, 아침해가 뜨기 전 매일 새벽 트랙을 도는 미라클 모닝의 대표주자들이다. 그들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새벽 집중 달리기 훈련을 하고 마방으로 돌아간다. 온몸에 김을 뿜으며 땀에 젖어 집으로 퇴근하는 그들의 근육을 보며, 난 그 역방향으로 동물병원에 출근하는 시절이 있었다.


말과 함께 한지도 어느새 이제 20년 차를 향해 가고 있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요즘은 경주말들이 할 일 다 하고 방에서 졸고 있을 저녁 시간에, 내가 운동화끈 질끈 매고 트랙으로 나가고 있다. 희한한 평행이론 같다. 사람은 주위 환경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으며 산다고 하더니, 나는 아무래도 일도, 운동도 말처럼 동기화되나 보다. 매일 매일 앞만 보고 사는 루틴 신봉자 우리들. 그래. 누가 뭐라 하든, 유유상종이니 우리는 그냥 계속 같이 살고 계속 같이 달려보자. 아참, 그럼 이제 나도 이제 풀만 먹어야 되냐? (에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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