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하루의 극적인 탄생 기록
26년 전 그날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
아기가 태어나기로 한 예정일이 일주일이나 지난 오늘 나는 수술대 위에 누웠다. 어제 오후부터 가진통이 시작돼 입원수속을 밟았으나 18시간이 지나도록 아직까지 아기가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어제저녁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한 나는 이미 몹시 지쳐있었고 말할 기력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오후부터 가진통이 시작됐다. 나는 남편과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 이미 예정일이 많이 지나있었기 때문에 밤에라도 바로 출산을 할 수도 있다는 의사 소견에 바로 입원 수속을 밟는다.
가정과 같은 아늑한 분만실에서 산모가 편안한 마음으로 출산할 수 있다는 M산부인과는 당시 산모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분만실은 병원이라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예쁜 벽지와 멋진 인테리어로 꾸며져 있고 한가족당 방 하나를 통째로 쓸 수 있었다. 이곳에서 진통을 하며 밤을 꼬박 새웠다. 어느새 다음날 아침이 밝았다.
아침 9시가 되자 담당 의사는 유도분만을 지시한다. 예정 시간이 많이 지났고 산모도 많이 지쳐있단 판단에서다. 그러나 이게 웬일인가. 약물 투여 후 몇 분이 지나지 않아 산모는 호흡곤란과 급격한 혈압상승을 겪는다.
"수술실 확인해! 수면마취 후 응급 제왕절개수술로 간다" 다급한 의료진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런 게 죽는 건가?' 순간 나는 태어나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죽음의 문턱이 곁에 있음을 느낀다. 담당의사는 내 얼굴에 알코올을 부어 열을 식히며 "괜찮아요? 자연분만을 유도해 보려 했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네요. 곧 응급 제왕절개 수술에 들어갑니다. 저만 믿으세요"라며 차분히 산모를 이해시킨다.
만삭의 배 통증이 너무 심하고, 정신이 혼미했다. 설상가상으로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은 심한 통증의 척추마취 주사가 꽂힌다. TV에서나 보던 전형적인 수술실 조명을 느낄 새도 없이 정신을 잃는다.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회복실로 옮길 때였다. "아기 건강하게 잘 태어났어"라고 말하는 남편의 목소리를 들은 듯하다. 다시 정신을 차려보니 친정 부모님, 언니 얼굴이 보였다. 입원실이다. 아직 마취가 덜 깬 상태라 몸에 아무 감각도 없는 듯하더니 서서히 묵직한 통증이 느껴진다. 어느새 시계는 오후 4시를 향하고 있었다.
"똑똑똑!" 첫 미역국을 먹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가 입원실 문을 두드린다. '우리 아기다!' 내 팔뚝보다도 훨씬 작은 강보에 싸인 아기가 눈에 들어온다. 동글동글한 얼굴에 또렷한 이목구비가 갓 태어난 아기 같지 않다. 천사 같은 우리 아기가 내 눈앞에 있다.
"아기가 너무 예뻐요. 산모가 궁금해하실까 봐 살짝 보여드리려고요." 친절한 간호사의 배려로 아직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산모는 아기와의 첫 대면을 할 수 있었다.
그동안 참았던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칼로 에는 듯한 배의 통증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마침 그날은 우리 부부의 4주년 결혼기념일이었다. 아기의 극적인 탄생이 부부에게 선물 같은 하루를 선사해 주었다. 최고의 결혼기념 선물이 되어준 딸아이가 태어난 날, 긴 하루의 기록이다.
<하루의 단상> 은 일상에 대한 고찰 및 다양한 기억을 소환해 보려는 시도입니다. 이 과정에서 하루를 기록하고 잊고 있던 소중한 추억과 행복했던 기억, 제 곁을 지켜준 사람들을 떠올려 보려 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다양한 의견이나 공감하는 내용이 있으시면 댓글로 남겨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