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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혜 Sep 27. 2024

유서의 마침표는 오늘이었으면

유서는 마침표가 되겠고 난 치열하게 산 사람이 되겠지요 

"죽음"

삶과 죽음은 한 줄로 연결되어 있다. 절대 만날 수 없는 평행 상태이지만 언제든 결말을 맞이할 수 있는 상태에 놓인 두 단어.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죽음'에 대해서 슬퍼하면서도 사는 사람은 다시 살아난다. 나는 죽음을 두려워 하며, 살고자 유서를 쓴다. 유서의 뜻은 유언을 쓴 글이고, 유언은 죽음에 이르러 전하는 말이다. 죽기 전에 쓰는 것이 유서라는 것인데 다시 몸을 고쳐 앉고 제대로 말을 하면 '충동적인 마음'을 막기 위해 열네 살부터 유서를 썼다. 


자신이 쓰는 일기장에서도 거짓말을 한다는데 유서에는 못 쓸까?


일기장은 비밀리에 이뤄져야 한다. 공개되어서는 안 되지만 내가 손이 닿을 수 있는 편한 곳에 있어야 한다. 다만 한 책상에 있고, 숨긴다고 해도 평범한 공책 사이에 끼어진 일기장이지만 누군가에겐 책장에 꽂힌 한 종이만 될 뿐이다. 읽지 말라고 후회할 수 있다면서 애원하듯 표지에 잔뜩 써도, 사람들은 한낱의 궁금증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 페이지를 열게 되어 있다. 혹여 이 사람의 본성이 뭘까, 남들의 뒷담을 써 놨을까, 내 욕 썼나? 의 의구심으로 보게 되고 억지로 보게 된 의문의 열람자는 이 일기장의 주인공인 작성자에게 뭐라할 의무가 생겨 버린다. 그러니 솔직하게 쓴 당사자가 되려 부끄러운 죄악에 자신을 가두게 된다.


어느 날 어김없이 유서를 쓰는 나 자신이 한심스러운 순간이 있었다. 담는 말들은 하나 같이 주옥같은데 쓰는 날짜랑 내가 얼마나 죽고 싶은 지의 정도만 달라지는 이 종이에서 나는 그대로였다. 상처를 받아도 쉽게 아물던 나는 새로운 상처를 들쳐 매고 온 오래된 흔적들을 차마 이겨내지 못하고 그대로 구덩이에 처박혔다. 버티고 버티면 햇빛이 내리쬐는 따뜻한 날이 내 세상에도 머물다 가지 않을까라는 희망과 기대도 곤두박질쳤다. 한 번 더 버텨보고자 했던 생각은 '행복했었으면 죽지 않고 다시 살아갈 힘이 있다고 믿었을 거잖아.'라고 쉽사리 물에 잉크 쏟듯 번져 버렸다. 그냥 난 남들에게 들키지 않았던 구제불능이었다. 


그래서 누구보다 잘 살려고 노력했다. 도중에 포기하는 것은 더 무거운 죽음을 선택할 수 없다고 생각이 들었다.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해서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는 연습을 시작했다. 살면서 꾸역꾸역 버틴 건 나를 위로하는 글을 마구마구 써 내려가는 것이었다. 숨 막히는 나의 감옥에서 남는 숨을 부여잡고 버티니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연극이 버틸 수 있는 호흡기가 되었다.  살고 싶다고 생각이 들면 괴롭히던 악몽들은 나를 죽였다. 사람을 정신적으로 죽이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인가? 아니 그게 맞든 틀리든 개입하고 싶지 않다. 다 귀찮다. 그냥 눈을 감았는데 이승이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웃픈 생각을 해본다. 


연극 : 배우가 무대 위에서 대본에 따라 관객에게 연기를 보이는 예술


글의 예술에서 행동의 예술로 이어진 궁금증. 저 예술도 나를 살릴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와 동시에 발표 울렁증이 면접까지 잘 볼 수 있을까라는 막연함. 뒤덮인 꿈이 헤집어도 한번 신청의 도전을 거머쥐게 되었다. 


계속 써본다. 유서도 하나의 기록이자 나의 글이니까. 나의 글이니 나라도 사랑해 줘야 위로하고 보듬아줄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죽는다면 그것이 곧 나의 유서요, 끝까지 살아남는다면 나의 인생을 사는 해결책이자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에게 전하는 소중한 편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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