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히햐
절기상으로는 봄이 되었지만 봄 같은 생동함이 느껴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코로나 감염증이 시작된 작년 3월이 그러했습니다. 3월이 왔지만 여전히 겨울바람이 매섭게 불고 있고, 새 학기가 시작될 때가 되었지만 겨울방학은 아직도 끝나지 않고 있었죠. 예년 같으면 봄이 오는 설렘을 즐기며 비록 꽃샘추위가 있더라도 가벼운 외투를 걸쳐 보기도 하고 삐죽 내민 새싹과 꽃봉오리를 만나기 위해 야외로 나갔겠지만 아직은 날씨도 마음도 긴 겨울 속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때 봄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인터넷 검색창에 ‘봄’을 검색해 보았습니다. 알록달록 화려한 색채의 그림 속에서 무채색이 가득한 명화 한 편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바로 러시아의 풍경화가 알렉세이 사브라소프(1805~1897)의 <이른 봄, 해빙>입니다. 그림의 첫인상은 메마르고 스산하다는 느낌이었습니다. ‘대체 어디서 봄을 느낄 수 있는 걸까?’ 달력상으로는 봄이지만 아직 봄기운이 나지 않는 요즘 상황처럼 느껴져서 그림을 더 자세히 보았습니다. 우선 제목에서 말해 주듯이 얼었던 강물이 녹으면서 물이 차오르고 있습니다. 강 옆에 난 길에는 눈밭이 녹으며 노란색 축축한 땅 색이 조금씩 드러나는 것이 보입니다. 그리고 저 멀리 새가 날아들고 있습니다. 봄이 막 도착했음을 알리는 전령처럼 말이죠.
여전히 그림 속에서 봄의 기운이 보이지 않으시다면 그의 다른 작품인 <겨울>과 비교해 보세요. 눈 속에 집은 파묻혀 있고 눈의 무게에 나뭇가지는 아래로 축 처져 있습니다. 나무의 아랫부분이 눈에 깊게 잠겨 있고 땅의 누런빛이 보이지 않습니다. 새들도 모습을 보이지 않고 둥지의 흔적도 찾을 수가 없는 것으로 보아 아직 깊은 겨울 속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알렉세이 사브라소프는 겨울에서 봄으로 변하는 자연의 풍경을 표현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까마귀가 돌아왔다>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까마귀가 색이 검다는 이유로 불길한 징조로 인식되기도 하지만 서양에서는 지혜의 상징으로 여깁니다. 그림 속에서는 까마귀 떼가 나무에 날아들어 둥지를 틀고 있습니다. 땅 위에 있는 새 한 마리는 입에 나뭇가지를 물고 둥지 짓기를 거들고 있습니다. 나무 옆 호수에는 얼음이 모두 녹았고 지붕 역시 따뜻한 햇살을 받아 제 색을 보이고 있습니다. 아직 녹지 않은 눈밭 위에서는 선명한 나무의 그림자로 햇살의 따스함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봄날>이라는 그림 속에는 강물의 얼음이 모두 녹아 물이 되어 흐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남은 눈까지 모두 녹고 나면 들판에는 파란 풀들이 올라올 것입니다. 나무에 둥지를 튼 새들은 새로운 곳에서 삶을 시작할 것입니다. 봄의 변화가 보이시나요? 박노해 시인은 ‘봄은 보는 계절’이라고 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보는 계절, 마음의 눈을 뜨고 미리 보는 계절’이라고 말입니다. 아름답게 피어난 꽃과 초록색 들판의 풍경 속에서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시인의 말처럼 ‘언 대지 속에는 엄청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전 세계는 아직도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코로나라는 한파 속 있습니다. 이 매서운 겨울바람이 언제 지나갈지, 어떤 흔적을 남길지 누구도 쉽게 단언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겨울이 끝나가고 봄이 온다는 희망이 우리를 계속 버티게 해주고 있습니다. 겨울을 버틸 수 있는 것은 봄이 온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일 것이며 봄이 소중한 것은 겨울의 혹독함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겨울이 끝나고 나면 우리 마음에 무엇을 남길까요? 우리가 두려움과 공포에 대항하여 사투하는 동안 우리의 내면에서도 ‘엄청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혹독한 시기를 잘 이겨 낸 후 우리에게는 많은 변화가 있을 것입니다. 긴 어둠의 시간 속에서도 우리는 계속 성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날, 봄이 도착을 선언하는 파란 싹이 피어날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봄날을 기다려 봅니다.
어서 오라, 봄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