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에게 보내는 네번째 편지
사람이 살면서 누구나 예외없이 힘든 시기가 있는 법이라지만 우리 딸이 이렇게 힘들었는지는 아빠가 잘 몰랐네. 항상 전화하면 밝은 목소리로 "밥 먹었지! 괜찮아! 안 힘들어"라고 이야기하는 딸이어서 더 몰랐던 것 같아. 생각해보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서울이라는 허허벌판, 이역만리에 가서 기숙사 생활부터 화곡동 5평짜리 원룸에서 자취까지. 서울살이 10년! 이 편지를 쓰는 이 순간 눈물이 날려고 한다.
딸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마음이 여리고 고운 딸이 대학을 갔지만 부모로서 해 줄 수 있는 것도 없었다. 좁디좁은 딸의 원룸에 어쩌다 한번 가서 새우잠을 자고 고기 한번 구워먹고 내려오는 게 부모로서 해 준 게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딸한테 더 미안하고 마음이 아파. 돌이켜보니 그 때가 생각이나네. 몇 년 전, 딸이 뮤지컬 예약을 해 놓았다면서 서울을 다녀가라고 해서 갔었지. 그 때 본 뮤지컬이 ‘빨래’였는데 마지막 엔딩곡 제목이 <서울살이 몇 핸가요?>였다. 뮤지컬의 내용이 바로 우리 딸의 서울살이 10년과 너무 닮아 우리 딸의 힘든 생활을 그대로 반영해 놓은 것 같아 보는 내내 눈물이 나서 훌쩍 훌쩍 울었던 기억이 난다. 대학을 졸업하고 인턴, 중앙일보사, SBS, JTBC 등에서 일하면서 딸의 힘든 생활이 너무 절절하게 마음속에 사무치는 거야.
지난 편지에 딸이 물었지.
아빠의 시간 속에서 어떻게든 견뎌내야만 했던 순간들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들려줄 수 있을까?
아빠라고 왜 힘든 시기가 없었겠어. 기억하겠지만, 우리 딸이 다니는 초등학교에 아빠가 선생님으로 갔었잖아. 매일 넘쳐나는 업무에 야근을 해야했는데 퇴근하는 밤 10시까지도 딸은 항상 교무실 한 쪽에서 아빠를 기다리면서 있었지. 아빠가 만든 보고서를 모아서 스테이플러로 꼭 꼭 찝어주던 딸의 모습이 눈 앞에 선하게 그려져. 그때가 벌써 20년 전이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 외에도 업무가 많아 야근도 많아졌던 것 같아. 교무실에서 아빠는 어떤 일을 하든 그냥 대충하는 법이 없었거든. 그러니까 일을 잘한다는 칭찬을 받고 또 거기에 일이 더해지고 하다보니 일은 점점 더 많이 맡아서 하게 되었어.
그 시간들 속에서 아빠가 생각나는 일들을 몇 가지 이야기해줄게.
첫째는 교사로 근무할 때인데 연구학교 운영이라는 것이 있어. 어떤 주제를 선정해서 2년간 운영하고 결과보고회를 하는 것인데 누군가 그 학교에서 연구주무를 맡아서 해야 했거든. 이 업무가 아빠를 늘 따라다녔어. 연구학교 운영 주무는 보통의 경우는 4년 정도 맡아서 하는데 아빠는 무려 5회에 걸쳐 10년간이나 했으니 말이다. 선생님들끼리 아빠보고 한강 이남에서는 가장 많이 했다고 농담을 하기도 했지. 누군가가 해야할 일이면 내가 해야지! 라고 생각하면서 일을 했었는데 이제와서 생각해 보니 내가 그렇게 오랫동안 어떻게 그 일을 해 냈는지 스스로가 대단하다고 느껴질 정도야.
두번째는 경북교육청에서 근무할 때의 일이야. 장학사로 첫 출발을 하게되어 교육청 근처에 5평짜리 원룸을 얻어 자취를 했는데 매우 열악한 환경이었어. 퇴근을 하고 오면 문을 여는 순간 ‘바퀴벌레’가 여기 저기 날아다니고, 바닥에는 기어다니는 모습이 다반사였어. 바퀴벌레 퇴치를 위해 엄청 노력을 했는데 그놈의 바퀴벌레 번식력에 내가 항복을 했지. 그냥 사람들이 바퀴벌레랑 함께 지내라고 했어. 가족과 떨어져 혼자서 생활하는 자체도 힘든데 이런 바퀴벌레가 못살게 하니 정말 힘들더라. 이렇게 객지 생활 8년을 한 거야.
셋째는 교육지원과장으로 근무할 때의 일이야.
집에서는 2시간이나 소요되는 먼 교육청에 교육지원과장으로 발령이 났어. 발령이 난 기쁨도 잠시일 뿐, 타지에서의 홀로서기는 또다시 시작되었어. 학교와 달리 교육지원청은 학교를 지원하는 곳인데 규모가 큰 교육청이라 업무가 참 많았어. 당시에는 휴대폰 일정 관리가 익숙하지 않고 업무가 많다보니 다이어리를 쓸 수 밖에 없었지. 당시 다이어리를 지금도 보관하고 있는데 그것을 보니 정말 놀랍더라. 내가 어찌 그리 일을 했는지 모르겠어. 하루 하루 일정을 빼곡 빼곡 적어놓은 다이어리를 지금 보고 나도 놀랐어. 어떻게 이 많은 일을 해 냈을까. 한편으론 꼭 일을 이렇게까지 했어야 했을까 생각도 드네. 그냥 융통성을 발휘해서 적당히 하면 됐을텐데 하는 생각도 들긴 해. 하지만 아빠의 성향인 것 같아. (딸과도 비슷하지?)
아빠는 어떤 일을 하든 ‘열정’이 넘쳤다는 생각이 들어.
무슨 일을 하든 대충하는 법이 없었거든. 그래서 더 힘들고 더 피곤했을 거야.
우리 딸아!
아빠의 교직생활에서 힘든 단면을 두어 가지 적어봤는데 아빠의 힘들었던 시기와 딸의 서울살이 10년이 데칼코마니 같이 닮았네. 또 세월은 그렇게 흘러 지금의 딸과 지금의 아빠를 있게 한 거라 생각해. 우리 딸하고 아빠는 둘 다 험난한 세상을 헤쳐나온 성공한 부녀지간! 어쩌면 아빠보다 더 힘들고 어려운 과정을 잘 이겨낸 우리 딸이 더 대단하게 느껴져. 앞으로도 아빠와 딸 앞에 어떤 일들이 있을지 아무도 알지 못하지만 무슨 일이든 하나씩 하나씩 차근차근 해낸다면 못 할 건 없다고 생각한다. 지난 시간처럼 그냥 "괜찮아"라는 말로 애써 엄마, 아빠를 안심시키지만 말고, 힘든 건 힘들다고 말해주는 딸이 되었으면 좋겠어.
아빠의 마음은 하나야.우리 딸이 너무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
그러니까 딸아. 앞으로도 하고 싶은 일 마음껏 하면서 행복하게 시간들을 함께하자.
사랑한다. 우리 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