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나를 잊었겠지만, 혹시라도 그때의 나를 기억하나요?
나예요.
모든 기억을 잊어버렸다 해도, 가슴속에 남아 있는 그때의 기분 좋은 설렘이 잔향처럼 내 마음에 바람결을 따라 조금씩 조금씩 묻어 나와요.
분명 그리웠지만, 그 기분 좋은 느낌이 사치처럼 느껴질 때면 마음이 머무를 여유조차 주지 않고, 또다시 보내버려요.
아무리 보내도 처음 온 것처럼 다시 찾아오는 그 손님.
나는 늘 새롭게 만나는 듯, 바보처럼 반가워해요.
바로 헤어져야 할 스쳐 지나가는 그 느낌이어도 나는 또 그렇게 손 흔들며 잘 가라는 인사만 남긴 채로.
그렇게 웃음 짓는 내가 어리석어 보여 다시 갈 길을 가네요.
저 달빛 아래 얼굴을 숨겨요.
저 별빛 사이로 어렴풋이 보여요.
그 아름다운 표정들이 한 겹, 두 겹, 세 겹 보이다 모두 다 겹쳐져 저 멀리 사라져 버리네요.
낭만은 현실을 이기지 못하나 봐요.
아니, 아마 져주는 거겠지요.
사랑하니까 양보해 주는 거겠죠.
나를 향한 나의 낭만은, 나를 위해 나를 놓아주네요.
스쳐 지나간 낭만을 뒤로한 내 얼굴 위엔 잿빛이 고요히 내려앉네요.
그래도 살아가다 보면 또다시 처음 온 손님처럼 나를 찾아올 테니,
나는 또 한 번, 새롭게 맞이할 손님을 기다리며
이 현실을 슬기롭게 살아보려 노력해요.
이상이 아니죠.
꿈이지요. 꾸어도 되는 꿈. 이루어지지 않아도 되는 꿈. 꿈만으로도 만족하는 그런 꿈이지요.
나, 나, 나예요.
그게 바로 나예요.
매번 제자리 같지만, 늘 다른 자리에서 걸어가는, 늘 새로운 나예요.
과거는 뒤에 있고, 나는 늘 앞에서 걸어가지요.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뜨고, 오늘은 오늘의 해가 떴지요.
달빛이 내려앉기 전,
환한 미소로 아무 일도 없었던 듯 걸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