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 탈카에서 만난 히메나네 가족
주말에는 일을 안 해도 되기 때문에 이 농장에 오는 다른 봉사자들은 농장 하우스에서 쉬기도 하고, 근처 관광도 한다고 했다. 처음으로 맞는 주말, 히메나는 시내에 있는 집에서 홈파티를 연다고 우리를 초대해주었다. 탈카에서의 첫 파티는 히메나의 남편 리카르도의 퇴직 파티였다. 그는 지역의 한 대학교에서 기획실장으로 20년을 넘게 일했는데, 최근 총장이 바뀌면서 돌연 명예퇴직을 당했다고 했다. 그렇다고 화내거나 슬퍼하기는커녕 정들었던 동료 10명 정도와 그들의 가족들을 집으로 초대해 퇴직 파티를 연 것이었다. 사실 걱정할 것도 없는 게, 일종의 퇴직금이 1년간 매달 풀 월급으로 지급된단다. 그동안 좀 쉬며 다른 일을 알아볼 예정이라는데 워낙 발이 넓고 일을 벌이는 스타일이라 벌써 꽤 바빠보였다.
밤 9시쯤부터 시작된 파티는 간단한 핑거푸드 몇 가지와 와인으로 준비되어있었다. 나는 김밥을 선보였다. 마트에서 스시박스가 있어 샀는데, 별건 없고 쌀과 김이 들어있었다. 참치캔과 몇 가지 채소로 참치김밥을 만들었는데 여기 사람들은 그렇게 생긴 건 무조건 간장에 찍어먹는 줄 알고 김밥을 간장에 수영시켜 먹어서 날 놀라게 했다. 아무렴 어때. 그들의 입맛에 맞으면 그만이다. 내 김밥은 최고 인기 메뉴로 금세 동이 났다. 초대받은 직장 동료들의 애들까지 합세해 거실은 난장판 놀이터가 되었고 애들을 좋아하는 남편은 온갖 게임을 만들어내서 말도 잘 안 통하는 애들과 신나게 놀아주었다. 밤이 깊어지자 되자 피곤한 아이들은 엄마 아빠를 괴롭히지 않고 알아서 여기저기서 곯아떨어졌다. 나와 남편은 버티다 새벽 2시가 돼서 잠들었는데 파티는 새벽 4시까지 계속되었다고 했다.
20대의 나는 춤과 파티를 참 좋아하는 철부지였다. 남편도 놀다가 만났다. 경성대의 한 펍에서 열린 할로윈 파티에서 술 마시며 춤추다가 뿅. 그렇게 만난 남자와 2년 반 동안의 장기간 연애 끝에(나의 평균 연애기간은 6개월이었다) 27살의 나이로 결혼하기 전까지는 그렇게 주말이면 술, 살사댄스와 남자를 즐겼었다. 아이를 낳게 되면 결혼 후에도 이따금씩 함께 즐겼던 파티 라이프를 포기해야 하는 것 또한 임신을 향한 나의 두려움의 주요 원인이었다.
히메나, 리카르도, 아윤과 블라스는 우리가 마음에 들었는지 팜스테이를 하는 4주 동안 매 주말마다 우리를 각종 파티에 데리고 다녔다. 두 번째 주말은 리카르도의 조카 중 하나의 첫 커뮤니언(가톨릭 종교 행사 중 하나)을 축하하기 위한 파티였다. 어쨌거나 또 모여서 파티할 구실이 생긴 것이다. 이렇게 주말이면 가족이나 친구들과 홈파티가 끊이질 않았다. 가톨릭 문화권이라 한 가족당 아이가 적어도 2명, 많으면 4명까지 있어 홈파티가 열릴 때마다 아이들이 북적북적했다.
남미의 홈파티 문화는 미국에서 유학하면서 이미 겪어 본 바가 있었다. 우연히 살사를 배우게 되면서 여러 국적의 중남미 친구들을 사귀게 되었는데, 하루는 생일파티로 친구 집에 초대받아 갔다. 미국 친구들은 대부분 술로 끝장을 보는 턱에 파티 끝자락에는 누군가는 술이 떡이 되어서 말썽을 일으키기 십상인데(나도 몇 번 진상의 주인공이 되었다), 중남미 친구들은 달랐다. 술은 음식의 맛을 돋워 주는 음료수일 뿐 아무도 폭음을 하지 않았고 살사 음악에 몸을 흔들며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보낼 뿐이었다. 파티 끝자락에도 모두가 제정신으로 헤어졌다. 그때의 경험이 남미로 여행을 가고 싶게 만들었는데, 수년이 지나 마침내 오게 된 이 곳에서의 첫 홈파티는 남미를 향한 나의 첫인상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아이가 있는 부부들도 아무런 걱정 없이 파티하는 모습은 더욱 인상적이었다. 아이가 있으면 애들 잠자는 시간에 맞춰 통금시간이 정해지고, 잠이 와서 칭얼대는 아이 때문에 파티를 즐기지 못하는 게 당연한 거라 생각했었는데, 여기서도 애들은 짐이 아니었다. 파티에 와서 부모님들끼리의 시간을 즐기는 동안 알아서 놀고 알아서 자는 이 아이들은 분명 이 문화에 익숙해 보였다.
세 번째 주말에는 리카르도의 어머니 댁에 놀러 갔다. 세월의 떼가 멋스럽게 묻어나는 시골집에서 할머니의 음식과 와인으로 토요일 점심을 맞이하다니. 내 고향 부산에서도 못 해 본 지 오래된 진국의 경험이었다. 그러고는 리카르도의 ‘가족 산’으로 놀러 갔다. 리카르도의 아버지께서 산에 땅이 있는데 돌아가시면서 유산으로 자식들에게 그 땅이 물렸다. 형제들 몇몇은 그곳에 집을 짓고 살게 되어서 세 가정을 나란히 방문할 수 있었다. 어딜 가나 아이들로 북적였는데 남편은 가는 곳마다 아이들과 즐겁게 놀아주었다.
어느덧 해가 지고 또 파티가 시작되었다. 칠레에는 바비큐 그릴이 없는 집이 없었다. 우리나라의 전기압력밥솥과 같은 존재라고나 할까. 살사와 메렝게 리듬에 맞춰 아이들도 어른들도 흥겹게 춤을 췄다. 나도 그 집주인 이모님과 신나게 춤을 췄다. 캠프 파이어까지 만들어서 새벽 2시까지 놀다가 머리 닿이는 곳에서 잠이 들었다. 파티하는 내내 아이들이 칭얼대거나 파티 분위기를 망치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파티의 따뜻함을 더해주었다.
히메나와 리카르도의 두 아들 아윤과 블라스는 정말 다르게 생겼다. ‘둘이 정말 안 닮았네~’라고 말하는 것도 실례가 될까 싶어 조심스러웠는데 아니나 다를까 사실 아윤은 히메나의 전남편 슬하의 아이였다. 그 사실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애들도 이미 다 알고 있어서 전 남편이 아윤에게 선물을 보낼 때면 블라스는 불평을 했다. “왜 형만 아빠가 둘이야?”. 히메나와 리카르도 부부의 러브스토리는 국제결혼을 한 우리가 들어도 헉헉 소리가 나는 파란만장한 드라마였다. 우리 부부는 싸울 때면 세상 어느 부부도 가지지 않은 큰 문제가 있는 것처럼 심각하고 치열하게 싸우는데, 이렇게 지구 반대편에 사는 부부가 더 어마어마한 난관도 잘 해결하고 잘 살고 있는 걸 보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렇게도 저렇게도 사는 거지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정답은 없구나’. 특히 리카르도는 무슨 이유에선지 내 남편에게 시시콜콜한 비밀 이야기를 늘어놓는 걸 좋아했는데, 내 기준에도 보수적인 남편이 늘 깜짝깜짝 놀랄만한 그들 부부의 드라마는 경직된 우리의 부부관과 행복한 삶의 기준을 조금은 느슨하게 만들어주었다.
히메나가 블랙베리 심기 준비에 한창 바빴던 마지막 주말, 우리는 히메나의 집에서 오붓하게 마지막 파티를 했다. 히메나가 농장에서 일하느라 바쁜 동안 리카르도는 치킨구이를 하고 나는 밥과 샐러드를 준비해서 와인과 곁들일 멋진 저녁 한 상을 차렸다. 밥때가 다 되어 집으로 돌아온 히메나는 바쁜 와중에도 농장에서 직접 수확한 블루베리로 맛있는 블루베리 파이를 뚝딱 만들어냈다. 식사 후에는 뒷마당에서 두 아들과 리카르도, 남편 4명이서 신나게 공놀이를 했다. 반려견 코코와 루시도 신나서 덩달아 뛰어놀았다.
이렇게 심플하고 평화로운 오후가 일상인 이들의 모습을 보고 내 마음에도 조금의 여유가 생겼다. 가족과 여유를 즐기는 것이 어려울 필요가 없었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것도, 여행을 와서야 느낄 수 있는 특별한 것도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