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이나 방학이 되면 아이는 종종 안방으로 건너와 침대에서 뒹굴거린다. "다 큰 녀석이 네 침대 두고 왜 안방 와서 이래." 혼자 있고 싶다는 말을 에둘러 표현해 보지만 "엄마 아빠 침대가 더 좋아."라며 결국 곁에서 금세 낮잠에 빠지고 만다. 이렇게 말할 때마다 뭐 얼마나 차이가 난다고 제 침대 두고 여기 와서 이러나 생각했다.
그러다 어느 평일 오전, 아이는 학교에 가고 아이 침대보를 교체하러 2층 침대로 올라갔다. 특별할 것도 없이 여느 때와 같이 정리하고 내려오려다 처음으로 아이 침대에 누워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좀 전에 이불을 곱게 펼칠 때만 해도 저녁 늦게 학교에서 돌아와 보송한 이불 위에 누울 아이를 떠올렸는데, 그 자리에 내가 누웠다.
'아, 아이가 보는 천장은 이렇구나.'
'아, 이 높이에서 누우면 이런 기분이구나.'
'아, 이쪽으로 몸을 돌리면 이런 각도로 보이는구나.'
'아, 이제 몸집이 커져서 답답할 수 있겠구나.'
'아, 안방 매트리스와 많이 다른 느낌이긴 하구나.'
아이의 침대에 누워보는 사소한 행동 하나로 아이가 안방 침대에서 주말 낮잠을 즐기는 이유를 얼핏 알게 되었고, 생각이 이어져 타인에 대한 이해로까지 뻗어갔다.
흔히들 각 사람의 히스토리가 그 사람의 반응으로 이어진다고들 한다. 수백만 수천만 가지의 히스토리가 쌓여 쌍둥이라도 같을 수가 없는데, 그 누군들 타인을 이해할 수 있을까. 거창하게 히스토리까지 떠올리지 않더라도 오늘 아침 어떤 침대에서 일어났는지조차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고도 당연하다. 이 생각에 이르니 관계에 대한 부담이 조금은 가벼워진다. 타인을 이해하려는 어느 정도의 노력은 필요하지만, 처음부터 가능하지 않은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말이다. 그럼에도 사람이 혼자 무인도에서 지내지 않는 한 죽을 때까지 고민하고 풀고 싶어하는 것이 사람 사이의 일이라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아이의 침대에 누워본 그날 이후, 누군가가 이해되지 않을 때 이 문장을 곧잘 떠올린다. 심지어 같은 침대에 누운 남편이라도 그쪽 편에 누워보지 않았으니 남편도 예외는 아니다.
"나는 당신의 침대에 누워보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