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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툇마루 Jul 25. 2024

나는 당신의 침대에 누워보지 않았다

주말이나 방학이 되면 아이는 종종 안방으로 건너와 침대에서 뒹굴거린다. "다 큰 녀석이 네 침대 두고 왜 안방 와서 이래." 혼자 있고 싶다는 말을 에둘러 표현해 보지만 "엄마 아빠 침대가 더 좋아."라며 결국 곁에서 금세 낮잠에 빠지고 만다. 이렇게 말할 때마다 뭐 얼마나 차이가 난다고 제 침대 두고 여기 와서 이러나 생각했다.


그러다 어느 평일 오전, 아이는 학교에 가고 아이 침대보를 교체하러 2층 침대로 올라갔다. 특별할 것도 없이 여느 때와 같이 정리하고 내려오려다 처음으로 아이 침대에 누워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좀 전에 이불을 곱게 펼칠 때만 해도 저녁 늦게 학교에서 돌아와 보송한 이불 위에 누울 아이를 떠올렸는데, 그 자리에 내가 누웠다. 

'아, 아이가 보는 천장은 이렇구나.'

'아, 이 높이에서 누우면 이런 기분이구나.'

'아, 이쪽으로 몸을 돌리면 이런 각도로 보이는구나.'

'아, 이제 몸집이 커져서 답답할 수 있겠구나.'

'아, 안방 매트리스와 많이 다른 느낌이긴 하구나.'


아이의 침대에 누워보는 사소한 행동 하나로 아이가 안방 침대에서 주말 낮잠을 즐기는 이유를 얼핏 알게 되었고, 생각이 이어져 타인에 대한 이해로까지 뻗어갔다.

흔히들 각 사람의 히스토리가 그 사람의 반응으로 이어진다고들 한다. 수백만 수천만 가지의 히스토리가 쌓여 쌍둥이라도 같을 수가 없는데, 그 누군들 타인을 이해할 수 있을까. 거창하게 히스토리까지 떠올리지 않더라도 오늘 아침 어떤 침대에서 일어났는지조차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고도 당연하다. 이 생각에 이르니 관계에 대한 부담이 조금은 가벼워진다. 타인을 이해하려는 어느 정도의 노력은 필요하지만, 처음부터 가능하지 않은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말이다. 그럼에도 사람이 혼자 무인도에서 지내지 않는 죽을 때까지 고민하고 풀고 싶어하는 것이 사람 사이의 일이라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아이의 침대에 누워본 그날 이후, 누군가가 이해되지 않을 때 이 문장을 곧잘 떠올린다. 심지어 같은 침대에 누운 남편이라도 그쪽 편에 누워보지 않았으니 남편도 예외는 아니다.


"나는 당신의 침대에 누워보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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