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렸을 때 아빠는 늘 이 비율로 다방커피를 타서 드시곤 하셨다. 가끔 어른들이 우리 집에 모여 식사를 하실 때면 식후에는 늘 커피 한 잔을 드셨다. 마치 커피로 입가심을 하듯이 따뜻한 커피 한잔을 드시는 모습을 보면서 8살 정도밖에 안 된 나는 늘 그 커피의 맛이 궁금했다. 엄마에게 "한 모금만 한 모금만"하며 조르면 엄마는 마지못해서 어린 나에게 한 모금 정도의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기회를 주시곤 하셨다.
처음 커피를 마시게 된 날. 약간 씁쓸하면서도 뒤끝은 달달하고 부드러운 이 느낌은?
내 8년 인생에서는 느껴 보지 못한 천상의 맛이었다. 그날 이후로 장사를 하시는 부모님의 심부름과 집안일을 도우면서 나는 하루에 10원씩 모아서 약 열흘간 100원을 만들기 위해 열심히 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드디어 100원이 다 모인 날. 나는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한 손에 10원짜리 동전 열개를 꼭 쥐고는 우리 동네 설렁탕 가게 앞에 놓인 커피 자판기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10원짜리 동전을 하나하나 넣으면서 가슴이 두근두근 설레고 드디어 조금만 더 있으면 어른들이 마시는 커피 한 잔을 내가 혼자서 다 마실수 있다는 설렘에 나는 들뜬 가슴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엄마 모르게 나는 완전 범죄를 꿈꾸었다. 드디어 90원. 마지막 남은 10원짜리 동전을 다 넣었을 때 나는 밀크커피 버튼을 꾹 눌렀다.
옛날 자판기(사진 출처:네이버 sunnya 16님 블로그)
하지만 그날 난 커피를 단 한 모금도 마실 수가 없었다.
자판기 커피 기계에 종이컵이 똑 떨어졌는지 내가 누른 밀크커피가 종이컵이 안 내려온지도 모르고 주르륵주르륵 밑으로 다 흘러 버렸다. 어린 마음에 저 커피가 차갑기라도 하면 내 손으로 받아서라도 먹고 싶었지만 김이 모락모락 날 정도로 뜨거웠기에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자판기 기계를 부츠를 신은 발로 뻥 차 버리는 방법밖에 없었다.
내가 대학생 때 커피 자판기에서 똑같은 상황이 발생했을 때에도 나는 어린 시절의 억울함이 그때까지 남아 있었는지 종이컵이 다 떨어졌는지 안 나왔다며 자판기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 말씀을 드려 종이컵에 담긴 온전한 커피 한 잔을 마실 수 있었다.
대학을 졸업한 후 나는 학원 강사가 되었고 습관적으로 하루에 믹스커피를 3잔은 마셨던 것 같다. 아침에는 잠을 깨려고 한 잔. 점심에는 식후 커피가 당겨서 한 잔. 저녁에는 끝까지 집중을 해서 아이들을 가르쳐야 했기에 한 잔. 커피는 강사인 나에게는 마치 그림자처럼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였다. 피곤하면 할수록 내 몸은 카페인을 쭉쭉 흡수해갔고 처음에는 1잔에서 시작했던 커피가 시험기간에는 최대 6잔까지 마실 정도로 내 몸을 잠식해 갔다.
그러다가 한국에서 이름도 생소한 아메리카노와 라테 붐이 일기 시작했고 출산을 하고 육아를 하면서 나는 늘 잠이 부족했기에 하루의 시작을 커피로 하곤 했었다.
집에서는 맥* 믹스커피, 나가서는 아이스 라테를 즐겨 마셨다. 더운 여름에 투명한 테이크 아웃 커피 잔에 담겨있는 아이스 라테를 보면 마시기 전부터 쌓여있던 육아 피로와 스트레스가 금세 날아갔고 고 카페인 급속 충전으로 인해 나는 정신이 맑아져서 개구쟁이 아이들을 온종일 봐도 체력이 끄떡없었다. 이처럼 커피는 내 소울 메이트이자 영혼의 음식이었다. 다른 건 잘 사지 않는 나지만 카페에서의 커피 한 잔은 절대 포기할 수가 없었다.
테이크 아웃해서 커피를 사 먹은 날은 집에 용기를 가져와서 '그래도 깨끗이 씻었으니 재활용이 잘 되겠지?' 하면서 열심히 분리배출을 했었다. 재활용을 하는 날이 되면 나를 포함한 우리 아파트 주민들이 배출한 테이크 아웃 커피 잔은 플라스틱 재활용 함에 차고 넘쳤다.
길가에 넘쳐나는 일회용 컵들.(사진 출처: 대구일보)
그러다가 제로 웨이스트를 추구하게 되면서 투명한 커피 컵이 전혀 재활용이 안된다는 사실을 알고는 매우 놀랐다. 그렇게 씻어서 열심히 분리배출을 했었는데...
생수 페트병처럼 투명하니까 테이크 아웃 커피 컵도 당연히 재활용이 잘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일회용 커피 컵은 만드는 회사마다 소재가 PET(폴리에틸렌테레프탈레이트), PS(폴리스티렌), PP(폴리프로필렌) 등으로 매우 다양했다. PET재질이 일회용 컵의 90%를 차지하고 PS 재질은 8%, PP 재질은 2%를 차지한다고 한다.
하지만 재활용 선별장에서 근무하시는 분들이 빠르게 돌아가는 컨베이어 벨트에 있는 커피 컵들의 재질을 일일이 다 파악할 수가 없기에 결국은 다 재활용이 되지 못하고 다시 쓰레기로 버려진다고 한다.
그리고 생수병들은 회사의 상표가 비닐 띠지 위에 인쇄되어 있어서 이 비닐 띠지만 벗기면 투명한 재질이어서 재활용이 되는데 반해 커피 컵은 해당 커피숍의 상표와 브랜드명이 컵에 인쇄되어 있어서 재활용을 하려고 녹였을 때 색이 들어가 있어 재생원료의 품질이 떨어지게 되어 결국은 일반 쓰레기처럼 소각된다고 한다.
한 건물에 커피숍이 한 개가 있을 정도로 '커피 천국'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가 배출해 온 플라스틱 커피 컵은 도대체 얼마나 많을까? 그 많던 커피 컵은 지금쯤 어디로 갔을까? 사실 나는 내가 버린 커피 컵이 재활용 과정을 거쳐서 다른 형태의 플라스틱 제품으로 만들어질 거라고 생각했었다.
다른 모습의 플라스틱으로 재탄생해서 어딘가에서 쓰임을 다 하고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이건 나만의 착각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스타벅스, 엔젤이너스, 파스쿠찌와 같은 대형 커피 판매점은 환경부와 '1회 용품 자발적 줄이기 협약'을 맺어서 매장에서 나오는 플라스틱 컵, 빨대, 뚜껑을 분류한 후 각자 계약한 재활용 업체에 보낸다고 한다. 매장에서 분리배출만 잘해주면 선별하는 수고가 줄게 되고
재활용업체에서는 플라스틱 컵을 잘게 부순 뒤 쌀알갱이 모양으로 만들어 플라스틱 성형 가공 업체에 보내면 여러 자재로 활용이 된다고 한다.
쌀알갱이 크기로 분쇄된 플라스틱 재활용 원료 (사진 출처: 경향신문)
하지만 현실적으로 쓰레기가 배출된다고 해서 내가 사랑하는 커피를 아예 끊기에는 노력을 해 봤는데 너무 힘들었다. 난감했다. 커피를 끊을 수도 없고 마실 수도 없고...
그러다가 커피 문제로 골치가 아팠던 나에게 친한 친구가 어느 날 집에서 내린 드립 커피를 유리병에 담아 선물해 주었다. 친구는 고맙게도 내가 드립 커피를 다 마셔갈 무렵에 또 드립 커피를 내려주곤 했었다. 나는 원래 아이스 라테를 즐겨 마시는데 친구가 내려준 드립 커피에 우유와 얼음을 타서 집에서 마시면 그 어느 카페의 아이스 라테보다도 맛있었다. 게다가 재사용이 가능한 유리병에 담겼으니 쓰레기도 배출하지 않아 나한테는 유레카!!! 였다.
친구가 내려 준 드립 커피를 다 마신 후에는 근처 카페에 가서 유리병에 담긴 드립 커피를 사 마시고 있다.
한동안 일회용 컵 쓰레기 문제를 고민하면서 나와 같은 개인들도 일회용 컵 사용을 줄이기 위해 물론 노력을 해야겠지만 우리 사회에서도 일회용 컵을 재활용할 수 있게 제도가 바뀌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예전에 2002년도에 도입되었다가 2008년에 폐지되었던 "일회용 컵 보증금 제도"가 2022년도에 다시 시행이 된다고 한다.
우리가 커피 전문점에서 사 마신 컵을 커피 매장에 가져다주면 소비자는 조금 번거롭기는 해도 컵 보증금을 돌려받아 좋고 환경보호도 하고 커피 전문점에서는 판매된 커피 컵의 회수율이 증가해서 재활용 업체에 공급할 수 있는 재활용 컵이 많아지니 너무나 좋은 제도인 것 같다.
그리고 찾아보니 작년 부산 북구에서는 음료 테이크 아웃 컵 20개를 모아 깨끗이 씻어서 가져오면 종량제 봉투 10L 1개로 교환해 주는 캠페인을 벌였었다. 전국 각지에서 이러한 보상제도를 실시한다면 플라스틱 컵의 재활용률을 더 높일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많이 어렵겠지만 앞으로는 커피 컵도 재질을 한 가지로 단일화해서 재활용 선별장에서 선별하는 번거로움을 덜어줄 수 있는 방향으로 가면 좋겠다.
나도 요즘 집에서 커피가 마시고 싶을 때는 가끔 믹스커피를 마시곤 한다. 믹스커피 비닐을 하나씩 버릴 때마다 내가 또 환경을 오염시키는 것 같아 죄책감이 들지만 그렇기에 내가 줄일 수 있는 다른 쓰레기. 예를 들어 배달음식 대신 집밥을 해 먹으려고 노력하고 대형마트 대신 재래시장에서 포장 없이 장을 보려고 노력하는 등 조금이라도 내가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줄여보려고 노력을 하고 있다.
현실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테이크 아웃 컵 대신 텀블러에 음료를 사 마시는 것이 어렵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개인들이 지금보다는 쓰레기를 5%씩이라도 줄이려고 노력한다면 작지만 의미 있는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도 개개인들의 이러한 변화에 발맞추어 제도적으로나 법률적으로 반드시 변화가 되는 날이 올 것이다. 우리 오늘부터 작은 실천이라도 해 보는 건 어떨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