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아이는 없다.
유치원에서 아이가 흙놀이를 하고 선생님에게 인사를 하고 돌아가려다 책상 모서리에 부딪쳤다고 했다. 이마가 빨개져서 보건실에서 어름 찜질을 하고 집에 돌려보냈다고 했다. 다음 날 아침 엄마가 감정이 격한 목소리로 유치원에 전화를 했다고 한다. 아이가 다쳐서 보건실까지 갔다 왔는데 왜, 전화를 안 해 줬냐는 것이다. 학교 선생님은 상처가 난 것도 아니라 응급조치 후 귀가 한 것인데 항의 전화를 받았다고 아이를 잘 보라고 했다.
나는 특수 자원봉사로 장애 유아를 돌본다. 내가 맞게 된 아이는 ADHD라고 했다. 그 부모는 위에 누나가 학교에서 따돌림을 받은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쌍둥이 동생 중 남동생이 ADHD이고 여아보다 발달이 늦다는 이유로 문제가 생길 우려로 서울 기관에서까지 가서 장애 판정을 받았다고 했다. 학기가 시작되고 두 달 후에야 판정이 나서 나는 내가 보던 아이와 헤어지고 쌍둥이 남아 아이를 돌보게 되었다. 학교에서 잘 모르는 사람들은 정상아이와 같은 아이를 보며 기웃둥했다.
ADHD인 유아의 부모는 자원봉사자와 특수 선생님이 더 특별한 배려로 아이를 일대 일로 돌보는 것을 선택했다. 나는 그 아이를 자원봉사를 하면서 다른 아이에 비해 좀 빠르게 행동하는 것만 빼고 다른 유아와 다르지 않았다. 그 아이는 선생님이 바르게 앉은 친구를 뽑을 때마다 다른 친구들보다 빠른 선택을 받기 위해 허리를 얼마나 쭉 뻗는지 의자가 도망갈 정도다. 모든지 빨리 하려고 하고 사랑도 많이 받기 위해 규칙도 더 잘 따른다. 빠른 것 빼고는 무엇이 문제인지 나도 모르겠지만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라는 말이 생각나게 한다.
하지만 유치원 반 아이 중에서는 문제인 아이가 있다. 그래서 그 아이가 실내화를 숨기기도 하고 때리려고 했다는 이야기가 방과 후 시간에 있었다고 한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부모가 전화를 한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서로 부딪치며 스스로 자신을 보호하려는 힘을 키워야 한다. 언제까지 선생님이 부모가 아이를 보호할 수 있을까? 나부터 요즘 어른들이 자라라는 아이들을 약하게 만들고 있지는 아닌지 생각하게 되었다.
학기 초에 두 달 동안 유치원 자원봉사를 하면서 알게 된 선생님을 운동장에서 만났다.
"요즘 부모님은 학교에 아이를 맡기고 무척 바라는 것이 많다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나의 부정적인 말에도 선생님은 긍정적으로 말했다.
"요즘 아이들이 하나나 둘이다 보니 그러는 것 같아요?
역시 내가 좋아하는 선생님은 다르다.
나도 아이 둘을 학교에 보냈다. 아이를 학교에서 보내면서 나는 내 아이가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며 남을 배려하는 사람이 되길 바랐다. 하지만 지금은 아이가 친구와 놀면서 친구를 배려하기보다는 친구의 모자람을 선생님에게 말하기 바쁘다. 유치원 아이조차도 배려보다는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기 바쁜 시대가 되어버렸다.
아이들의 스승은 누구일까? 학교의 선생님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가정이라는 작은 사회에서 아이는 자란다. 부모가 아이의 첫 선생님이다. 요즘은 맞벌이 부모로 아침저녁으로 아이와 지내면서 어린이집이나 조부모의 사랑을 받고 큰다. 조부모님의 사랑뿐만 아니라 어린이의 집에서 또 집에서 아이들은 많은 사랑을 받고 큰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참 사랑이 옛날보다는 덜 하는 것이 아닐까?
"나쁜 개는 없다"라는 TV의 프로가 있었다. 개보다 더 귀한 아이를 부모가 관심 갖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아이가 사회에서 잘 자라 남을 도울 수 있는 훌륭한 사람으로 키우고 싶다면 부모먼저 남을 배려해야 한다. 그런 부모를 보고 배워서 아이도 친구에게 사회에 베풀지 않을까 생각된다. 감싸주는 것보다 어떻게 해야 아이를 위하는 것인지 생각하게 했다. 그래서 작은 사회를 만드는 부모부터 선생님, 리더가 더 좋은 사회를 만든다면 얼마나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