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학부모에서 어쩌다 주민으로
등 떠밀려 학부모회장을 시작할 때는 1년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1년만 참고하자고.
그런데 할 사람이 없다는 호소에 1년을 또 하게 되고 결국 아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학부모회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런 학부모들이 생각보다 꽤 있습니다. 자기 의지로 그렇게 하기도 하지만 의지와 무관하게 숙명처럼 하게 된 경우도 있습니다.
학부모회를 10년 넘게 한, 말 그대로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 학부모회장들은 학부모회를 완전히 떠나게 된다는 사실이 시원하면서도 섭섭합니다. 새로운 학부모회 임원들이 잘 해낼 수 있을까 노파심도 듭니다.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학부모회 일은 새로운 사람들의 몫입니다.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똑같은 시행착오를 반복하면서 경험을 쌓고 조금씩 앞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새로운 학부모회 임원들은 떠나는 사람들이 들려주는 경험담이 무슨 소리인지 이해 못 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스스로 경험해야 비로소 이해되는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내 앞날을 생각하면 됩니다. 휴식을 계획하거나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자. 학부모회에서 축적한 경험을 살릴 수 있는 방법도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학교 교육에 대한 이해도가 높을 뿐만 아니라 지자체와의 연계 협력 및 현안 해결에 대한 경험도 풍부한 활동가들을 그냥 방치하는 건 사회적으로 손해입니다. 경험 많은 학부모 활동가야말로 마을과 학교가 학생의 성장과 배움을 위해 협력 활동을 하는 데 있어 가장 든든한 우군입니다. 전국적으로 붐을 일으켰던 마을교육공동체사업도 학부모 활동가들이라는 기반이 없었다면 활성화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학부모 활동가가 마을교육공동체 사업에 참여하는 과정을 통해 얻어지는 부수적인 효과도 있습니다. 학부모회를 졸업하고 지역주민으로서, 활동가로서 자기 역할을 찾으려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그들을 바라보는 학생, 학부모의 시선도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획일화된 진로와 삶의 시선에서 벗어나 공동체와 지역사회에서의 삶을 윤택하게 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삶의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습니다.
지역과 마을의 공동체 리더가 된다는 건
마을교육공동체가 붐을 이루고 지자체와 교육청이 나서서 활성화 사업을 진행함에 따라 이러한 사업에 참여하려는 학부모들도 늘어났습니다. 특히 학부모회를 완전히 졸업한 경험 많고 능력 있는 활동가들에게는 매력적인 일입니다. 하지만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지역 주민 활동가로 삶을 시작한다는 것은 그동안의 학부모회 활동과는 전혀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기도 합니다.
일부 학부모들은 지역 의제나 교육현안을 중심으로 한 소규모 공동체를 직접 만들거나 네트워크 활동에 참여합니다. 학부모회에서 얻은 경험과 인연으로 지역의 각종 거버넌스 기관에 위원으로 위촉되기도 하고, 지방의회에서 정치인으로 새로운 출발을 하는 학부모도 있습니다. 물론 그런 자리는 소수이고 모두가 그런 삶을 원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자신에게 맞는 활동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다른 일부는 뜻있는 사람들을 규합해 사회적 협동조합, 사회적 기업을 설립하고 자자체의 지원을 적극 활용합니다. 또 지자체의 자원봉사형 시간강사 사업에 참여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학교 방과 후 수업이나 협력수업에 시간강사로 참여하여 자신의 재능을 기부하면 활동한 시간만큼 강사수당을 받는 것입니다.
활동가들이 참여할 공간의 확장이라는 측면에서 긍정적인 부분도 있지만 그에 못지않은 냉혹한 현실이 있습니다. 불안정한 일터와 소득, 불규칙한 활동은 건강하고 안정적인 삶을 방해하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활동의 지속성을 위한 경제적 자립은 영원한 숙제입니다. 학부모회는 학교 소속이므로 아무리 적은 액수라도 예산이 편성되고, 학부모 상주실 등 공간도 제공되지만 지역은 다릅니다. 모든 것을 스스로 마련해야 합니다.
활동 경험도 살리면서 경제적 문제도 단박에 해결할 수 있다면 가장 좋겠지만 그런 경우는 흔하지 않습니다. 학부모회 활동을 졸업하는 나이가 40대 후반에서 60대에 이르는 연령대이다 보니 재취업도 쉽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자자체나 지역사회는 자원봉사형 활동가를 원합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자원봉사 활동으로 학부모회를 운영해 왔는데 지역 활동의 대부분을 또다시 자원봉사로 채워야 한다는 것은 한 개인에게 가혹한 일입니다. 긍정적인 측면만 바라보고 학부모회 활동 경험을 지역사회로 환원하라고 등 떠밀 수는 없습니다.
더군다나 지역사회에서는 나의 활동을 알아주는 이가 학교 때보다 현저히 적어질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소명의식 없이는 활동하기 쉽지 않습니다. 물론 이것은 문제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10년 넘게 학부모회 활동을 한 것도 따지고 보면 숙명 같은 소명의식 때문이니까요. 우리 아이들을 위한 일을 한다는 보람으로 힘들지만 버틴 것이었으므로.
학부모회를 졸업하고 지역사회 활동가로 성장하는 학부모들에 대한 지원 로드맵이 구축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을 지자체나 교육청이 알아서 해줄 리 만무합니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듯 시행착오를 겪은 선배 활동가들이 먼저 다양한 성공, 실패 사례를 정리하여 후배 활동가들이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도록 알려주는 길잡이 역할을 하는 것이 현실적인 대책일 것입니다.
지역과 마을의 공동체를 위한 활동을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나의 활동이 시대정신에 부합하는지도 따져봐야 합니다. 더 나아가 그런 활동마저도 생각보다 빠르게 다음 세대에게 물려줘야 할 날이 올 것입니다. 물론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학부모회 경험을 기반으로 자신의 생각과 재능을 펼칠 수 있는 활동을 원한다면 기꺼이 지역과 마을의 공동체에 뛰어들어 보길 바랍니다.
"활동의 고통이 크면 안 해도 된다. 가만히 있는 고통이 더 큰 사람이 활동에 뛰어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