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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U Jan 09. 2021

[병원여정] 16. 세 번째 병원

 두 번째 병원에서의 마지막 하루도 지나고, 다시 집으로 가게 됐다. 나는 이제 목발을 짚지 않고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무릎의 상처도 조금씩 아물어가고 있었다. 이젠 더는 집에 있는 것이 무섭지 않았다. 아직 계단을 올라 내 방까지 올라가는 것은 힘들었지만, 한 칸씩 손잡이를 단단히 잡고 움직이면 가능했다. 석 달 반 만에 처음으로 본 내 방이 그렇게 아늑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부모님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두 번째 병원에서 다리가 눈에 띄게 좋아진 것을 보시고는 ‘역시 병원이 낫다’고 생각하신 것 같다. 그래서 난 집에 며칠 묵고는 또 바로 세 번째 병원으로 옮겨야 했다. 사실 나도 아무도 없는 집에 갇혀있기보다는 병원에서 혼자 지내는 게 더 좋았기에 군말 없이 따라갔다.


 세 번째 병원은 찾기가 힘들었다. 우선 부모님께서 자주 오실 수 있도록 집에서 가까워야 했고, 재활 전문 병원이면서 입원치료가 가능해야 했다. 그리고 기왕이면 무릎 재활 전문 분야면 더 좋았다. 인터넷으로 열심히 알아보다가 ‘무릎 재활’에 대한 정보가 대량으로 있는 한 카페 사이트를 알게 되었다. 그 카페 회원들은 전부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었다. 세상에 이렇게 다친 사람이 많다는 것에 놀랐다.


 그 사이트에서 추천을 받아 동네 근처의 나름 큰 병원을 알게 되었다. 카페를 통해 연락드렸다고 하니 병실도 더 좋은 곳으로 안내해주셨다. 병원 내부는 굉장히 호화로웠다. 나는 2인실을 사용했는데, 옆자리 언니가 자주 자리를 비우셔서 거의 혼자 병실을 사용했다.


 역시나 다음 날, 치료를 위해 치료실을 방문했다. 그 병원은 운동기구가 있는 치료실은 없고 도수치료나 침을 맞을 수 있도록 침대가 많은 치료실만 있었는데, 처음 도수치료를 받으러 간 순간 치료사 선생님을 보고 숨이 멎을 뻔했다.


 “어서 와요. 여기 누워보세요.”


 치료사 선생님들은 왜 다들 멋있는 걸까. 아이돌 가수를 방불케 하는 외모에 속으로 혀를 내두르며 침대에 누웠다. 오랜 병원 생활로 외로웠는지 잘생긴 사람만 보면 반응하는 나 자신이 한심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앞으로는 머리를 예쁘게 빗고 와야겠다’며 혼자 설레발을 치던 나였다.


 그 뒤 2주 동안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를 만큼 빠르게 치료가 이어졌다. 나는 이제 혼자서 병원 밖에 바람을 쐬러 나갈 수 있을 정도로 다리가 호전되었다. 치료실 선생님은 매일 내 다리 상태를 검사하며 특유의 톡 쏘는 말투로 말씀하셨다.


 “이거 봐. 또. 운동 안 했죠?”

 

 “아니, 그게 아니고…”


 “핑계 대지 마요. 다리 들어 올리는 거 몇 번 했어요.”


 “음, 30번…?”


 “30번? 300번이 아니고?”


 “...”


 “내일까지 300번 해 와요.”


 늘 혼나는 게 전부였지만.


 변명이지만 그때 내 관심사는 운동이 아니었다. 운동에 박차를 가해야 하는 시기였음에도 나는 창작 활동에 더 열을 올렸던 것이다. 매일 치료를 받고 오면 남는 시간에 글을 쓰고, 아이디어를 구상하고,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만들었다.


 태블릿 PC와 노트북, 수첩은 언제나 내 머리맡에 있었다. 나는 거의 10분에 한 번씩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러면 하던 일을 멈추고 바로 수첩에 아이디어를 토해냈다. 정신없이 손 가는 대로 뭔가를 끄적이고 나면 세상 제일가는 부자가 된 것처럼 뿌듯했다. 아이디어를 정리해서 노트북이나 태블릿PC에 구체적으로 기록했다. 좋은 멜로디가 떠오르면 핸드폰으로 녹음을 하고, 작곡 프로그램을 통해 더 풍성하게 만들었다. 드럼 비트와 베이스 기타 소리, 피아노와 바이올린 소리를 겹치고 쌓아서 원하는 음악을 만들어내는 그 과정이 언제나 벅차고 설렜다.


 불이 꺼진 밤에는 작은 스탠드를 하나 켜놓고 글을 썼다. 창 밖의 야경을 바라보며 음악을 듣기도 했다. 다리가 다 나으면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갈까 고민하기도 했다.


 영감이 가득한 날들을 보내던 중, 그날도 치료사 선생님의 잔소리를 멍하니 듣고 있는데 갑자기 좋은 음악이 내 귀에 스며들어왔다. 선생님이 치료실에 틀어 놓은 음악이었다. 나는 선생님의 말을 가로막고 눈을 번쩍 치켜뜨며 물었다.


 “쌤. 이거 노래 뭐예요?”


 “허.”


 선생님은 지금까지 내 말은 듣기나 한 거냐는 듯 한숨을 내쉬며 노래 제목을 알려줬다.


 “The next right thing. 겨울 왕국 2편에서 나온 노래예요.”


 병원에 있느라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영화를 못본 나는, 그 노래의 제목을 알고 나자 더욱 심장이 강하게 뛰는 것을 느꼈다. 노래가 너무 좋다며 호들갑을 떨자, 선생님은 의외의 말씀을 하셨다.


 “나도 저런 노래 만들고 싶다. 요즘 작곡 배우려고 하거든요.”


 공통의 관심사가 생긴 우리 둘은 그날부터 치료실에서 만나면 음악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서로 음악을 추천해주기도 하고, 맛있는 간식이 생기면 몰래 챙겨주기도 하면서. 짧은 기간이었지만 나는 이번에도 치료사 선생님 덕분에 입원 생활을 기분 좋게 할 수 있었다. 나는 참 운이 좋은 사람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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