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일찍 시집가지 말지!
남들은 대게 입에 잘 맞는다는 베트남 음식. 그조차 입에 맞지 않아 엄마는 베트남에 온 이후로 적잖게 고생했다. 베트남에서 엄마를 살린 건 ‘맥주’. 적당한 열량에 힘듦을 잊게 만드는 알코올까지. 조식 빼고 엄마는 식당에 가면 낮이고 저녁이고 맥주를 한 병 꼭 시켰다.
경숙 씨는 원래 맥주를 좋아했다. 아빠와 중매로 만난 첫 자리에서도 “맥주 한잔하러 가실래요?”라고 제안했다고 한다. 그런 당돌한 여자는 처음 봤다며, 30년 지난 지금까지 아빠가 말하는 걸 보면 맥주 사랑이 어제오늘 일은 아닌 것 같다. 한국에서도 여름밤이 되면 경숙 씨는 500mL짜리 캔 맥주 한 개와 ‘허니 버터 아몬드 작은 봉지’ 하나를 꺼낸다. 맥주 두 모금에 허니 버터 아몬드 한 알 오독오독 씹으며 텔레비전 드라마를 본다. ‘허니’라고 쓰여 있지만, 사실은 설탕 분말로 정교하게 코팅된 그 아몬드의 맛이란. 스무 알 남짓 되는 작은 봉지는 금세 동나고 만다. 안주가 더 필요하다는 핑계로 한 봉을 찬장에서 더 가져온다. 이번에는 안주가 남았다는 핑계로 캔 맥주를 하나 더 냉장고에서 꺼낸다. 건강검진 결과, 혈압도 높고 콜레스테롤도 높다. 1일 1캔은 그만둬야 한다는 소견이다. 그래도 6월 지나 7월 밤이 되면 경숙 씨는 어찌할 도리 없이 냉장고 깊은 곳에서 맥주를 한 캔 꺼낸다. 제 할 일 바빠 엄마와 술 한잔 마셔주지 않는 자식들, 일한다며 늦게 들어오는 남편. 경숙 씨는 혼자라 거실에 에어컨 틀기가 애매한 날씨가 되면 거실에 앉아 맥주 한 캔을 딴다.
반면 딸은 엄마를 닮지 못해 술에 취약하다. 알코올 분해 효소가 없는지 술 마시면 얼굴 넘어 눈알까지 불이 난다. 그래도 술 먹는 분위기는 좋다.
8월 대구 날씨보다 더 끓는 하노이 날씨. 낮에는 가이드 역에 충실해야 해서 엄마와 함께 맥주 딸 순 없었지만, 밤이 되면 맥주 한 잔을 같이 마셨다.
“하노이 맥주 거리란 데가 있대. 오늘은 여기 한번 가 보자.”
“맥-주-거-리? 당연하지! 당연하지!”
엄마가 간만에 몹시 적극적이다. 본디 술이라는 게 분위기가 8할 아니겠는가? 둘이 숙소에서 홀짝이는 맥주와 무려 ‘맥주 거리’에서 마시는 술맛은 비할 수가 없을 터.
해가 진 뒤 맥주 거리를 찾았다. 왕복 2차선 도로 너비의 골목. 그 길 양쪽으로 술집이 빼곡하다. 멀쩡한 가게 안 테이블도 보이지만, 대부분은 노상에 자리를 잡았다. 목욕탕 의자처럼 등받이도 없는 플라스틱 의자에 엉덩일 붙이고 앉아 의자보다는 약간 높은 테이블에 맥주잔을 두고 마신다. 그런 테이블이 한두 개가 아니다. 골목을 따라 최소 두 겹씩은 정사각형의 테이블이 깔렸다. 전혀 값져 보이지 않는 백열등이나마 열심히 밝혀둔 가게 사이를 걸었다. 제 가게로 오라는 호객행위가 이어졌다. 대충 걸린 메뉴판을 봤다. 안주도 비슷해 보이고 술은 다 똑같을 것이고. 비슷비슷해 보여 선뜻 끌리는 가게가 없다.
외국인 눈에는 다 똑같아 보인다지만 우리는 외국에서 한, 중, 일 사람을 대번에 구분할 수 있다. 먼발치에서 봐도 ‘한국인’임이 유력한 두 청년이 보였다. 가까이 가 보니 요즘 유행하는 투블럭컷으로 머리를 깎았고 티셔츠 목 부분에는 선글라스를 걸었다. 가슴팍에는 힙쌕까지 야무지게 맸다. 우리 또래 남자의 전형적인 해외여행 패션. 이 사람들 한국인이 맞다!
"한국인이세요?"
"네! 맞아요. 어떻게 아셨어요?"
"딱 한국인 같아 보여요! 이 가게는 안주 어때요?"
"괜찮네요. 저희도 처음 와보긴 했어요.“
엄마가 대번에 결정 내려버린다.
“그럼 그냥 이 집에 앉자!”
처음에는 떨어진 테이블에 자리 잡았다가 대화가 끊이질 않아 결국 테이블을 붙였다. 처음 만난 사람들과 마가린에 구운 새우, 조개, 오징어 따위를 곁들이며 두꺼운 생맥주잔을 부딪친다. 안주도 거슬리는 향신료 없어 완전 안심이다. 위생은 어찌 되었든 깔끔하게 ‘보이게’ 차려져 나오니 엄마도 별 불만이 없다. 테이블 한 귀퉁이에 쌓이는 500mL 잔 개수만큼 청년들과 이야기도 깊어졌다.
청년들은 어릴 때부터 친했던 동네 친구다. 덩치 작은 친구는 이번에 대기업에 취업했고 덩치 큰 친구는 훨씬 이전에 취업했었다. 그동안은 먼저 취업한 친구가 다른 친구에게 많이 베푼 모양이다. 이제는 돈도 잘 버는 이놈이 쏠 차례라며 덩치 큰 친구가 너털웃음을 흐뭇하게 짓는다. 둘은 다른 회사에 다니지만 같은 날짜로 휴가를 냈다. 처음으로 같이 해외여행을 왔다고 했다. 알고 보니 이 청년들 나와 동갑이다. 엄마로서는 아들뻘인 셈. 이런 상황, 나는 엄마가 아들 친구들에게 이야기하듯 약간은 거리를 둘 줄 알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 우리 엄마가 아닌 것 같다. 해외에서 처음 만난 친구들처럼 이야기가 흘러간다. 경숙 씨는 의외로 나이에 나보다도 편견이 없었다. 그저 이 ‘사람’에게 궁금한 것을 많이 물어봤다. 하노이에서는 어디가 좋았는지. 둘은 언제부터 친구였는지, 새로 취업한 그 회사 근무 강도는 어떤지. 우리는 어디를 갔는데 별로였다고 거긴 안 가는 게 낫겠다는 조언도 곁들였다.
대화를 물 흐르듯 주도하는 엄마가 신기했다. 엄마가 내 친구가 된 것 같았다. 여행지에서 이런 우연한 만남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지만, 이번에는 ‘엄마’랑 왔기에 우리 둘만 촘촘히 붙어 다닐 줄 알았다. 여행은 여행이라 하노이 맥주 거리 노상에서 뜻하지 않게 한국 사람을 만났다. 우리는 맥주잔을 기울이는 동안 친구가 되었다. 세 명은 동년배였지만 우리보다 서른 살 많은 경숙 씨도 여행 친구가 되는 데 예외가 없었다. 안주가 부족해 ‘모듬 버터(사실은 마가린)구이’를 한 팬 더 시키고 부지런히 젓가락질해대었다. 생맥주 여러 잔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자 하노이의 미친 더위도 조금씩 누그러들었다.
“내일 우리 하노이 인형극 보러 갈 건데, 같이 가실래요?”
덩치 큰 친구가 물어왔다.
“아 여기 인형극 한다는 말을 듣긴 했는데 표 사기가 번거로워 보여서 우리는 안 보려고 했죠.”
“그럼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저희도 내일 인형극 보러 갈 생각이었고 거기도 보러 갈 생각이 있었잖아요.”
“그런데요?”
“가위바위보를 해서 진 사람이 내일 아침에 가서 표를 사는 거예요.”
“몇 시에 가야 하는데요?”
“아침 9시까지는 그 앞에 가야 해요.”
마가린 새우구이와 생맥주로 이미 기분 좋은 엄마는 어찌 됐든 좋다는 입장.
그 친구와 내가 각 팀 대표로 가위바위보를 했다. 결과는? 우리가 이겨버렸다.
“내일 9시까지 우리는 극장 앞으로 가면 되죠? 돈은 미리 줄까요?”
“아녜요. 내일 와서 주세요.”
“그럼 그럴게요. 내일 봐요!”
여행의 즐거움은 이런 거지. 우연한 만남과 운 좋다면 친구로 이어질 가능성. 의외로 경숙 씨가 이런 문화를 너무나 잘 즐겨서 놀랐다. 우리 엄마에게도 이런 면이!
문득 숙소 침대에 누워 이런 생각을 해봤다.
경숙 씨는 스물여섯 살에 시집을 왔다. 대학 졸업하고 일 년 반 남짓 직장을 다니다 중매로 결혼한 뒤 일을 관뒀다. 삼십 년간 엄마로 살고 가게에 박혀 장사만 하다 보니, 본인은 이제 아무것도 모른다며 속상한 이야기만 늘어놓는다. 엄마가 결혼을 조금 늦게 했다면 어땠을까? 아니면 내가 그랬던 것처럼 스물여섯 살에 여행을 많이 할 수 있었다면? 경숙 씨도 ‘엄마’가 아닌 더 멋진 이경숙 씨로 남을 수 있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