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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안 XianAn 스님 Jan 22. 2024

출가의 길 그리고 지혜

출가 후 한국에 왔을 때 일입니다. 미국에서는 없었던 일이라 기억에 남았던 모양입니다. 나는 출가를 했지만 얼마 되지 않아서 크게 바뀐 것이 없는데 그냥 스님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람들이 저를 윗사람 대하듯 했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저에게 매우 공손하게 했습니다. 미국에서는 삭발을 하고, 승복을 입고 있어도, 대부분 사람들에게 그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한번은 엘에이에서도 큰 빌딩이 많은 쪽에 선 명상 수업을 하러 나간 적이 있습니다. 그때가 11월 이었는데 어떤 백인들이 와서 할로윈 의상이 진짜 괜찮다고 엄지척을 해줬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스님이어도 미국인들에게는 그냥 또 다른 사람일 뿐입니다. 그들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겁니다. 미국에서 출가하면 우리는 그런 환경에서 삽니다. 우리가 출가자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사람들은 우리의 행동과 말을 보고 평가합니다. 거기엔 좋은 점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출가자이기 때문에 우아한 척하거나 더 많이 아는 척 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겁니다. 의견이나 경험을 그들과 자유롭게 나눌 수 있고, 그들도 반대하는 의견이 있거나 맘에 안든다고 해서 숨기지 않습니다. 스님이 하는 말에 동의하지 않을 때, 입을 다물고 속으로 분개하는 대신 그냥 동의하지 않는다고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미국 위산사나 한국에 열린 위앙종 도량에서는 스님들과 재가인들이 다함께 수행합니다. 스님이라고 해서 특별대우는 없습니다. 재가인이 열심히 정진하면 스님들도 자극을 받아 더 열심히 해야하는 겁니다. 출가인은 하루 24시간, 1년 365일 재가인들의 눈과 귀에 노출되어 있어 숨을 곳이 없습니다. 추하고 못난 모습을 감출 곳이 없습니다. 영화 스님은 출가한 제자들을 그렇게 훈련합니다. 재가인들이 와서 잘못을 지적하거나 모욕하면 그걸 참고 견뎌야 합니다. 그게 수행입니다. 사실 이런 환경은 수행에 큰 도움이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아상이 몰래 숨어서 쉴 틈을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스승이 출가법을 바르게 잘 사용하면 그건 마치 깨달음으로 가는 가장 빠른 고속기차와 같은 겁니다. 물론 출가해야만 깨닫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경우에는 재가인으로 수행하는 게 낫습니다. 만일 반야지(般若智, Prajna Wisdom)를 얻고자 한다면, 거기 딱 한 가지 길만 있는 게 아닙니다. 아주 많은 길이 있습니다. 최소 팔만사천개의 법문이 있다고 합니다. 불교 역사에는 재가인이 깨달았다는 증거도 있습니다. 바로 방거사(龐居士) 이야기입니다. 그는 깨달은 수행자입니다. 깨달은 후 중국 전역을 다니면서 여러 사찰을 방문했습니다. 그리고 선 수행을 하고 있는 여러 선사들에게 강설을 해서, 스님들을 겁먹게 했습니다. 여러분이 현명한 스승만 찾을 수 있다면 출가자로 수행하는 게 훨씬 낫습니다. 왜냐하면 혼자 하는 것보다 깨달을 기회가 더 많기 때문입니다. 재가인의 라이프스타일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탐닉, 즐거움,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방향으로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출가자의 라이프스타일은 반야지혜를 열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아무튼 여러분도 깨닫길 원한다면 일단 결가부좌로 앉는 것부터 연습하십시오. 일단 결가부좌로 앉기 시작하면 점점 이해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결가부좌나 반가부좌로 앉지 않아도, 명상 없이도 깨달은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그렇게 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여러분이 이미 깨달았다면 반가부좌나 결가부좌를 분별할 필요가 없지만, 그렇지 않다면 차라리 분별하는 게 낫습니다. 부처님과 조사 스님은 우리가 더 빨리 깨달을 수 있도록 이런 훌륭한 수행법을 남겨줬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듣거나 읽기만 했다면 그걸 문자반야(文字般若, literary prajna)라고 합니다. 그건 마치 땅에 씨만 뿌려놓은 거나 마찬가지 입니다. 아직은 쓸모가 없습니다. 그건 먹을 수도 없고, 팔지도 못합니다. 수확도 못한 겁니다. 하지만 일단 심어야 합니다. 아직 쓸모가 없지만 문자반야는 중요합니다 .바른 씨앗을 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책만 읽고 이해한다고 믿는다면 그건 오류입니다. 문자 반야는 아직은 참된 지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선화 상인은 참된 지혜가 없다면 법을 설하지 말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명상 또는 수행을 해야합니다. 즉 관(觀)을 하는 겁니다. 그게 바로 관조반야(觀照般若, Contemplative prajna)입니다. 우리가 선(禪)을 배우고, 절하고, 진언을 외우는 이 모든 것이 바로 관조 반야의 한 형태입니다.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는 단계입니다. 예로 진언을 외우는데 갑자기 '아 만두 먹고 싶다!'라는 생각이 올라옵니다. 또는 '피곤해. 쉬고 싶어.' 그러면 스스로 물어보십시오. 난 왜 이리 참을성이 없지? 왜 화가 날까? 내 마음은 교만하구나. 그러면 그걸 잘나내야 합니다. 그게 바로 관(觀, Contemplation)입니다. 마음속 우치를 관하고, 자신의 탐욕을 보아야 합니다. 자신의 분노와 우울을 보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것은 보여도 무시하십시오.


보통 자신의 실수는 보기 어렵습니다. 그렇게 지혜가 부족한 것입니다. 지혜란 자신의 탐진치를 보는 겁니다. 그러면 지혜로운 겁니다. 만일 타인의 탐진치를 본다면 그곳에 지혜란 없습니다. 무엇이 불쾌한지 계속 보십시오. 자신의 허물을 볼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진실을 직면하는 걸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지혜가 없습니다. 자신의 추한 모습을 직면하는 것이 바로 관조지혜입니다. 관조의 과정은 '왜?"를 묻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정화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더러운 모습을 보고 씻어내는 겁니다. 우리가 염불이나 좌선할 때, 진언을 외우거나 염불하고 있을 때 그렇게 하는 게 바로 관입니다. 그러니 스스로 물어보십시오. 왜라고 묻고 원천으로 갑니다. 왜 탐욕스러운지 그 근원을 볼 때까지 그걸 쫓습니다. 그렇게 스스로 정화하고 잘라버립니다. 하나를 자르면 그 아래 더 깊이 자리하고 있는 문제가 드러납니다. 그럼 계속 또 추적해서 잘라버립니다.


각 선정의 단계마다 서로 다른 관조 지혜가 있습니다. 관조 지혜가 단 하나만 있는 게 아닙니다. 이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매우 어려운 과정입니다. 집착이 없는 상태가 되면, 탐진치를 인지하고 떨어뜨리면 불과(佛果)가 나타난다고 말하지만 그건 이론입니다. 수행하면서 각 단계에서 떨어뜨려야 할 특정한 탐진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건 사람마다 상황에 따라 다르게 드러납니다. 그리고 각 단계에 해당하는 탐진치를 해결해야만 다음 단계로 넘어갑니다. 탐진치와 지혜에 여러 층이 있듯, 깨달음에도 셀 수 없이 많은 단계가 있습니다. 그러니 수행한다면 절대 작은 성취에 만족하지 마십시오. 앞으로 끊임없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참고 법문: 영화 선사의 법문 ‘반야바라밀 제1편’ 2015년 1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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