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아이스블락을 건넨 의사 선생님

< 루나의 뉴질랜드 병원 이야기>

by 해보름

며칠 전, 저녁을 먹이고 아이를 재우려는데, 평소와 달리 컨디션이 영 좋아 보이지 않았다. 잠잘 시간이 되도 자려 하지 않던 아이가 내 무릎에 누운채 힘들어했다. 체온계를 대보니, 숫자가 39도를 넘었다.

“어쩐지…”

해열제를 먹이고 아이를 재웠지만, 몇 시간 뒤 낑낑대는 소리에 눈을 떴을 땐 열이 더 올라 있었다.

밤새 해열제를 번갈아 먹이고, 물수건을 갈아가며 뜬눈으로 지새웠다. 아침이 되어도 열은 고작 1도 내려가 여전히 38도가 넘어 있었다.


급히 아이가 등록된 병원에 전화를 걸었다. 역시나 당일 예약은 불가능했다. 그날이 금요일이라 혹시 토요일에 진료를 받을 수 있는지 물었지만, 돌아온 대답은 “주말엔 문을 열지 않는다.”였다.

이젠 그다지 놀랍지도 않다. 뉴질랜드에서 살다 보면, 이곳은 소비자 중심 사회’보다는 ‘일하는 사람의 권리가 더 존중받는 사회’라는 걸 느낀다. 마트 직원은 그다지 바빠 보이지 않아도 자신이 하던 일이 끝나기 전엔 전화를 받지 않는다. 병원도 마찬가지다. 1년 중 나라 전체가 휴가인 크리스마스부터 새해 첫주까지 2~3주간은 공공기업부터 병원까지 거의 모든 곳이 문을 닫는다. 그때는 거의 모든 공공기관의 업무가 정지된다. 의사들 역시 그 기간엔 길게 휴가를 떠난다. 산모들 사이에서는 크리스마스때부터 새해까지 할리데이에 예정일이 잡히질 않기를 바라기도 한다. 그만큼 이 나라의 사람들은 ‘일'보다 '삶’을 중요하게 여긴다.


아이의 상태를 설명하자, 간호사는 다른 긴급 진료 병원을 안내해주었다. 하나는 24시간 응급실, 다른 하나는 오전 8시부터 밤 8시까지 운영하는 병원이었다. 그 중 한군데로 향했다.


집에서 차로 25분쯤 달려 도착하니 다행히 기다리는 사람이 많지 않아 보였다. 접수대 직원은 “앞에 5명 대기하고 있으니 최대 두 시간은 기다려야 한다."고 했지만, 1시간 정도 지나자 아이의 이름이 불렸다. '뉴질랜드에서 예약 없이 Walk- in으로 와서 1시간 대기라니' 놀라웠다.


의사는 친절한 키위 여성 선생님이었다. 편도가 많이 부었다며 항생제를 처방해 주었고, 인후염과 독감 검사를 함께 진행했다. 열이 아무리 높아도 항생제를 받기가 어렵다는 이곳에서 편도염으로 바로 항생제를 처방해주니 다행이었다. 그리고 밤새 해열제를 먹여도 열이 잡히지 않았다고 하자

“부르펜을 먼저, 그 다음 파라세타몰을 교차로 먹이세요. 저도 제 딸에게 그렇게 했어요.”

그 말을 듣는데 안심이 되었다.


주사를 맞을까 봐 겁먹은 아이의 손을 잡아주며 “주사 안 맞아. 괜찮아.” 하고 웃는 의사의 눈빛이 따뜻했다. 그리고는 검사실 앞 냉동고에서 아이스블락을 하나 꺼내

“이거 먹으며 기다리자. 부은 목을 가라앉게 해줄거야”라며 아이에게 건네주는게 아닌가?

병원에서 의사선생님이 건넨 아이스블락

덕분에 아이는 독감 검사도 가뿐히 끝냈다. 검사 결과는 양성이 나왔지만 아이는 아이스블럭 하나에 그저 신나있었다.


집에 와서도 여전히 40도를 넘나드는 열로 힘들어했지만, 퇴근해 안부를 묻는 아빠에게

“오늘 병원에서 의사 선생님이 아이스블락 줬어.” 라며 이야기를 꺼냈다. 기운은 없었지만 기분 좋은 목소리엔 따뜻한 기억이 묻어났다.


이곳에 와서 4살 예방접종 때 주사를 세 번이나 맞아 ‘주사를 많이 맞는 병원’으로 첫 뉴질랜드 병원을 기억했던 루나에게, 오늘은 전혀 다른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주사 대신 위로를 주고, 불안 대신 달콤한 아이스블락을 건넨 오늘 방문했던 친절한 병원처럼 말이다. 이제 루나에게 뉴질랜드의 병원은 ‘아픈 날의 두려움’보다 달달한 아이스블락처럼 ‘달콤한 위로’를 먼저 떠올리게 하는 곳으로 기억되겠지.


나에게 뉴질랜드 병원에 대한 좋았던 기억은 많지 않았다. 응급실에서는 기본 7~8시간을 기다려야 했고, 앰뷸런스를 타고 온 응급실에서도 별다른 조치 없이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그때는 느리고 미흡하기만 했던 병원이 아이에게 신속함과 따뜻함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덕분에 나의 병원 기억 또한 새롭게 쓰여질 것 같다.




keyword
수, 토 연재
이전 13화루나의 영어 성장기 3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