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멈췄다. 연식이 20년이 다 돼가는 김치 냉장고가 한참 여름을 코 앞에 두고 제 수명을 다하고 장렬하게 최후를 맞이했다. 요즘 소음이 부쩍 커져 조마조마했는데 슬픈 예감은 어김없이 맞아떨어진다. 혼자 살림이라 사실 김치 냉장고가 크게 필요하지는 않아도 있다가 없으면 아쉬운 법. 남은 묵은지 한통을 꿩 대신 닭이라고 급히 냉장고에 넣어뒀다. '저대로 냉장고 안에 보관하면 묵은지라 금세 팍 시어 먹을 수 있겠나?'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정육점으로 향했다. 당분간은 좋든 싫든 김치 요리를 해 먹어야겠다.
"사장님, 앞다리살로 김치찜 할 용도로 500g 정도 주세요. " 하고 단골 정육점 사장님께 주문을 했다. 김치찜엔 보통 목살을 사용했는데, 지난번에 김치찜을 할 때 기름기가 좀 많은 것 같아 가격도 좀 저렴하고 기름기도 좀 적은 부위를 선택했다.
이제는 묵은지 전성시대이다. 한통 소진 시까지 볶고 지지고 끓여서 버리는 것 없이 먹어야지 다짐을 했지만 '혼자 어느 세월에 저 많은 걸 먹어치우나? ' 슬슬 고민이 밀려온다. 싱싱하고, 신선한 김치라면 동생이랑 나눠 먹으면 되는데, 신김치를 못 먹는 동생이니 나눠 줄 수도 없고 난감했다.
오전 내 고장 난 김치 냉장고에 담겨 있던 내용물을 정리하고 내친김에 냉장고의 다른 음식들도 정리하고 냉장실과 냉동실을 말끔하게 청소하니 속이 시원하다.
생각이 복잡할 때 심란하고 불안할 때 아니면 이도 저도 아니고 무료할 때 청소나 정리를 하면 얽힌 실타래 같던 복잡한 마음이 잔잔한 호수의 수면처럼 바뀌는 것을 종종 경험한다. 오늘은 갑작스러운 김치냉장고의 고장으로 팔을 걷어붙이고 계획치 않은 정리정돈을 하게 되었지만 몸은 번거롭지만 마음은 군더더기 없이 날렵하다.
아직 본격적으로 덥지 않은 초여름 날씨이지만 모처럼 마음먹고 베란다의 낡고 오래된 물건들을 정리하니 땀이 이마를 타고 흐른다. 버릴 것을 한편에 치워 놓고 쓸만한 것, 꼭 필요한 것은 가지런히 베란다의 수납 창고에 쌓아 놓고 돌아서 점심을 준비한다. 넉넉한 냄비에 묵은지와 도톰하게 썬 돼지고기를 불 위에 올려놓고 애호박을 적당하게 썰어 볶는다.
이상하게 나이가 드니 좋아하는 음식이 많이 바뀐다. 피자, 스파게티를 좋아했는데 요즘엔 그다지 찾아지지 않고 옛날 어릴 적 엄마가 해주시던 소박하고, 담백한 맛들이 그리워진다. 그리운 맛을 떠올리면 어느새 나도 모르게 정겨운 그 시절로 돌아가 있는 나를 발견한다. 옛것이 그리워지면 늙는다는 증거라는데... 떠올릴 추억이 많아지는 것을 보니 나도 예외 없이 나이를 먹나 보다...
온 집안에 김치찜 냄새가 진동을 한다. 군침이 돈다. 냄비 뚜껑을 열어보니 김치가 부드럽게 잘 익었다. 고기를 잘라먹어보니 식감이 보드랍고 쫄깃한 것이 입안에 착착 감긴다. 큼직한 접시에 보기 좋게 고기와 김치를 담고 볶아 둔 애호박도 예쁘게 세팅하여 눈으로 우선 식욕을 돋운다.
누군가 현재 나의 삶의 상태를 묻는다면 나는 뭐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새벽 미명일까 아니면 밤의 한가운데를 걷고 있을까... 눈부신 빛의 아침을 애타게 기다리기에- 나는 지금 깊고 짙은 밤길을 걷고 있음은 분명하다. 서늘하고 시린 바람 한줄기가 가슴을 스치고 지나간다. 이 어두운 밤-나의 약함을 아시는 절대자, 그분께 이 시간이 속히 지나가기를 기도한다.
갑자기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온다. 후드득후드득 굵은 빗방울이 쏟아진다. 소나기가 시원스레 쏟아지는 오후이다. 하던 일을 멈추고 쏟아지는 빗줄기를 우두커니 서서 바라본다. 답답하던 마음이 시원한 빗줄기에 씻겨 내려간다.
칼칼한 김치찜과 새우젓을 넣고 볶은 애호박 볶음이 달게 밥 한 그릇을 뚝딱 비우게 한다. 오늘은 오로지 나를 위한 만찬이었다. 적당한 식욕과 살아있는 미각이 감사한 평범한 하루다. 고난과 결핍이 삶에 주어지지 않았다면 결코 몰랐을 소소한 일상이 주는 축복임을 이제 깨닫는다.
먼산도 졸고 있는 늦은 저녁. 오늘 하루 감사한 일들을 떠올려 본다. 내 몸 누일 수 있는 쉴 만한 거처가 있다는 것. 매일을 규칙적으로 눈을 뜨고 움직일 수 있는 건강이 있다는 것.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눈과 마음을 주신 것. 아직은 불평과 원망보다는 감사가 살아 있는 삶 속에 있다는 것. 그래도 그래도 살아있음은 축복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입술이 있어 감사하다. 보고 싶은 얼굴들이 떠오른다. 떨어져 있어도 그들이 아직 내 곁에 있으니 이 또한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나는 가진 것이 많은 사람임을 고백한다.
눈을 감는다. 내일은 어떤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두려움이 아닌 설렘과 기대로 가슴이 뛴다. 설령 기대와는 다른 예기치 못한 슬픔이 와도 나는 지난 시절의 경험을 믿으며 그것 또한 지나갈 거라고 주문을 외울 것이다. 그리고 또각또각 앞으로 걸어 가리라. 삶의 기적은 내가 만들어 가는 일상들이었음을 기억하며 이 길 끝나는 날까지 쉬지 않고 걸어갈 것이다... 포근한 나른함이 나를 감싼다. 달빛도 별빛조차 깊은 밤의 품에서 잠이 드는 하루, 그 안에 내일을 기대하며 편히 안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