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 겸 무료함을 달래려 휴일 오후 열심히 맨손체조를 하고 있는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난다. '어, 누구지?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며 현관으로 나간다. 옆집 할머니가 앞에 서 계신다. "안녕하세요? 어서 들어오세요~" 하고 머뭇거리는 이웃 할머니를 거실로 모셨다.
여든다섯의 고령인 할머니는 가족이 없으시다. 일찍 남편과 사별하고 자식도 없이 지금까지 혼자 사신 분이다. 그래도 다행히 아직 정정하셔서 매일 운동도 열심히 하시고 나름 씩씩하게 지내시는 분인데 오늘 웬일로 나를 찾아오셨다. 가끔 내게 새로 바꾼 휴대폰의 사용방법을 물어 오실 때도 있고, 2년 전엔 가족이 없는 할머니의 사정을 알고 용산의 실버타운의 입소절차를 알아보려 하루를 시간 낸 적이 있었다. 내가 조카딸 같다고, 예쁜이라고 항상 정겹게 불러주시는 분인데 오늘은 표정이 밝지 않으시다. 현미차 한잔을 할머니 앞에 내려놓았다. 내심 무슨 일 있으신가 걱정이 앞선다.
다음 달 멀리 익산의 실버타운에 입소하신다고... 이전하면서 해야 할 소소한 절차들이 혼자서 하시기에 겁이 나고 두렵다는 말씀을 꺼내신다. 마음이 짠하게 저려왔다. '얼마나 엄두가 안 나시면 남한테 폐 끼치는 것을 싫어하시는 깔끔한 분이 내게 오셨을까... ' 남의 일 같지 않아서 아니- 미래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아렸다.
전화 가입 해지, 관리비 등 공과금의 자동이체 해지 같은 일들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태산 같은 걱정을 하고 오신 어르신께 언제든 도움이 필요하시면 말씀하시라고 내 전화번호를 알려드리니 표정이 환하게 밝아지신다. 불편했던 내 마음도 웃는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이상하게 자꾸 작아지는 나를 느낀다. 하루하루가 무섭게 달라지는 세상에 어떤 때는 멀미가 날정도로 두렵다. 젊었을 때는 용기와 패기가 넘치지만 -젊음의 시간의 스러져가고 장년의 시간에 서서 -다가 올 노년의 시간을 바라보니 급 움츠려 들고 두렵기 짝이 없다. 아들은 하나 있지만, 요즘 세대도 살기 팍팍한 세상에-짐이 되고 싶지는 않다. 아들이 독립해서 사는 탓도 있겠지만 전등만 수명을 다해도 쩔쩔매는 아줌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나의 모습이다.
아직 젊은 나도 혼자 사는 세상이 두렵기 그지없는데 옆집 할머니의 세상은 얼마나 공포스러울까. 작은 변화에도 휘청거리며 가슴을 쓸어내리실 것은 분명하다. 할머니가 집으로 돌아가신 뒤에도 한동안 가슴이 먹먹하고 일손이 잡히지 않았다.
현재에 집중하고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나의 삶에 갑자기 미래에 대한 걱정이 몰려오며 가까스로 유지하던 평온함에 균열이 간다. 염려란 놈에 잠식당하지 않으려 고개를 세차게 젓는다.
휴일이 끝나고 새로운 한주가 시작되었다. 관공서, 공공기관의 상담시간에 맞춰 옆집 할머니께서 부탁하신 업무를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은 처리해드리고 본인이 직접 처리해야 될 업무는 할머니와 동행하여 마무리를 지었다. 큰 걱정거리를 덜어낸 듯 할머니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활짝 웃으신다. 작은 일이지만 도움을 드린 것 같아 나도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나도 언젠가 저렇게 늙겠지. 나도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나이가 되겠지... ' 하고 생각하니 요양원에 계신 엄마도 떠올랐다. 상대적으로 한참 젊은 나도 문득문득 외로운데 엄마도, 이웃할머니도 그 외로움이 얼마나 클지 짐작이 된다.살아 계시는 동안 잘해드려야겠다.
동생한테 전화가 왔다. 오늘 엄마한테 다녀왔다고 내게 보고를 한다. 여름이라 입맛 없으신 엄마가 체리를 드시고 좋아하셨다고 내가 다음에 갈 때 체리를 꼭 사가라고 귀띔해준다. 다음 주 요양원에 가져갈 목록에 메모를 한다. 아들이 군에 있을 때 이것저것 챙겨 택배로 보내던 일이 생각난다. 엄마가 군대 간 아들 같다는 생각이 든다. 세월이 야속하다. 펄펄 소리 없이 날아가는 세월이 야속해 왈칵 눈물이 난다.
먼산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데 현관 벨이 울린다. "나여, 옆집 할멈! " 문 앞에 이웃 할머니가 꾸러미를 안고 서 계시다 내게 내민다. 소담스러운 복숭아가 담긴 봉투를 건네시며 고맙다고 내 이름을 불러주신다. 나를 생각해 주시는 마음이 고마워 "이모님, 이제는 이모님이라고 부를게요. " 하니 내 손을 잡아주신다. 투박하고 주름진 손이 따뜻하다.
나이 드는 것이 좀 불편할 뿐. 나의 경우에는 결코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젊었을 때는 새초롬하니 나 밖에 모르는 깍쟁이였는데 한 해 한 해 나이를 먹어갈수록 마음이 넉넉해짐을 느낀다. 좀 수더분하고 둥글둥글해진 느낌. 화낼 일도 점점 없어지고 타인 간의 관계에서도 역지사지로 생각해 보면 이해 못할 일이 없다. 공감 못할 일도 없다. 얼굴의 주름은 늘었지만 마음은 팽팽해진 느낌. 그래서 감사하다.
인생의 굴곡과 풍파를 겪지 않은 사람은 없다. 나도 힘든 시기를 돌고 돌아오니 어느새 가을에 서 있다.태어날 때는 혼자이지만 세상을 살아가려면 결코 혼자서만은 살아갈 수 없다. 현재의 건재한 나도 지금까지 나를 응원하고 친절히 도움을 주었던 분들의 진심 어린 정성이 모이고 쌓여 이루어졌음을 고백한다. 나 역시 시간 앞에는 장사 없다는 옛말처럼 늙고 초라한 때가 -언젠가는 올 것이다.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시간이지만 누구보다도 마음만은 부자로 -따뜻하고 배려하고 나누는 삶을 실천하는 고운 할머니가 되고 싶은 것이 지금의 꿈이다. 지금부터 소원하고 노력한다면 꼭 이루어질 거라 믿는다.
기상 시간, 취침 시간 항상 일정하게 유지한 지 세, 네 달. 식사는 세끼를 규칙적인 시간에 맞춰 식사하고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매일 산책을 2,30분씩. 눕고 싶으면 앉고, 앉고 싶으면 서서 몸을 움직인다. 물 많이 마시기. 가공육, 인스턴트 안 먹기. 매일 감사한 일들을 찾아 자기 전 적기... 이것이 요즘 내가 생활에서 실천하는 소소한 규칙, 습관들이다. 건강하고 여유 있고 친절한 은경 씨가 나의 목표이며, 앞으로 다가 올 노년기의 희망사항이기 때문이다.
성인 아들을 동포로 표현한 우스개 소리가 떠올라 피식 웃었다. 나의 아들도 보통의 남자로 내게 동포와도 같은 존재이다. 가깝고도 먼. 그래도 끈끈한 무언가가 불끈 느껴지는 동포. 그 아들이 보고 싶지만 바쁜 녀석에게 오라 마라 안 하는 것도 어떻게 보면 또 다른 형태의 배려이고 사랑 같다. 최대한 독립적으로 사는 연습을 해서 숙명 같은 외로움조차 친구처럼 토닥이며 같이 늙어 가는 게 순리일 것이다.
요란한 천둥소리가 비를 몰고 오더니 후드득 굵은 소나기를 뿌려댄다. 쏟아지는 빗줄기가 마음까지 시원하게 한다. 어느새 여름이 무르익는다. 나의 계절도 잘 여물어가는 보통의 하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