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10 b) 내장사를 거쳐 천관산 자연휴양림으로
금산사를 출발하니 비가 쏟아진다. 부슬부슬 내리는 가을비가 아니라 마치 여름 장맛비 같은 굵은 비다. 가을비는 정말 을씨년스럽기 그지없다. 우리나라는 가랑비, 이슬비, 소낙비 등과 같이 비의 종류를 비의 세기에 따라 많이 나누는 것 같다. 이에 비해 일본어의 경우 계절에 따른 비의 종류가 많다. 봄에 오는 하루사메(春雨), 여름에 오는 사미다레(五月雨), 늦가을에서 초겨울에 걸쳐 오는 시구레(時雨) 등인데, 지금 추적추적 내리는 비는 ‘시구레’라는 말에 딱 어울린다.
금산사를 출발하여 40분 정도 지나자 내장산에 들어섰다. 비와 추위로 단풍이 모두 졌을 걸로 생각했는데 여전히 단풍이 많다. 끝물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아직은 남은 화려함이 있다. 내장산의 도로를 달리노라면 온 산이 단풍이다. 역시 내장산 단풍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 평일에다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관광객이 많다. 내장사 입구에 있는 여러 주차장은 이미 차례차례 만차가 되어 있다. 안내원의 인도에 따라 겨우 주차를 했다. 차에서 내리니 앰프 소리가 귀를 찌른다. 어디선가 엠프를 켜놓고 잘 부르지도 못하는 노래를 목청껏 부르고 있다. 다행히 비는 많이 가늘어졌다.
사람들이 줄을 서다시피 하여 내장사 쪽을 향해 걸어간다. 주위 상가에서 인도를 거의 점령하고 있어 걷기가 아주 힘들다. 우산까지 들고 있으니 참 피곤하다. 처음 듣던 앰프 소리가 작아지나 했더니 이쪽에서 또 큰 장막을 쳐두고 그 속에서 엠프 반주에 노래를 부르고 있다. 이래서야 산 입구가 완전히 니나노 판이다. 내리는 비에 앰프 소음에 피곤은 더해진다. 조금 들어가니 안내원이 내장사 케이블카까지 운행하는 순환버스가 있으니 그것을 이용하라고 한다. 내장사까지 걸어가면 얼마나 걸리냐고 물으니 한 시간은 걸어야 한단다. 단풍을 구경하며 걷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비도 내리고 사람도 많아 버스를 타기로 하였다.
내장사 케이블카에는 타려는 사람들이 줄을 지어 서있다. 케이블카는 포기하고 내장사 절로 향했다. 빗줄기는 점점 더 굵어진다. 얇은 바람막이 하나만을 걸쳤더니 아주 춥다. 차에 두었던 두꺼운 파커를 입을 걸 그랬다. 일주문을 지나 단풍길로 들어섰다. 이미 땅바닥에 단풍잎이 수북이 쌓여 있으며, 나무에 달린 잎은 많지 않다. 단풍나무 길을 걸어 한참 가면 오른쪽에 돌로 된 담장이 보이고 왼쪽에는 작은 연못이 나온다. 내장사 안으로 들어섰다. 걷는 길을 제외하고 마당은 온통 떨어진 낙엽으로 노랑, 빨간 색을 띠고 있다.
내장사는 660년에 창건되었다고 한다. 660년이라면 백제가 멸망한 해이다. 나라가 멸망한 해에 창건된 사찰이라니까 뭔가 기구한 느낌도 든다. 작년에 어떤 승려가 내장사에 방화를 하여 절이 모두 불탔다는 뉴스가 있었다. 오늘 주차장에서 내장사로 향해 출발할 때 내장산 안에서 영업을 하는 택시 운전사가 내장사는 이미 모두 불타 볼 것이 하나도 없으니, 자기의 택시를 타면 다른 좋은 곳으로 안내하겠다는 제안을 했다. 그래서 내장사가 정말 모두 불탔는지 반신반의했으나, 불탄 곳은 대웅전뿐이었던 것 같다. 절 안으로 들어서니 정면에 컨테이너 박스 같은 작은 간이 건물이 하나 놓여있는데, 그곳이 바로 대웅전이다. 그 자리에 있던 대웅전이 불타 임시방편으로 간이 건물을 대웅전으로 사용하는 것 같았다. 양 쪽에 있는 건물들은 거의 피해가 없는 듯하였다. 그러나 절의 중심 건물인 대웅전이 없으니 절 전체가 휑한 느낌이다.
건물 뒤로 비안개 속에 내장산의 봉우리들이 그림처럼 서있다. 마치 절 전체를 내려다보고 있는 듯하다. 작년 방화를 한 승려는 다른 승려들이 자신을 왕따 시키는 것 같아서 그랬다고 한다. 왕따의 아픔이 그만큼 큰지 아니면 그 승려의 마음에 문제가 있는지 어느 쪽일까? 여하튼 그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즐기고 마음의 위안을 삼을 좋은 명승지가 졸지에 사라졌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비가 오고 춥고 해서 느긋하게 내장산의 단풍을 즐길 형편이 못된다. 올라 온 길과 계곡의 반대편에 있는 작은 길을 통해 내려왔다.
내장산을 출발하니 오후 2시 반 정도가 되었다. 밝을 때 휴양림에 도착하려면 이제 다른 곳을 거칠 수는 없다. 곧장 휴양림으로 향해야 한다. 날씨가 참 변덕스럽다. 이제까지 내리던 비가 그쳤다고 생각하면 다시 하늘은 돌변하여 세찬 비가 내린다. 이런 상황이 몇 번이나 반복된다. 운전대를 집사람에게 맡겼다. 그리고 유튜브에 접속하여 현재 진행되고 있는 <LG배 세계바둑대회> 신진서-커제의 대국 중계방송을 본다. 한국 랭킹 1위인 신진서와 중국 랭킹 1위인 커제의 시합은 더없이 흥미진진하다. 신진서가 이길 것 같은 생각이 들었지만, 만만한 상대가 아니니 승부를 예측할 수는 없다.
영암이 가까워지자 하늘은 또 언제 비가 왔느냐는 듯이 맑게 개인다. 그때 갑자기 왼쪽 저 멀리 무지개가 보인다. 동쪽 하늘의 거의 1/4은 가릴 듯한 큰 무지개이다. 오랜만에 보는 무지개이다. 몇 년 만에 처음 보는 것 같다. 일본말로 하면 시구레니지(時雨虹), 즉 “늦가을 비에 걸린 무지개”이다. 한참 달리니 장흥댐이 나오고, 도로는 호수를 끼고 나있다. 도중에 장흥호의 경치를 즐길 수 있는 전망대가 나오는데, 시간이 없어 그냥 달렸다.
오늘 먹을 저녁거리를 사야 한다. 인터넷에서 <천관산 관광시장>이란 곳을 찾아내었다. 장흥군이 많은 돈을 투입하여 관광객 유치를 위해 의욕적으로 건설한 시장이라 한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 손님은 정말 한 명도 없고 많은 가게가 문을 닫고 있다. 몇몇 활어 판매 가게가 문을 열고 있는데, 시장 분위기도 그렇고 또 스산한 오늘 날씨도 그래서 도저히 회를 먹을 마음은 생기지 않는다. 결국 시장에서의 장보기는 포기하고 근처에 있는 농협 하나로 마트에 들러 삼겹살을 샀다.
장보기를 끝냈으니 이제 휴양림으로 직행이다. 오후 다섯 시가 조금 넘었는데 벌서 날씨는 어두워진다. 신진서와 커제의 바둑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시작부터 줄곳 우세을 유지해오던 신진서가 느슨한 수를 두어 역전을 허용했고, 다시 커제의 실수와 신진서의 묘수로 재역전을 한 상태이다. 사람보다 훨씬 강한 인공지능 바둑의 출현으로 바둑이란 게임은 이제 끝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내 생각은 그게 아니다. 인공지능 바둑이 나와 고수의 게임을 훨씬 재미있게 즐길 수 있게 되었다. 한참을 달려 휴양림 입구까지 왔다. 여기서는 좁은 산길 도로이다. 휴양림까지 6킬로, 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좁은 산길을 끝도 없이 올라가는 기분이다.
간단한 입실 절차를 마치고 숙소로 향했다. 두 개의 방이 나란히 붙어 있는 연립동이다. 비를 맞으며 짐을 방 안으로 옮겨 풀어놓고 이제 한숨을 돌린다. 방 한쪽 베란다가 있는 창문 커튼을 열었지만 이미 날은 깜깜해져 밖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바둑 TV를 켜니 신진서가 이겼다고 한다.
삼겹살에 맥주를 몇 잔 들이키니 피로가 풀리면서 얼큰한 기분이 든다. TV에서는 조금 전에 끝난 신진서-커제 바둑의 재방송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