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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정해진 운명
유난히 푸른 하늘이었다. 구름이 한 점 없는 게 선배 생각으로 가득 찬 예지의 마음과 같았다. 사람들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는데, 왠지 다들 웃고 있는 것만 같았다. 행복하게 웃는 얼굴들만 같았다. 예지가 행복했기에 사람들도 그렇게 보였다. 그날만큼은 쓸쓸해 보이는 사람들이 없었다. 학교에서 마주칠 선배의 얼굴이 떠올라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많은 사람들과 사람만큼 많은 자동차들이 지나는 도로였다. 버스에서 내리고 학교로 가기 위한 건널목으로 서는 예지였다. 분명 맑은 하늘과 깨끗한 공기와 행복한 사람들로 가득 찼었는데 어느새 그 자리를 안개가 채우고 있어 세상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건너편 반대로 보이는 한 사람, 무슨 사극 촬영이라도 하는 건지 한복을 입은 모습이었다. 멋 드려지게 차려입은 모습이었다. 불안한 표정으로 마주친 두 눈에 서로가 보였다.
잘 보이지 않아 자세히 보려고 눈살을 찌푸려 가며 보았다. 안개 속에 잘 보이지 않았다. 빛도 희미했다. 모든 것이 희미했다. 또렷한 것이 없었다. 어느새 주변은 모래바람이 휘날리고 바닥은 모래와 깨어진 유리 조각들로 가득 찼다. 바람은 한 곳으로만 불지 않았다. 이리저리 방향을 모른 채로 흘러야 하는 쪽을 잊은 것처럼 어리둥절하게 불어가는 바람이었다.
점차 희미해지는 시선이었다. 유일하게 보이는 건 이제는 저만치 보이는 사람의 형상, 연기자인지 한복을 입고 예지처럼 불어오는 바람을 막은 손짓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사람뿐이었다. 자세히 보려고 눈에 힘을 주고 보는데 안 보인다. 눈을 한 번 감고, 다시 떠서 자세히 보려는데 그때 바람이 멈추고 안개가 걷히고 날씨는 다시 맑아졌다. 많은 사람의 목소리가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그 안에서 유달리 아름답고 경쾌하고 사랑스러운 선배의 목소리가 들리지만 듣지 못한다. 주변을 살피는 사이에 선배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너무 사랑해서 환청까지 들리는 가 싶은 예지였다. 진짜 바로 옆에 있는지는 생각도 못한 채였다. 문득 선배가 보고싶어 휴대전화를 꺼내서 보려는데 조금 전 앞에서 보았던 그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아서 서둘러 자세히 보는 데 없다. 뭐지 싶어서 신호가 바뀌었는데도 걷지 않고 휴대전화 액정만 뚫어지라 쳐다보는 예지였다. 옆에서 갑자기 툭 치며 인사를 건네는 선배의 모습에 예지는 놀란다. 방금 건 뭐지 하면서 오늘 조금 몸이 안 좋은 건가 하면서였다.
“일찍 다니네? 동아리 연락줘서 고마워. 앞으로 잘해보자!”
선배를 보아 기분은 좋았지만 안색은 안 좋은 예지였다. 선배가 의아한 표정으로 예지를 보았고 예지는 씩 아무 일 없다는 듯 웃어 보였다. 힘듦을 표현하고자 하지는 않았다. 그 사람을 보고 느낀 행복을 나 역시 그 사람에게 주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휴대전화에 시선을 못떼는 예지를 보며 선배가 궁금한 듯 물어보았다.
“뭐해?”
“아, 아니 그냥..요
당황스러웠다. 그러게 내가 뭐하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환청이 들리고 아니, 환청은 선배가 진짜로 옆에 있으니까 아니라고 치지만 환각이 보이는 게 지금 제 정신은 아닌 것 같았다. 어제 선배가 너무 보고싶어서 잠을 설쳐서 그런가 싶었다.
”갈까?“
신호가 다시 바뀌자 선배가 예지에게 물었다. 예지가 아, 하고 네. 하고 대답했다. 두 사람은 걸었다. 학교를 향해서 나란히 말 없이 걸었다. 예지가 조금 지쳐 보였다. 힘들어 보였는지 학교를 오르다 연못가가 보이자 툭, 예지를 불러 세우는 선배였다.
”앉아도 되지?“
안아도 되냐구요? 네!! 하고 대답하고 싶었다. 너무 빠른 거 아닌가요라는 대답은 없었다. 아니 안아도 되냐고가 아니라 앉아도 되지라고 이성이 예지에게 다시 말했다. 아. 네. 돼죠. 앉아도 돼죠. 안아도 되는데. 하는 예지의 마음은 들키지 않아 다행이라 스스로 생각했다.
끄덕거림으로 대답한 예지는 선배와 함께 앉았다. 입술만큼이나 붉어지는 두 볼을 직접 볼 수 없었지만,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예지였다. 이토록 심장이 빠르게 뛰어 본 건 없었던 것 같다. 그렇게 꿈꾸던 첫사랑을 이렇게 이루는 건가 싶었다. 조금 어색한 감이 없지 않아서 이리저리 둘러보는 예지였다. 시선을 안 두는 척 이미 마음을 보낸 그에게 눈길도 향했다. 그러다 선배가 자신에게 고개를 돌리듯 싶어서 고개를 휙 돌려 연못을 본다. 그러다 다시 선배를 보는데 자신을 보고 있는 선배의 얼굴이 보인다. 두근거렸다. 그리고 어색해서 그냥 미소를 지어 보인다. 두 사람이 서로를 쳐다본다. 그러다 문득 궁금해졌다. 선배에 대해서, 비록 지금은 짝사랑이라고 하지만, 자신이 사랑하고 있는 이 사람에 대해서 궁금해진 예지였다.
”선밴 왜 이런 활동 하게 됐어요?“
질문을 던진 예지를 선배가 더 뚜려시 보았다. 좋은 느낌과 실수 했나 하는 마음이 들어 더 조마조마해졌다.
”넌 왜 들어왔는데?“
질문을 한 건 자신이었는데 답변을 해야하는 게 자신이 되자 당황스러웠다. ‘선배 때문에 들어왔어요!’ 말하고 싶었지만 참아야 했다. 어떤 대답을 해야 할까? 머리를 굴렸다. 수능시험을 볼 때도 이렇게 굴리지 않았던 머리였는데 빨리 돌아라. 대답을 찾아라. 선배에게 말할 대답을 찾아라! 머리를 굴려 생각하고 또 생각했지만, 대답은 저절로 튀어 나왔다.
“잘 모르니까 배우려고”
아, 이런 대답을 찾은 건 아니었는데, 하며 스스로를 자책하는 예지였다. 그런 예지를 보고 선배가 웃었다. 기특하다는 표정이었다. 의외였다. 꽤나 괜찮은 대답이었던갈까 싶었다.
“나도, 잘 모르지만 함께 알아가려고”
선배를 쳐다보는 예지, 연못가를 바라보고 있는 옆 모습이 하늘에 떠 오른 노을을 만들어내는 저 둥근 해보다 빛나고 아름다워 보였다. 후광이 비치는 그런 느낌인걸까, 이게 사랑하니까 나타나는 효과인걸까, 아니면 이 사람은 정말로 멋진 사람인걸까 생각하게 되는 예지였다.
“그래요? 뭘 알아가는 건데요?”
예지가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자 예지를 쳐다보는 선배였다. 태양과 같은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이었다.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마치 미리 준비해놓은 답안지처럼 바로 대답하는 선배의 모습이었다.
“왜 여자가 당하고 살아야 하는지, 앞으로 어떻게 하면 당하고 살지 않는 건지, 사람으로 평등하게 살아가는 것들?”
대답은 들었지만 잘 몰랐다. 여자가 당하고 산다는 건 맞는 것도 같으면서 잘 모르겠다. 당하고 살았나,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는 말이었다.
“당하고 살아요?”
“어, 그게 너무 싫은거야”
예지의 말에, 이미 답변은 다 생각해 놓았다는 듯 말하는 선배의 모습은 멋졌지만 한 편으로는 어려웠다. 자신은 사실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거의 없었다. 그저, 그저 선배가 좋을 뿐이었다. 조금은 생각해보다가, 지금까지 본 거 느낀 거 들은 걸 생각해보다 말하는 예지였다.
“그런데, 그건 어쩔 수 없는 거잖아요.”
예지를 보며 조금은 무거운 미소를 짓는 선배였다. 예지는 다시 한 번 혹시 내가 실수 했나? 라는 생각을 했다. 모르는 문제니까, 그냥 가만히 있을 걸 그랬나 싶었다.
“어쩔 수 없었던 거였을까? 어쩌고 싶은 게 아니고?”
“네?”
어려운 말에, 정말 모르겠어서 반사적으로 대답하는 예지였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잖아. 지금까지 잘못된 씨앗을 키워온 건 아닐까? 그렇다면 이제라도 바꿔야 되지 않을까?”
“예.. 근데 그렇지만...”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런데 선배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는 않았다.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어버버 하는 예지의 모습이었다. 맑은 하늘이었고, 푸른 바람이었는데, 선배만 떠올리면 마냥 행복해지는 예지였는데, 어려워졌다. 자신이 너무 어린 걸까 아무 것도 몰라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예지가 선배를 쳐다보았다. 선배의 얼굴에 땀이 흐르고, 옷이 바뀌었다. 호위무사 권신이었다. 권신은 검을 들고 있었고 그 검이 향하는 곳에는 의경 세자가 있었다. 서로가 들고 있는 검은 수련용이 아닌 진검이었다. 서로 검을 휘두를 때마다 검과 검이 맞나 강철로 만들어져 매우 날카로운 두 검이 큰 소리를 내었고, 지켜보는 이와 검을 휘두르는 모두를 긴장케 했다.
두 사람의 검투는 마치 정말로 한 명이 죽어야만 끝이 날 거 같은 승부였다. 좀처럼 봐주는 모습이 없었고 둘 다 지려고 하지 않았다. 의경이 검을 휘둘러 권신의 허리를 노렸지만, 권신은 뒤로 배와 허리를 빼고 한쪽 발을 뒤로 빼는 자세로 검을 앞쪽으로 빼어 의경을 찌르려 했다. 의경이 뒤로 검을 빼면서 막고 자세도 흐트러졌다. 의경이 검이 권신의 일격을 막아내며 검무장 밖으로 날아가 바닥으로 꽂혔다.
땀으로 범벅되어 있는 두 사람이었다. 다행이 피는 묻어 있지 않았다. 권신이 날아간 검을 보았다. 말이 없었다. 의경도 날아간 검을 보았다. 허억허억,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권신”
의경을 말에 바로 자세를 잡고 목을 숙이는 권신이었다.
“예.”
바닥에 주저앉아 쉬는 의경이었다.
“조선 제일 검을 노리는 사내 답구나”
권신은 조용히 미소지었다. 숙인 고개를 그대로 두고 있었다. 의경이 자세를 바로 잡고 날아간 검을 뽑으며 말했다.
“야행을 가야겠다.”
권신이 고개를 들어 의경의 뒷 모습을 보고 조용히 말했다.
“... 전하께서 아시면 노하실 것입니다.”
아직도 헐떡이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의경은 애써 무게를 잡아 보려했다.
“밤이 깊다. 백성의 깊이도 알아야겠다. 그것이 세자의 도리가 아닌가.”
권신은 의경을 잠시 보다 침묵 보다는 대답하기를 선택했다.
“저는 잘 모릅니다.”
“그럼 뭘 아는가.”
“저하의 옥체를 보존하는 것. 적을 베는 것을 알 뿐입니다.”
권신의 말을 듣고 약간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권신을 보는 의경이다. 권신은 시선을 피하고 고개를 숙인다.
“조금 전, 내 적은 너였던 거 같은데”
“….”
“전하께서 모르셔야지, 하지만 난 내 백성을 알아야겠다.”
웃으며 빼어든 검을 들고 검무장을 빠져나가려는 의경이었다. 한곳에 세워둔 모래시계를 집어 드는 의경이었다. 곧 권신이 모래시계를 바라보는 의경에게 말했다.
“늘 소중히 하십니다.”
“그럼, 누님께서 대호군에게 부탁해 만들어 주신 선물이다. 소중할 수 밖에”
권신이 고개를 떨군다. 금방 검무장을 나서려던 기세는 없어지고 한동안 모래시계를 쳐다보다가 뒤집으려다 그만 바닥으로 떨어트린다. 모래시계가 옆으로 굴러가 모래들이 양옆에 비슷하게 가득 찬다.
“시간이 앞뒤로 모두 흘렀구나”
권신은 대답없이 모래시계를 주워 세자, 의경에게 건넸다. 의경은 시계를 건네받고는 씁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누님께선 남아였으면, 세자는 누님이었을 테고, 대호군이 양반이었음, 영정은 대호군이 되었을 테지. 충분히 그랬어야 했을지도.”
권신은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어 고개를 떨구는 방법을 선택했다. 묵묵히 자신의 주군인 의경이 생각을 정리하기를 달을 벗 삼아 기다릴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