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을 정리하다 한쪽 구석에 있는 노란 커버의 책이 눈에 들어왔다. 꽤 오래전에 읽은 책이라 언제쯤 읽었는지 기억을 더듬어 봤다. 이 책의 존재 자체를 잊어버리고 살다가 다시 만났기 때문에 낯선 느낌이 강했다. 내가 책장을 정리하지 않았거나 책 커버가 눈에 띄는 노란색이 아니었다면, 나는 이 책을 다시 읽을 기회가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이 책의 제목은『빅터 프랭크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빅터 프랭크 지음, 이시형 옮김, 청아출판사, 2014)이다.(이하 ‘죽음의 수용소’)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 있었던 유태인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크의 자전적 에세이며 보고서이기도 하다. 이 책을 읽었을 때가 2014년 봄이었다. 그때는 ‘세월호 참사’로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충격에 휩싸여 깊은 슬픔에 빠져있던 상태였고, 갑작스럽게 떠난 분들에 대한 애도의 기간이기도 했다.
2014년 봄을 기억한다. 나는 그때 김포공항에 있었다. 집에서 김포공항까지 운전해 오면서 무겁게 내려앉은 구름에 마음까지 가라앉은 때였다. 비가 조금 내렸었나, 자동차 앞 유리에 물방울이 조금 맺혔던 것이 내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다. 김포공항 국제선 청사에 있는 커다란 TV에서 세월호 왼쪽 3분의 1 정도가 물에 잠겨 있는 화면을 띄운 뉴스 속보가 방송됐다.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사각형 화면에 앵커 얼굴 외에는 긴급하다는 걸 누구라도 알 수 있는 자막이 가득했었다. ‘전원 구출’이라는 문구가 기억난다. ‘아, 정말 다행이다. 다 구조됐다니 안심이다.’라는 마음으로 나는 화면에서 눈을 뗐다. 비행기 추락 사고라면 폭발로 이어질 확률이 매우 높기 때문에 다수의 희생자가 나오나, 세월호는 배가 3분의 1 정도 바다에 잠긴 상태니 그 사이에 당연히 사람들을 구했을 거라 생각했다. 정말 조금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대체 이동수단이 없는 하늘이 아닌 바다이고, 배가 완전히 침몰한 것이 아니며, 폭발 사고 같은 것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즈음『죽음의 수용소』를 대형 서점에서 발견해 구입했었고, 구입 후 단숨에 읽으면서 ‘참 끔찍하고 참담한 일을 겪은 사람의 정신 승리’로 나름 정리해서 마음 한 곳에 갈무리해두었다. 읽어야 할 책들이 많았고 그 책 중에 하나였으나, 충격적인 전쟁 참화의 끔찍한 체험들을 정신과 의사로서 가감 없이 분석하고 접근해 풀어낸 이야기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던 것은 분명했다. 인간이 어디까지 악마로 변할 수 있는지, 인간이 인간이길 포기했을 때 벌어질 수 있는 일들이 무엇인지 생생하게 간접 경험했다. 빅터 프랭크 박사는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아 그 당시 있었던 참혹한 일들을 눈을 감기 전까지 증언했다. 또한 인간의 야만성과 잔혹성이 어디까지 이를 수 있다는 것을 생생하게 전달했고, 아무 희망도 미래도 없는 상황에서라도 끝까지 인간 존재의 의미를 갈구해야만 한다는 메시지를 통해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생각하게 했다. 그는 떠났지만 그가 남긴 이 책은 영원히 남을 것이다.
2014년 봄, 책을 다 읽고 나서 나는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에 무척 감사한 마음이었다. 내가 살고 있는 나라는 안전하며 개인의 존재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자유 국가이고, 적어도 눈에 보이는 차별과 멸시는 점점 옅어져 가는, 좋은 나라 중에 하나이며 그런 나라에 태어나 살고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너무나 야속하게도 세월호는 침몰했고 탑승자 476명 중 304명이 사망하는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참담한 사건으로 귀결되었다. 사망자 중 대다수가 수학여행을 떠나는 고등학생들이었고, 이들을 구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구하지 못했다는 상황을 알았을 때는 분노와 경악을 넘어 ‘생각의 마비’를 불러일으켰다. 나는 사망자가 계속 늘어나는 보도를 보며 TV 앞에서 통곡했었다. TV 안에 손을 넣어 바다에 있는 희생자들을 어떻게든 끄집어내고 싶었고, 내 입김을 불어넣어 온기를 전달하며 살리고 싶어 나는 가슴을 치면서 심호흡을 했고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아마 당시 TV를 보는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 나는 ‘국가’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국민들의 생명을 지켜줘야 하는 국가라는 정체에 대해서 깊이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발을 딛고 살고 있는 이곳이 과연 어떤 곳인지에 대해서 스스로 여러 번 물었다. 공교롭게도 2014년에 나는『죽음의 수용소』를 통해 폴란드 아우슈비츠에 도착한 유태인들을 독일군 장교가 집게손가락 하나로 ‘삶과 죽음’으로 분류하는 순간과 마주했다. 당시 저자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함께 도착한 1,500여 명 중 저자를 포함한 단 10%인 150명만 노동 인원으로 살아남고, 90%에 해당하는 1,350여 명은 그날 바로 가스실로 보내져 무참히 살해당했다. 살해당한 사람들은 대다수 노동력이 없다고 판단되는 ‘어린이, 여자, 노인, 몸이 불편한 사람, 아픈 사람’들이었다. 국가가 국민들을 지켜주지 않는다면, 역사는 되풀이될 수 있다. 국가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최우선 하지 않는다면, 외부 세력 및 타인에 의해 인간의 존엄성은 무참히 짓밟힐 수밖에 없다.
『죽음의 수용소』저자 빅터 프랭크는 노동력이 있는 150명 안에 들어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삶’을 얻을 수 있었다. 수용소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양심이 바닥까지 떨어진 사람들 사이에서 저자는 경이롭게도 남을 위해 정신과적 요법을 시행하며 치료를 하고 심지어 같은 수감자인데도 불구하고 죽어가는 수감자를 위해 목숨을 걸기도 했다. 국가가 나서서 지켜주지 못하는 ‘국민’ 또는 ‘사람’을 한 개인이 양심이 사라진 집단 내에서 어떻게든 양심의 끄트머리라도 붙잡고 다른 사람들을 살리려고 했다. ‘성자(聖子)’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성자’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내가 올해 이 책을 다시 읽었을 때, 나는 밥알을 오래 씹으면 씹을수록 단맛이 나는 것처럼 책의 한 문장 한 문장을 음미하며 읽었고, 어떤 문장에서는 한동안 다음 페이지로 넘기지 못하고 읽었던 구절을 계속 되새기며 생각했다. 250페이지 밖에 안 되는 책 한 권을 나는 거의 3일에 걸쳐 읽었다. 그리고 가슴에 새긴 것은 앞으로 삶을 살아내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나 세월호 같은 사고로 나의 생이 의문 부호로 가득 차게 되면 이 책을 꺼내 다시 읽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 어떤 희망도 꿈도 목표도 상실한 절망적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빅터 프랭크 박사는 대답한다.
“의미 없는 인생은 없다.”
상실의 슬픔을 나도 갖고 있다. 설명할 수 없고 설명되지도 않는 수많은 마음속 고통과 고뇌들을 짊어지고 하루를 건널 때마다 나는 순간순간 어두워지고 무력해지고 한없이 바닥으로 끌려들어 가는 거 같은 공포를 느낄 때도 있다. 과연 나의 존재 의미는 무엇인가? 나는 왜 살아야 하나? 나는 지금까지 너무 멍하게만 살아온 것이 아닌가? TV와 인터넷 속에서의 사람들은 마냥 행복하고 화려하고 환해 보이기만 하는데, 그에 비해 나는 너무 초라하고 무엇 하나 제대로 해놓은 것도 없이 밥만 축내고 있는 건 아닌가. 다른 사람들은 뭐든 척척 잘하고 사회에서 한 자리씩 차지해서 ‘하하 호호’ 하며 사는 거 같은 모습을 봤을 때, 홀로인 내가 세상의 무대 위에서 비참하게 쪼그라든 거 같은 생각이 들 때, 나는 이제부터 빅터 프랭크의『죽음의 수용소』를 펼치고 다음의 구절을 읽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루터기만 남은 일회성이라는 밭만 보고, 자기 인생의 수확물을 쌓아 놓은 ‘과거’라는 충만한 곡물 창고를 간과하고 잃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 수확물 속에는 그가 해놓은 일, 사랑했던 사람 그리고 용기와 품위를 가지고 견뎌냈던 시련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런 견지에서 본다면 나이 든 사람을 불쌍하게 여길 이유가 전혀 없을 것이다. 오히려 젊은 사람들은 나이 든 사람들을 부러워해야 한다. 물론 나이 든 사람에게 미래도 없고, 기회도 없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 이상의 것을 가지고 있다. 미래에 대한 가능성 대신 과거의 실체, 즉 그들이 실현시켰던 잠재적 가능성들, 그들이 성취했던 의미들, 그들이 깨달았던 가치들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세상의 그 어떤 것도 그 어느 누구도 과거가 지니고 있는 이 자산들을 가져갈 수 없다.」
『빅터 프랭크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빅터 프랭크 지음, 이시형 옮김. 청아출판사. p238. 2014)
나의 과거는 변하지 않고 변할 수도 없다. 나는 과거에 수많은 것들을 이루었고 또 도전해왔다. 물론 실패도 있고 좌절도 있고 절망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나는 거기서 주저앉는 게 아니라 잠시 머물고 망설이고 주춤하다 다시 일어서 걸었고 그러다 훌훌 털고 잊어버리기도 했다. 나는 태어났고 지금까지 열심히 살아왔으며 그 사이에 내 존재의 의미를 발견하고 그 의미를 발현시키기 위해 항상 깨어 있으려고 노력한다는 것을 알아챘다. 나는 무의미한 존재가 아닌 것이다.
나는 세상에 유일무이한 존재이며, 나를 대신할 수 있는 존재는 그 어디에도 없다. 그러니 나는 내게 주어진 운명대로 살아야 한다. 지금부터 내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고 해도, 과거에 내가 이루고 맺은 일들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영원불변하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길가에 핀 꽃도 생명이니 꺾지 않은 일, 개미들이 줄지어 가는 모습을 보며 발걸음을 멈추고 조심했던 일, 교통사고가 난 사람을 도와준 일, 친구의 비밀을 끝까지 지켜준 일, 지하철에서 어르신께 자리를 양보한 일,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내가 뻔히 손해 볼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문제 제기를 했던 일, 수입이 줄어들었어도 얼마 안 되지만 후원했던 단체에 기부를 계속했던 일, 매일 가는 마트 계산대에서 항상 밝게 인사하는 계산원 아주머니에게 음료수를 건넨 일…….
작고 소소한 일이었으나 나는 ‘존중’이라는 단어의 힘을 믿고 살아왔다. 그러니 나의 존재 의미는 과거의 내 삶이 충분히 나를 지탱해주고 있다는 것에서 찾을 수 있는 셈이다.
내가 존경하는 법륜 스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과 동시에 소중한 사람이며 괜찮은 사람이다.’
스님의 말씀처럼 내 존재가 길가에 수없이 핀 풀꽃이나 그 풀꽃은 살아있다는 것 자체로 이미 소중하며, 자기 스스로를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금 내가 괜찮다는 것이고, 스스로를 괜찮은 사람이라고 여기며 마음을 다스리는 것은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아닐까 한다.
때로는 책 한 권이 삶에 더할 나위 없이 큰 위로가 된다는 걸 다시 한번 깊이 깨달았다.
어렵지만, 나도 도전해보련다. 지금부터 도전하는 내 삶은 곧 과거가 되겠지만, 그 과거는 영원히 없어지지 않고 그 자리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를 보호해야겠다. 나를 쓸쓸하게 하고 외롭게 하는 모든 상황들과 거리를 두고, 나의 눈과 귀를 어지럽히며 쏟아지는 정보들과 떨어져서, 나의 존재 의미를 되새기고 내 안의 나와 더 깊은 대화를 나눠봐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