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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톡 생일 기능을 끄기로 했다

by 새내기권선생

학창 시절, 아마 고등학생 때였던 거 같다. 복도까지 시끌벅적한 소리가 새어 나오던 어느 날이었다.

“오~ 오늘 재헌이 생일이래!”

“야, 인마! 생일 축하한다!”

장난 섞인 몸짓과 격정적인 말투로 친구들이 한데 엉겨 붙어 재헌이를 축하해주고 있었다. 활기찬 생일 축하도, 그들의 끈끈한 우정이 어딘가 부러웠다.

나의 생일은 추운 겨울, 1월이다. 그리고 겨울 방학 시즌이기도 했다. 그래서 학우들에게 생일 축하를 제대로 받아본 기억이 없었다. ‘내 생일’이라 해봤자 엄마, 아빠, 동생이 작은 케이크 하나에 초를 켜는 게 전부였다. 속상했다. 방학에 생일이 있다 보니 친한 친구들마저도 종종 생일을 잊곤 했다. 개학해서 “방학 때 왜 내 생일 연락 안 했어?” 하고 묻자니 쪼잔했고, 무엇보다 이미 지나간 일이라 꺼내기도 민망했다.


그러던 내가 대학생쯤 되었을까. ‘카톡 생일’ 기능이 생긴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카톡이 드디어 일 냈구나!’ 여태껏 받지 못했던 제대로 된 축하를 받을 수 있겠구나 싶었다. 심지어 카톡 생일 기능은 나날이 발전해서 프로필에 귀여운 꼬깔콘을 씌워주기도 했고, 나중엔 생일인 친구들을 한 번에 모아보는 기능까지 생겼다.

아마 그때쯤이었던 거 같다. 아침에 카톡을 켜면 생일 친구를 확인하는 게 습관이 되었다. 그리고 친하지는 않지만, 모르는 척하기에는 왠지 모르게 찜찜한, 그런 ‘카톡 친구들’에게 선물을 주기 시작했다. 실낱같은 추억을 억지로 끄집어내며 식상한 축하 멘트와 함께, 작은 성의 표시를 했다. 일종의 ‘생일 보험’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기다리던 내 생일이 왔다. 예상대로 여러 생일 축하 카톡이 쏟아졌고, 많은 기프티콘과 선물이 카톡으로 쏟아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어딘가 찝찝했고 의문이 생겼다. '... 걔는 왜 안 오지?’

친하지도 않았으면서 내가 정성껏 챙겨줬던 몇몇 친구들의 선물을 내심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생일이 지나고 나서 미안하다며 연락 오는 친구도 있었지만, 연락이 아예 없는 친구가 더 많았다. 이제는 ‘방학이어서 몰랐겠지’ 하는 희망도 꿈꿀 수도 없었다. 생일을 공개적으로 알렸음에도 무시당한 것 같은 그 섭섭함은 상처로 남았다.

시간이 흐르자 문득 생일이라는 게 원래 이런 건가 싶은 회의감이 들었다. 선물을 수거하고, 내가 기대했던 선물이 없으면 기분이 상하는, 그런 날. 내가 ‘네 생일을 위해 공들여 탑을 지었으니, 네게 선물을 줬으니, 이제 돌려받을 차례’라는 무언의 압박 같은 그런 날이었던가. 비슷한 금액과 비슷한 형식적인 멘트는 덤이었다. 타인의 관심은 내 기대치를 키웠고, 결국 그 기대로 인해 내가 더 상처받는 악순환이었다.


결국, '나의 생일 기능 공개' 기능을 한 번 꺼보기로 했다. 절친한 친구들을 제외하고, 다른 친구들의 생일 알림은 선택적으로 무시하기 시작했다. 카톡을 켜면 여전히 생일 친구들이 새롭게 등장했지만, 나는 석연치 않은 마음으로 스크롤을 내렸다. 구태여 '친구 생일 보기' 기능 또한 껐다. 그렇게 또다시 내 생일이 왔다. 프로필에는 생일을 알리는 어떤 문구도 표시되지 않았다. 어딘가 허전한 마음이 들었지만, 영혼 없는 답장과 ‘의무감’으로 보내는 선물을 굳이 받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내가 진심으로 아끼고, 나를 진심으로 생각하는 친구들은 여전히 문자나 전화가 왔다. 무엇보다 그들의 문자나 목소리가 더 진심 어리게 다가왔다. ‘아, 이게 진짜 축하구나.’ 참 고마웠다. 생일 기능을 끄고 나서야 진정한 축하를 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결국, 내가 받고 싶어 했던 '타인의 관심'이 오히려 날 구속했고, 더 병들게 했다. 이 짧은 인생, 살면서 모든 사람을 어떻게 전부 신경 쓰며 살겠는가. 이제는 소중한 사람들 만큼이라도 진심으로 잘 챙기면서 살고 싶다. 카톡 생일 기능을 끈 후, 내 생일은 비록 조금 작아졌지만 훨씬 더 소중한 걸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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