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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바지를 입은 교사는 불쾌감을 주는가

by 새내기권선생

강당에서 체육 수업을 하는 날이었다. 여름 속의 강당은 아무리 에어컨을 틀어도, 습기가 많아 또 금세 더워졌다. 아이들과 함께 공을 던지고 뛰다 보면 온몸이 땀으로 가득 찼다. 긴바지가 땀으로 다리에 찰싹 달라붙었다. 반바지를 입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하지만 동료 선배 남자 교사 중에 반바지를 입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누군가 먼저 입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정작 내가 그 누군가가 될 용기는 없었다.

아이들을 집으로 보낸 뒤, 의자에 앉아 땀을 식히며 K-에듀파인(지방교육 행·재정 통합시스템)에 접속했다. 수업 준비를 하기 전에 접수된 공문부터 확인하는 게 루틴이었다. 마우스 스크롤을 무심코 내리다가, 한 제목에 시선이 멈췄다.

공무원 복장 간소화 관련 안내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순간 최근에 뉴스로 본 광명시의 "반바지 시즌" 정책이 떠올랐다. 광명시는 체감 온도를 낮추기 위해, 업무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전 직원이 자율적으로 반바지, 치마 등 편안한 복장으로 근무할 수 있게 했다. 광명시장이 앞장서 반바지를 입고 나서는 모습이 담긴 사진이 인상적이었다. 보수적인 공직 단체도 이렇게 변할 수 있구나 하고. 대기업은 이미 오래전에 달라졌다. 2008년 복장 자율화를 시작한 삼성전자는 2016년부터 반바지를 허용했다. LG전자(2018년)와 현대차그룹(2019년)도 자유로운 출근 복장을 허용하고 있었다.

부푼 기대감을 안고 떨리는 마음으로 공문을 클릭했다. 그런데 화면에 펼쳐진 내용은 기대와는 정반대였다.

□ 권장사항
○ 간소하고 단정한 복장 착용을 적극 권장
<간소하고 단정한 복장 예시>
‣상의 : 노타이 정장, 콤비, 니트, 남방, 칼라셔츠 등
‣하의 : 정장바지, 면바지 등
○ 넥타이는 계절에 관계없이 필요한 경우 외에는 착용하지 않도록 함
<넥타이 착용 필요한 경우 예시>
‣국회, 공청회 등 공식회의 또는 행사에 참석하는 경우
‣국(내) 외 손님 접견하는 경우
‣그 밖에 의정상 넥타이 착용이 반드시 필요한 경우 등

□ 협조사항
○ 지나치게 개성적인 복장 착용으로 공무원의 품위를 손상시키거나 근무기강이 해이해진 인상을 주지 않도록 유의
- 특히, 민원담당 공무원 등의 경우 단정하지 못한 복장으로 민원인에게 불편함을 주는 사례가 없도록 함

<바람직하지 않은 복장 예시>
‣지나친 개성 표출로 불쾌감이나 거부감을 줄 수 있는 슬리퍼, 반바지, 찢어진 청바지 등의 복장
‣과다하게 노출되거나 지나치게 화려한 복장 등

제목의 "복장 간소화"에 대한 내용이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생각하는 간소한 복장이 '정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이번 공문을 통해 더 정형화되었다. 복장 간소화가 아닌 복장 규율 강화였다. 가장 황당했던 건 '협조사항'이었다. 민원인에게 불편함을 초래하지 않기 위해 단정한 복장을 입어야 한다니. 2024년에 발송된 공문이 맞는지 날짜를 다시 확인했다. 결정적으로, 반바지는 '바람직하지 않은 복장 예시'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내용만으로만 보면, 20년 전인 2004년에 왔다고 해도 믿을 공문이었다.


'반바지 입어볼까?'

그날 밤, 침대에 누워 내일 무엇을 입을까 하고 고민했다. 한 번 용기를 내보려 했다. 하지만 공문에 명시된 '바람직하지 않은 복장'이라는 문구가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다. 누군가 지적하면 어떡하지. 아이들이 이상하게 생각하면 어떡하지. 누군가가 불편해하면 어떡하지.

'그냥 긴바지를 입을까?'

하지만 내일도 오늘처럼 덥다면. 또다시 땀에 찰싹 달라붙는 바지를 입고 하루를 보낸다면. 그건 너무 싫었다.

고민 끝에 옷장을 열었다. 그리고 하나를 꺼냈다. 그건 발목이 보이는 9부 바지였다.


다음 날 아침, 나는 9부 바지를 입고 현관문을 나섰다. 반바지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긴바지도 아니었다(라고 생각하고 싶다). 출근길 내내 생각했다. 선배들이 예전 교직 이야기를 종종 했었는데, 전에는 청바지조차 입을 수 없었다고 했다. 몇십 년 전에 선배 교사 중 한 분이 청바지를 입고 출근했다가 따가운 시선을 받았다고 했다.

교실에 도착해 창문을 열었다. 무더운 아침 공기가 교실 속으로 들어왔다. 훗날에는, "이상하게도 공직 사회에는 여름에 반바지를 안 입는 문화가 있었어" 하며 해프닝처럼 말하게 되는 날이 올 수 있을까. 창밖을 바라보았다. 여름 햇살이 아주 뜨겁게 운동장을 내리 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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