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노안이 찾아왔다.
예상했던 일이지만 당황스러웠다. 다른 사람들이 노안을 말할 때, 예쁜 돋보기안경을 찾을 때 난 아직 아니겠지 했다.
성경연구 모임에 나갈 때도 깨알 글씨의 성경책을 자신 있게 구입하고, 냉동피자 박스에 촘촘히 적힌 조리법도 척척 읽어내는 나의 눈들이 자랑스러웠다.
큰 사건은 일시에 터질 때도 있지만, 아무도 모르게 야곰야곰 들어와 어느새 일상을 차지해 버리기도 한다. 나중에 돌아보고 '아하!' 순간을 맞이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언젠가부터 어둑한 조명 아래 글씨를 쓰기가 어려웠다. 쓸 때는 모르다가 나중에 노트를 보면 가관이었다. 삐뚤빼뚤 글씨들이 노트 줄 여기저기를 마구 넘나들고 있었다. 어린 시절 친구들이랑 땅따먹기 놀이 할 때 석필로 땅에 그어놓은 금 안 밟기도 잘 지키고, 학교 다닐 때 선 밖으로 삐져나가게 색칠한 적도 별로 없는 나였는데, 이게 무슨 일이지 싶었다.
해가 지고 난 후의 운전도 불편해졌다. 아침엔 눈에 이물감이 느껴지고 시야가 흐릿했다.
무슨 병에 걸린 줄 알고 찾아간 의사한테서 얻은 답은 '노안'이었다. 안도와 동시에 느꼈던 풀 죽은 마음. 나이먹음이 구체적, 신체적 증상이 되어 보란 듯 자신을 드러내는 게 달갑지 않았다.
가까운 게 잘 안 보이는 건 데이케어 센터에서 일할 때 치명적으로 불편했다. 수시로 아이들의 개인 기록이나 아이패드를 들여다봐야 하고, 자신의 의사를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어린아이들을 늘 살피고 관찰해야 했기 때문이다. 교실에서 돋보기를 꼈다 벗었다 하는 것도 몹시 불편했다.
결국 보통 콘택트렌즈에서 다초점 콘택트렌즈로 바꿨다. 그러자 이번엔 멀리 있는 것들이 덜 보였다. 다초점 렌즈로 가까운 곳이 잘 보이는 대신 먼 곳을 보는 시력을 조금 양보해야 했다.
다초점 콘택트렌즈와 안경을 번갈아 사용하는 요즘, 예전보다 세밀하게 볼 수 없는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특히 집에선 보이는 만큼 일하게 된다. 곳곳의 먼지나 때가 좀 덜 보이면 좋겠다.
노안은 더 멀리 보라는 뜻이라고 한다. 나이를 먹었으니 앞을 내다보는 혜안을 가지라는 비유적인 말이다. 동시에, 눈앞의 작은 것들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는 메시지 같기도 하다.
그런데 글을 쓰는 나는 뭔가를 자세히 봐야 할 때가 있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나도 모르게 주변을, 사람을 더 꼼꼼히 보게 됐다. 그냥 보이는 것도 다시 한번 보게 되고, 보이지 않는 것도 보려고 노력하게 된다.
그러다 문득 든 생각 ⎯ 정말 대강 보며 살았구나.
대충 보고 글을 쓰려니 그만큼 자료가 빈약했다. 묘사도 할 말도 간신히 생각해 내기보다, 머릿속에 가득한 기억과 느낌들 속에서 골라 쓰고 싶어졌다. 한참 들여다보고, 사진을 찍어뒀다 다시 들여다보고, 깊이 느껴보려 했다.
그러면서 깨달았다, 자세히 보는 건 아픈 거구나.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의 잔주름과 흰 머리카락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마음이 약해진다.
남편의 처진 눈 주위와 흰 머리카락이 보이면 괜스레 미안해진다.
뉴스나 기사에서 누군가의 아픈 사연을 보면 가슴이 답답하다.
내 마음을 조용히 들여다보면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들이 보인다.
그게 아프다는 걸 은연중에 알아버렸던 걸까. 그래서 애써 자세히 보기를 피해 온 걸까. 똑바로 보지 못하고 곁눈으로 보며 숨어 왔는지도 모른다.
꽃을 보아도 호수를 보아도 하늘을 보아도, 세상 모든 것에 처절한 본연의 슬픔이 있다는 걸 알아간다. 그 맑은 슬픔의 자리에서 나비의 날갯짓 같은 희망을 볼 수 있다는 것 또한 알아간다.
자세히 보면 아픈 것들이 많다. 자세히 보려 해도 잘 안 보이는 것들도 있다. 자세히 보고 귀 기울여 듣고 마음 깊이 담아두는 건 아픈 일이다.
그러나 글을 쓰는 나는 아픈 것에서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 아픔을 넘어서면 무엇을 보게 될지 알고 싶은 끝없는 호기심과 들끓는 열망으로 자세히 보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육체의 눈으로는 예전보다 가까이 볼 수 없으나, 마음의 눈으로는 더 가까이 보기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글을 쓰며 세상과 연결되고 싶다.
그렇게 내가 쓰는 글은 아픔보다 소중함을 담을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