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훈련소이야기 8
훈련소 생활은 밤과 낮이 확연히 달랐다. 밤이 되면 그동안 쌓아둔 고민과 공부걱정이 밀려와 잠을 이루기 어려웠다. 하지만 낮이 되면 언제 우울했냐는 듯 즐기기에 바빴다. 나는 원래 어디서든 빠르게 적응하는 사람이었다. 특히 분위기에 휩쓸려 누구보다 잘 어울리는, 그러니까 잘 노는 사람이었다. 유난히 사람을 좋아하는 나에게 사람 가득한 훈련소는 놀이공원 같았다. 어딜 봐도 흥미로운 사람 투성이었다. 낯선 전공을 가진 사람, 신기한 경험을 한 이, 별난 재능을 가진 사람들까지. 개성이 강한 이들이 ‘해외 봉사활동’이라는 공동의 목적을 가지고 생활하는 것은 매일이 신세계 일 수밖에 없었다.
훈련소에 갔을 때 가장 힘들었던 것은 핸드폰 없는 삶이었다. 핸드폰은 꽤 큰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실시간 소통창구이자 내 사람들과의 연결고리였다. 나는 사람을 좋아하긴 하지만, 새로운 환경에서 낯을 많이 가리는 이중적인 사람이었다. 새로운 환경과 사람들 사이에서 적응하는 과도기가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그런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고 하던가. 핸드폰이 없으니 새로운 방식으로 소통하는 법을 찾아냈다. 외부사람들과는 공중전화와 이메일로 대신했다. 실시간으로 빠른 답장을 받을 순 없었지만, 아날로그식 연락은 그 나름대로 매력적이었다. 또 빈 공간과 단절된 시간은 새로운 사람들과의 시간으로 빼곡히 채워졌다. 낯을 가릴 틈도 없었다. 특수한 상황에서 얻는 초능력 같은 것이랄까. 그렇게 나는 훈련소에 익숙해져 갔다.
세상에는 생각보다 재미있는 것들이 많았다. 지금껏 이렇게 많은 것을 놓치고 살았다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놀거리가 사방천지에 널려있었다. 심심하다는 말이 나올 틈이 없었다. 이곳의 봉사단원들은 마치 그런 사람들만 골라 뽑은 것처럼 유독 해맑고 천진했다. 모두가 과하게 밝고 반짝거렸다. 이곳에서는 ‘열정’이라는 단어가 놀이에도 잘 어울렸다. 체육단원들이 유독 많아서일까. 쉬는 시간마다 1층 공터나 운동장으로 뛰어나가기 일쑤였다.
쉬는 시간만 되면 어김없이 치열한 승부가 벌어졌다. 탁구, 배드민턴, 족구까지. 얌전히 앉아있질 못하고 짧은 시간에도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쪼르르 계단을 내려가 땀범벅이 되어 돌아오곤 했다. 앞으로의 미래를 고민하며 배운 것을 복습하고, 현지어 공부를 했더라면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시간을 쌓아두었다면, 밤마다 화장실에서 몰래 나머지 공부를 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낮에는 그런 생각이 하나도 들지 않았다. 쉬는 시간을 그냥 보내면 큰 잘못을 저지르는 느낌이 들었다.
훈련소에서 정말 다양한 구기종목을 배울 수 있었다. 배드민턴 정도는 쳐본 적이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동네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곳의 배드민턴은 약수터에서 치는 느긋한 그것과는 달랐다. 탁구, 족구, 피구까지. 익숙한 운동도 이곳에서는 전혀 새로운 운동같이 느껴졌다. 이렇게 많은 규칙과 전략이 있는 줄은 몰랐다. 게다가, 초심자라고 봐주는 법도 없었다. 체육단원들은 냉혹했다. 실수할 틈도, 어리다는 변명도 통하지 않았다. 그렇게 몰아붙이는 그들 사이에서 독하게 배웠다. 덕분에 빠르게 실력이 늘었고, 내 승률도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학창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 쉬는 시간만 되면 훈련소 이곳저곳을 열심히 뛰어다녔다. 조용히 앉아 있던 적이 없었다. 역시 얌전하고 진지한 것은 나와 잘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주말은 더 활기찼다. 외박이 있는 주말에는 유독 더 시끄러웠다. 고작 하루, 다른 공간과 시간을 보냈는데, 밀린 일상을 나누느라 난리가 났다. 마치 몇 년 만에 재회한 것처럼 떠드느라 시간이 부족했다. 부산에 집이 있는 친구는 훈련소 근처 마트에서 간식을 몰래 사 왔다. 어떤 사람은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다가 이곳이 생각나 일찍 돌아오기도 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낯선 사람들이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작은 일 하나에도 도란도란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우리’라는 말이 익숙해졌다. 특별한 것을 하지 않아도, 그저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서로가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때 처음 알게 되었다.
외박이 없는 주말도 나름대로 시끌벅적했다. 처음에는 늘 ‘이번에는 제대로 공부를 하자’며 만났다. 같은 공간에 모여 각자 다른 현지어 교재를 펼치고, 잠시 집중을 했다. 하지만 곧 ‘내 현지어가 더 어렵다’는 투덜거림이 시작되었다. 그렇게 공부시간은 빠르게 끝났다. 매번 어떻게 그렇게 같은 패턴인지 모르겠다. 펼쳐두었던 교재는 덮고 보드게임을 펼쳤다. 그리고 게임판을 보며 파견 지를 미리 상상하기도 했다. 주사위 몇 번에 파견지에 도착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아무리 굴려도 파견지에 가지 못했다. 호락호락하게 도착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게임판에 없는 국가가 더 많았다. 서로를 놀리며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텅 빈 강의장들은 훌륭한 영화관이 되었다. 불만 끄면 어두워지는 작은 공간, 도서관에서 빌린 DVD, 컴퓨터, 빔프로젝터까지 있으니 충분했다. 강의장 몇 개에서 각기 다른 영화가 상영되자, 훈련소가 멀티플렉스로 변했다. 그날만큼은 책상 위에 마음껏 걸터앉아 편안하게, 다리를 뻗고 편안히 즐겼다. 무슨 영화를 봤는지 제목도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날의 공기, 책상에 걸터앉아 있던 감촉, 같이 화면을 보며 속닥거리는 소리, 화면을 보며 설레는 마음은 손에 만져지는 것 같다.
물론 주말에도 예외는 없었다. 우리만의 치열한 경기는 계속되었다. 심지어 지나가는 교관님까지 붙잡아 함께 뛰었다. 그동안 맺혔던 불만을 경기로 풀어보려고 했지만, 교관님들은 운동도 잘했다. 별의별 전략을 짜봤지만, 단 한 게임도 이기지 못했다. 주말마다 가장 인기 있는 경기는 탁구였다. 다양한 조합으로 팀을 짜 복식경기를 펼쳤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초보자들을 배려해 준 경기 방식이었던 것 같다. 한바탕 열심히 뛰고 나면 어느새 해가 지고 저녁이 되었다. 하고 싶은 걸 마음껏 하고 맞이하는 저녁은 아쉽지 않았다. 일정이 없는 주말은 늘 시간이 충분했다. 충분해서 더 특별했다.
지루하기만 했던 일정표에 기대를 하며 별표를 해둔 날이 몇 개 있었다. 그중에 하나가 체육대회날이었다. 어린 시절 운동회를 이런 마음으로 기다렸을까. 그날은 버스를 타고 이천에 있는 다른 교육원으로 갔다. 어떤 기준인지 모르겠지만, 빨강, 노랑, 초록, 파랑 네 개의 팀으로 나뉘었다. 아침까지만 해도 화기애애하던 사람들이 팀이 정해지자 눈빛부터 달라졌다. 우승팀에게 특별한 보상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다들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다. 티볼도 하고, 발야구도 하며 하루 종일 뙤약볕에서 뛰어다닌 덕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온몸이 땀범벅이 되도록 열심히 했지만 내가 속한 팀은 결국 꼴찌를 하고 말았다. 그러나 순위는 상관없었다. 뒤에 남아있는 일정도, 해야 할 공부도, 시험도 없었다. 마음껏 뛰어노는 시간이 오랜만이라 더 좋았다. 아무 생각 없이 실컷 웃고 즐긴 것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주위를 둘러보니 모두가 똑같이 즐기고 있었다. 괜히 안심이 된다. 나잇값을 못한다는 잔소리도, 철없다며 손가락질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동안 쌓였던 압박과 고민이 날아가는 느낌이었다. 이래서 체육대회를 여는 걸까.
훈련이 끝나갈 무렵, 마지막 일정으로 단체 산악 훈련이 예정되어 있었다. 무작위로 조가 정해졌다. 조별로 구호와 깃발도 만들었다. 개인번호표도 배부되었다. 어디로 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야외활동을 간다는 것이 마냥 신났다. 마지막이 다가온다는 아쉬움보다 하루하루의 감정이 더 크게 다가올 때였다. 노는 건 늘 옳으니까.
설레서 방방 뛰다가, 아침 기상음악이 울리기도 전에 벌떡 일어났다. 입소식 때 나눠준 백팩에 이것저것 넣고 강당으로 향했다. 우리 기수의 운동복 겉옷은 연두색이었는데, 모여있는 모습이 이끼 같기도, 배추벌레 같기도 했다. 모두 같은 운동복과 가방을 메고 있는 것이 퍽 귀여웠다.
줄을 맞춰 강당을 나섰다.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아침운동은 비가 와도 가니까, 이번에도 그냥 가겠거니 했다. 그러나 행렬이 멈췄다. 비가 많이 내려 위험하다는 이유로 산악훈련이 취소되었다는 것이다.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뒤를 돌아 쪼르르 줄을 따라 강당으로 돌아왔다. 예상치 못한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아쉬운 마음에 가방도 내려놓지 않고, 앞뒤에 단 번호표도 그대로 둔 채, 깃발을 들고 사진을 찍었다. 마치 산악훈련을 다녀온 것처럼. 평소 같았으면 체육관으로 달려 내려가거나, 밀린 잠을 자러 뛰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날만큼은 아무도 강당을 떠나지 못했다. 모두가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마지막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정말 아쉬웠던 건 산악훈련이 취소된 게 아닐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