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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풍선껌 May 12. 2023

2. 모르고 먹는 따뜻한 맛, 스프 카레

 삿포로역에 도착해서 미리 구매한 JR 홋카이도 열차 패스까지 받고 나니 어느새 시간이 오후 5시가 되었다. 비가 많이 쏟아졌고 날이 어두웠다. 호텔까지는 역에서 1.5km 떨어져 있었는데, 대중교통을 타더라도 많이 걸어야 되는 경로여서 그냥 걷기로 했다.      


 그 날의 기온은 10도를 조금 넘었는데 찬 비바람이 몹시 세게 불어서 코트를 입고 있었음에도 체감으로 훨씬 추웠다. 한 손에는 바람에 뒤집힐 것 같이 약한 3단 우산을, 다른 한 손에는 기내용 캐리어를 끌고 1.5km를 걸었다. 모르는 길은 아는 길보다 더 멀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삿포로를 떠날 때쯤에야 안 사실인데 삿포로역에서 오도리까지 대략 1km 정도 지하보도로 연결되어 눈과 추위를 피할 수 있다고 한다.     

 

 “저, 체크인을 하려고 하는데요.”

 카운터에 있던 직원은 웃으며 내게 여권을 보여달라고 했다. 그러더니 이내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다. 

 “손님, 혹시 예약하신 게 맞으실까요?”

 나 또한 당황했으나 당당하게 아고다앱을 열어 예약 내역을 보여주었다. 

 “손님, 여기는 도큐 스테이 삿포로 오도리입니다.”

 맵에 뜬 지도와 내가 예약한 내역을 비교해 보았다. 내가 예약한 호텔은 도큐 스테이 삿포로, 내가 지도로 찾아간 곳은 도큐 스테이 삿포로 오도리였다. 나는 그저 지도에 도큐 스테이를 쳤을 뿐이고 가장 상위로 검색 추천에 뜬 것을 눌렀을 뿐이었다. 같은 지역에 같은 체인의 호텔 두 개가 있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하... 얼마나 걸릴까요? 좀 피곤하네요.” 

 다른 호텔까지 걸어갈 힘이 있을지 싶었다. 택시를 탈까 하다 의외로 500m밖에 되지 않아 다시 걸었다.    

  

 그렇게 호텔에 도착하고 나니 어느새 6시 즈음이 되었고, 너무 피곤하고 무엇보다도 배가 상당히 고팠다. 너무 지쳤기 때문에 멀리 나갈 생각도 없었고 애써서 맛집을 찾아갈 생각도 없었다. 지도앱을 열어 호텔에서 가장 가까운 식당 중 평이 그나마 가장 높은 곳을 찾으니 호텔 바로 길 건너에 스프 카레집이 나왔다. 카레가 썩 취향은 아니지만 일본 카레가 유명하니 그래도 먹어보자고 생각했다.      


 “이랏샤이마세(어서오세요)”     


 테이블 7개 정도가 있는 아주 크지도, 작지도 않은 크기의 아늑한 분위기의 식당이었다. 이른 저녁 시간이어서인지, 비가 와서인지 손님이 나밖에 없었다. 평이 좋은 식당이라 사람이 많을 줄 알았는데 아무도 없어서 약간 당황했으나 오히려 좋았다. 직원이 내게 메뉴를 주고 일본어로 무어라 말을 했는데 내가 알아들을 리 없어 쭈뼛거리니 내게 어디에서 왔느냐고 영어로 묻더니 한국어로 된 메뉴를 가져다주었다. 다만, 번역기를 썼는지 해석이 몹시 어색해서 오히려 사진이 있는 일본어 메뉴를 내가 번역기로 다시 번역하는 편이 나았다. 

 카레의 종류와 그에 따른 맵기 정도, 밥의 양 등 온갖 옵션들이 많아 혼란스러웠다. 그러던 중 영어를 몹시 잘하는 40대 초반 정도 되어 보이는 여직원이 와서는 메뉴에 대해 설명해 주고 내가 주문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렇게 주문을 하고 기다리고 있는데 내 오른쪽 옆 테이블로 젊은 여자 손님이 한 명 와서 마치 단골인 것처럼 능숙하게 주문을 했다. 얼마지 않아 중년의 남자 손님 한 명이 내 왼쪽 옆 옆 테이블에 앉아 마찬가지로 능숙하게 주문을 했다. 또 얼마지 않아 5살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와 엄마, 할머니가 내 오른쪽 옆 옆 테이블에 앉아있다가 아이가 떼를 쓰자 식당 직원들에게 몹시 미안해하며 밖으로 나갔다. 난 그대로 가버린 줄 알았는데 아이를 진정시키고는 다시 들어와서 주문을 했다. 


 사람들을 관찰하며 정신이 팔려있던 때에 주문했던 스프 카레가 나왔다. 삿포로 여행을 준비할 때 오로지 호텔, 홋카이도 열차 패스, 방문 장소 등만 검색했을 뿐 음식에 대해 따로 검색을 하지 않아서 나는 스프 카레가 뭔지 그날 처음 알았다. 그리고 나중에 시간이 지나서야 삿포로에서 스프 카레가 매우 유명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졸지에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유명 음식을 먹게 된 셈이었다.      


 감자, 호박, 양파, 당근, 양배추 등의 야채가 들어가 있었고 카레로 맛을 낸 걸쭉하지 않고 맑은 스프가 뚝배기에 담아 나왔다. 그 위로는 삶은 달걀 반 개가 얹어있었고, 닭 튀김이 따로 접시에 나왔다. 스프 한 숟갈을 떠서 홀짝이니 살짝 매콤하면서도 살면서 처음 먹는 맛있는 카레맛 스프였다. 그냥, 아주 맛있었다. 너무 춥고 피곤해서였는지, 아늑한 분위기 덕분인지 더 맛있게 느껴졌다. 아니면 전혀 기대하지 않았는데 그 이상의 맛이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스프 카레는 국물까지 완전히 비웠지만 닭 튀김은 너무 배가 불러서 다 먹지는 못했다. ‘삿포로에서의 첫 끼니인데 정말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는 말을 전하고 나와 우산을 펴고 식당에서 200m도 되지 않는 거리의 TV타워 전망대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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