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음도 건강도 영원하지는 않지
그러니까 내가 36세가 되던 해 2월에 있던 일이다. 중년으로 넘어가는 통증이었을까. 여동생의 권유로 처음 받았던 건강검진에서 갑상선암이 의심된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건강에 대해서는 언제나 자신감이 있었다. 일단 잘 먹고, 잘 잤다. 잘 아프지도 않았지만, 아파도 하루만 푹 자면 금방 회복했기 때문이다. 괜히 시간 내서 병원에 왔다고 생각할 정도로 검사 결과는 언제나 깨끗했고 문제도 없었다. 30대가 넘어가자 여기저기에서 누가 누가 아팠다는 말이 들려왔지만, 역시 크게 와닿지는 않았다. 나는 건강하고, 또 언제나 건강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영화 <비긴 어게인>의 OST 중에 ‘Lost Stars’라는 노래를 좋아한다. 특히 젊음은 왜 항상 젊은이들에게 낭비되는 것인가라고 묻는 가사 말이다. 존재만으로도 찬란한 시절에 우리는 삶의 정답을 찾아 헤매어야 하고,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한 채 방황한다.
“God, tell us the reason youth is wasted on the young.”
내 꿈이 뭐냐고 물으면, 언제나 나는 지난날을 후회하지 않는 할머니가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한참 신경과에서 치매검사를 할 때, 나는 많은 어르신들을 만났다. 어떤 어르신들은 당신들의 삶을 돌아보며, 힘들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힘든 일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하셨다. 얼마 남아있을지 모르는 죽음을 기다리며 묵묵히 머릿속의 사진*들을 분류하고 정리하는 것처럼 보였다. 수없이 많은 사진들을 보며, 용서할 일은 용서하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떠나보낼 것은 떠나보냈다. 그러고는 나름의 의미를 사진에 적어 앨범에 차곡차곡 쌓아두는 것 같았다. 그분들은 얼굴에서도 여유롭고 평온한 느낌이 났다. 내 인생도 꽤 괜찮은 삶이었다고. 그렇게 에릭슨이 말한 마지막 발달과업**을 끝내 가고 있었다.
하지만 어떤 어르신들은 그렇지 못했다. 검사실의 문을 열고 들어올 때부터 언짢은 것처럼 미간에 주름이 깊게 잡혀 있었다. 검사 결과를 산출하기 위해서는 연령, 성별, 학력 등의 기본 정보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리고 그 시절 많은 어르신들이 지금처럼 충분한 교육을 받지 못하셨다는 것도 십분 이해한다. 그래서 혹시라도 기분이 상하실까 걱정하며 조심스럽게 여쭤보았는데, 많은 어르신들이 “학교는 어디까지 다니셨어요?”라는 짧은 질문에도 몹시 역정을 내셨다. 쉬운 것을 물어보면 무시하느냐며 화를 내셨고, 어려운 문제가 나오면 나를 정신병자 취급하느냐며 화를 내셨다. 학교를 다니지 못했던 것을 시작으로 당신의 억울한 삶에 대해 쏟아내듯이 말했다. 사소한 자극이 인생 전반에 대한 불행감으로 불같이 번지는 모습을 보았다. 과거에 하지 못했고, 할 수 없었고, 어쩔 수 없었던 일들로 인해 80년이 넘는 세월이 통째로 비참해지는 그 모습을 보았다. 슬픔과 분노가 뒤섞인 복잡한 그 감정을 어떤 단어로 표현해야 할까. 어르신들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다가오고, 또 어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려워 보였다. 죽음을 불안해하면서도 억울함과 원망만 가득한 말들만 내뱉었다. 스스로에게 무의미한 지난 시간들만큼 남은 시간들 또한 무의미해 보였다.
그래서 언제나 나는 죽음이 가까워졌을 때 후회하지 않았으면 싶었다. 하지만 난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많은 행복과 중요한 것들을 미루면서 살았다. 매 순간 열심히 살아온 것에 대해 후회는 하지 않겠지만,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중요했던 것들. 이를테면 제시간에 밥을 먹고 잠을 자는 일,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즐겁게 운동하는 일, 몸에 좋은 재료로 음식을 만들어 먹는 일,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행복하게 시간을 보내는 일들 말이다. 이 모든 것들을 충분히 누렸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난 정말 그렇게 살아왔고, 그렇게 살아가고 있을까?
지금도 이 노래를 들으며 글을 쓰고 있다. 젊음이 나에게는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어리석은 젊음을 돌아보며.
(계속)
* 자서전적 기억autobiographical memory은 한 개인이 경험한 일들에 대한 기억이다. 한 시점에 특정 장소에서 겪었던 에피소드들이 기억으로 저장된 것이다. 마치 사진을 보면 그날의 느낌, 감각, 감정들을 다시 떠올릴 수 있듯이 우리는 자서전적 기억을 통해 추억을 되새기는 것이다.
** 에릭슨은 심리사회적발달이론에서 마지막 8단계의 발달과업을 '죽음에 대한 수용'이라고 했다. 죽음을 직면하면서 자신을 돌이켜보고, 인생을 의미 있는 방향으로 통합하는 것이 우리가 삶의 마지막 시점에서 해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