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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비 Jun 29. 2024

거리감

아홉 번째 편지. 오늘과 내일, 그 곳과 이 곳

기억력이 좋지 않다보니

오래된 시가

하나의 온전한 형태가 아닌

몇 구절만 남아 떠다닐 때가 많다.


예를들어

박재삼의 「울음이 타는 가을 강」같으면

'마음도 한 자리에 못 앉아있는 마음'이나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 같은

말들만 떠다니다

멋대로 계기도 없이

쿵 하고 마음벽에 부딪히곤 한다.


특히 저 시는 왜 그런지

'저것 봐, 저것 봐' 가

늘 귀를 쟁쟁 울려대는데

대체 그들은 무엇을 보았을까 하여

난 내가 보았던

타는 하늘의 기억들을 뒤적거려보지만

정확히 그 강가를 거닐어 본 일이 없어

어떤 하늘인지는 알 길이 없다.


하필 또 저 시는 제목부터가

'가을 강'이어서

오늘처럼 빈틈 없는 여름에는

그 정취를 흉내내보려고

에어컨을 가을 온도로 낮춰보아도

도무지 되지 않는 것이라서,

나란 놈은 왜 이 여름에

가을 강 생각을 하고 앉았는 것인지

내 속인데 속을 알 길이 없다.


꼼짝없이 기다리는 것 말고는

도무지 답이 없는 저 가을 강.


난 또 글을 쓰며 생각한다.


이야기는

이제 고작 25페이지를 지나가는데,

적어도 200페이지는 지나가야

그나마 글입네 할 텐데,

무슨 레 미제라블을 쓰는 것도 아니면서

왜 이리 고단하고 고민스러운지

과연 이 이야기에

200페이지가 있기는 한지

그때까지 난 이 모니터 앞에

버티고 앉아있을 수는 있는 것인지

그때까지 내가 만날 계절과

그때까지 날 때리고 갈 소리와

그때까지 내가 잃어버려야 할

바람들을 생각한다.


이야기를 쓰는 일이

가을 강을 기다리는 일이면

얼마나 좋을까.


커피나 내리자.


이걸로 오늘 하루 5잔 째,

아직 속은 쓰리지 않다.


2024. 06.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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