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곽한솔 Sep 12. 2023

<창경궁> 힐링 탐방기 1편

홍화문~옥천교~명정문~명정전~문정전

<궁궐로 떠나는 힐링여행 : 창경궁> 책 읽고 창경궁 탐방하기!


https://brunch.co.kr/@greatpine7/124

https://brunch.co.kr/@greatpine7/133


서울 "궁궐" 탐방기, 덕수궁에 이어 두 번째로 탐방한 궁궐은 바로 창경궁이다. 덕수궁 탐방과 마찬가지로, 대규모의 경복궁과 창덕궁 보다는 궁궐입문자에게는 상대적으로 작은 궁궐을 먼저 탐방하는 것이 좋다는 판단이다. 이는 단순히 다소 가벼운 마음으로 탐방이 가능한 점 외에도, 작은 궁궐을 탐방을 통해 기본적인 배경지식을 차근차근 쌓은 다음 큰 궁궐로 갔을 때 비교하는 재미가 더 클 것이라는 점도 작용했다.

너럭바위 위 계단에서 본 전경 : 영춘헌(좌), 환경전(중), 양화당(우)
함인정 일대 전경


<궁궐로 떠나는 힐링여행 : 창경궁> 도서를 역시나 먼저 읽었는데, 확실히 경복궁~창덕궁~창경궁~덕수궁 순으로 도서가 나왔고 그러한 관점으로 본 저자 이향우 작가의 생각과 나의 생각은 많이 달랐다. 우선, 궁궐입문자로서 나에게 창경궁도 결코 작게 느껴지지 않았다. 위 책에서는 경복궁-창덕궁과 비교했을 때 각 전각들이 "옹졸" 혹은 "옹색"하다는 표현이 많이 들어갔는데, 덕수궁만 제대로 탐방해 본 나에게는 전혀 공감가지 않은 표현이었고 실제 탐방 후 느낀 점도 그랬다.


 장희빈과 사도세자의 비극적인 이야기의 무대였으며, 일제에 의해 동.식물원으로 조성되는 등 수난을 겪은 창경궁이었지만, 글쎄 그 이야기를 알고 갔음에도 그렇게 비극적인 느낌은 들지 않았고 행복함과 힐링 가득한 느낌만을 받을 수 있었다. 또한 모르고 갔을 때 덕수궁 하면 석조전과 미술관을 떠올랐다면, 창경궁은 딱 한번 들어가 봤을 때 오직 대온실과 춘당지에만 가봤었기에 정말 무지하게도 창경궁 하면 이 두 곳만 생각났었다. 이번 탐방을 통해 역시나 많은 것이 보였는데, 또 서설이 길었다. 초보 궁궐입문자가 느낀 창경궁 힐링 탐방기, 이제부터 시작해 보겠다!

창경궁은 성종 14년(1483)에 세조비 정희왕후, 예종비 안순왕후, 덕종비(추존왕) 소혜왕후 세분의 대비를 모시기 위해 옛 수강궁터에 창건한 궁이다. 수강궁이란 세종 즉위년 1418년, 세종이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의 거처를 위해서 마련한 궁이다. 창경궁은 창덕궁과 연결되어 동궐이라는 하나의 궁역을 형성하면서, 독립적인 궁궐의 역할을 함과 동시에 창덕궁의 모자란 주거공간을 보충해 주는 역할을 하였다. 성종대 창건된 창경궁은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으로 모든 전각이 소실되었고, 광해군 8년(1616)에 재건되었다. 그러나 인조 2년(1624) 이괄의 난과 순조 30년(1830) 대화재로 인하여 내전이 소실되었다. 화재에서 살아남은 명정전, 명정문, 홍화문은 17세기 조선시대 건축양식을 보여주며, 정전인 명정전은 조선왕궁 법전 중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 국보 1점 : 명정전 / 보물 7점 : 홍화문, 명정문 및 행각, 옥천교, 통명전, 풍기대, 관천대, 팔각칠층석탑 / 등록문화재 1점 : 대온실






1. 서울대학교병원 : 경모궁 터와 창경궁 전경

창경궁 맞은편에 위치한 서울대학교병원에는 사도세자의 사당인 경모궁 터가 있다. 책 안 읽어 봤으면 정말 오래도록 몰랐을 사실. 그래도 정말 빈 터만 있는 것은 아니고, 기단과 경모궁 정문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많은 것이 사라진 상황이어서 그런지, 창경궁 안에서는 못 느꼈던 감정, 오직 이곳에서는 사도세자의 비극적 삶이 떠올라 마음 한편이 시리더라.


 이를 지나, 창경궁에서 가장 가까이에 있는 병원 건물에 들어갔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갈 수 있는 가장 높은 층까지 그저 앞만 바라보고 올라갔다. 왜냐고? 창경궁을 내려다보기 위해서였다. 창경궁이 도로가 바로 인접해 정문 전경 사진을 찍으려 하면 자동차들이 방해하니 사진 찍기가 참 어려웠는데, 그래도 조금 높은 지대에서 창경궁의 대표 전각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듯한 전경을 보고 사진 찍을 수 있어서 참 좋았다. 기왕에 창경궁에 가신다면, 바로 인근의 서울대학교병원에서 경모궁 터와  창경궁 주요 전각들의 전경을 보고 가시기 바란다.



2. 홍화문 그리고 선인문, 월근문, 집춘문

통상 궁궐의 정문은 남향이지만, 창경궁의 정문 홍화문은 지세에 맞혀 동향이다. 홍화문과 같은 라인, 즉 대로변에는 홍화문의 왼편에는 선인문, 오른편에는 월근문과 집춘문이 있다.


홍화문(弘化門)

창경궁의 정문으로 홍화(弘化)는‘조화를 넓힌다’, 즉 덕을 행하여 백성을 감화시키고 널리 떨친다는 뜻이다. 창경궁 창건 당시에 처음 건립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16년(광해 8)에 재건된 건물이다. 홍화문은 국왕이 직접 백성들을 만났던 곳이기도 하다. 영조는 1750년(영조 26)에 균역법을 시행하기 전에 홍화문에 나가 양반과 평민들을 만나 균역에 대한 의견을 들었다. 정조는 1795년(정조 19)에 어머니 혜경궁의 회갑을 기념하여 홍화문 밖에 나가 가난한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었고, <홍화문 사미도(弘化門 賜米圖)>라는 기록화에 그 모습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홍화문은 임진왜란 때 화재 소실 후 1616년에 복원, 즉 궁궐의 정문 중 가장 오래되었다. 그래서였을까? 확실히 뭔가 관록이 느껴졌고, 좌우에 지붕의 용마루가 ‘十’ 자 모양으로 된 집인 '십자각'이 있어 위엄 있어 보였다. 경복궁에 동십자각 하나만이 그것도 홀로 동떨어져 있는 것과 비교되는 대목이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홍화문이 내게 특별하게 다가왔던 것은, 영조가 균역법에 대한 찬반 여부를 직접 물었던 곳,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 씨의 회갑을 기념하여 백성에게 손수 쌀을 나누어 준 곳이 바로 홍화문 앞이었기 때문이었다. 백성과의 소통과 교류의 장이었던 홍화문. 요즘 시대에도 이러한 소통과 교류의 장의 역할을 하는 홍화문과 같은 장소가 많이 생겨났으면 한다.


선인문(宣仁門)

선인(宣仁)은 ‘인을 널리 펼친다 ‘는 뜻이며 홍화문에서 이어진 궁 담장의 남쪽 곧 창경궁 동남쪽 담장에 있는 궁문이다. 이 문은 성종 때 처음 세워졌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고, 광해군 때 재건되지만, 1857년(철종 8)에 다시 소실되었다. 현재의 문은 고종 연간에 재건한 것으로 보인다.『동국여지비고』에 의하면 이 문의 예전 이름은 서린문(瑞燐門)이며, 동궁(東宮)의 정문으로 조정의 신하들이 출입하였다.

 왕세자가 머무는 동궁의 정문이자, 신하들이 주로 출입한 선인문은 늘 열려 있어서 가장 분주하게 사용되었다 한다.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쫓겨났던 문이며,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곳이 바로 선인문 안마당이다. 지금 선인문 안마당에는 오래된 회화나무가 있다. 이 고목은 사도세자의 비극적 현장을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월근문(月覲門)과 집춘문(集春門)

월근문

홍화문 북쪽의 월근문은 '매달 뵙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정조가 부친 사도세자의 묘인 경모궁에 수시로 참배하기 위해 만들어졌고 참배 시 반드시 이 문을 경유했다고 한다. 바깥에서 본 월근문,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결코 초라해보지 않는 그런 느낌을 주는 문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지금도 사라진 경모궁의 터를 바라보고 있다.


  집춘문의 집춘(集春)은 ‘봄의 기운을 모은다’라는 뜻이며 창경궁 동북쪽 담장에 있는 궁문으로 서울 문묘가 마주 바라보이는 곳에 있다. 『동국여지비고』에 의하면 이 문은 후원의 동문으로, 성균관 서쪽과 제일 가까워 국왕들이 성균관으로 나갈 때에는 이 문을 경유하였다 한다. 현재 이 문 외부 지역에 민가가 들어서 있어 출입문으로는 사용하지 않고 있고, 오늘 탐방 때 집춘문까지 가보지는 못했다.



3. 옥천교와 명정문

창경궁의 정전 '명정전'으로 가기 위해서는 영천교를 건너 명정문을 통과해야 한다. 물론, 우회해서 들어갈 수도 있지만은.


옥천교(玉川橋)

1484년(성종 15)에 건립된 것으로 '구슬과 같은 맑은 물이 흘러간다'하여 옥천교라 하였다. 응봉산의 명당수가 창덕궁의 존덕정을 지나 창경궁의 북쪽 춘당지를 거쳐 옥천교로 흘러 남쪽으로 흘러간다. 궁궐에 남아있는 다리 중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다리 양쪽 아래에 아치(무지개) 모양 사이에는 도깨비 얼굴의 귀면이 조각되어 있는데, 이것은 물길을 타고 들어오는 귀신을 쫓아내어 궁궐을 보호하고 수호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천교는 1484년에 완공된 이후 딱히 무너짐으로 인한 중건공사 없이 원형의 형태로, 즉 500년 이상을 유지해 온 말 그대로 보물이다! 다른 궁궐들의 다리 아래로 지금은 물이 흐르지 않는 반면 옥천교는 저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물이 역시 500년 이상 흐르고 있다. 가히 창경궁의 '시그니처'지점이다. 시기 탓이었을까, 사진으로 본 것보다 물이 얕아 다소 아쉽긴 했다. 매화와 살구나무 피는 봄의 옥천교가 그 아름다움의 절정에 이른다고 하니 내년 봄에 꼭 다시 와보려 한다.


옥천교에서부터 물길 따라 춘당지까지 가는 숲 속 길은 또한 창경궁의 대표 힐링길이다. 그래서 이날  옹기종기 모여있는 주요 전각들을 본 다음 다시 옥천교로 돌아와 춘당지로 향했다.

 흐르는 물소리 등 자연의 소리를 들으면서, 맑은 공기 들이마시며 걷는 그 기분은 내가 한양도성 남산 구간에서 느낀 것과 같이 마치 천국 길을 걷는 기분이었다. 당연히, 천국 길을 걸어본 적은 없지만, 이런 길일 것이란 말이다.


명정문(明政門) 및 행각(行閣)

홍화문보다 안쪽에 놓여 중문의 기능을 갖는 평삼문이다. 위치로 보아서 명정전의 동서 중심축선상에 정확히 놓이지 않고 남쪽으로 약 1.2미터 벗어나 있다. 문의 좌우에 연결된 동행각을 어느 정도 명정문에 맞추어 배치하였기 때문에, 이에 의하여 둘러싸인 명정전의 중정(中庭)은 정확한 방형이 아니고 기울어져 있다.
명정문에서 본 명정전 / 명정전에서 본 명정문

홍화문과 명정문 그리고 다음에 나오는 명정전까지는 다행히 임진왜란 이후 재건된 다음부터는 소실되지 않고 자리를 지켜왔다고 한다. 서두에 밝혔듯 나는 경복궁이나 창덕궁이 아닌 먼저 탐방한 덕수궁과 비교를 하다 보니, 그 둘레의 행각의 존재에서부터 명정전까지의 넓이측면에서 규모도 컸으며 매우 웅장하게 보였다. 역시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4. 명정전(明政殿)

창경궁의 으뜸 전각인 정전(正殿)으로, 명정(明政)이란 ‘정사를 밝힌다’라는 뜻이다. 국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과거시험, 궁중연회 등의 공식적 행사를 치렀던 장소이다. 인종이 1544년(중종 39) 이곳에서 즉위했으며, 1759년(영조 35) 6월 66세의 영조가 15세의 정순왕후를 맞이하는 혼례가 치러지기도 했다. 1484년(성종 15)에 창건되어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16년(광해 8)에 재건되어 현재에 이르니, 현존하는 조선 궁궐의 정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명정전 건물 내부에는 국왕이 앉았던 용상이 있고, 그 뒤에는 ‘일월오봉병’이라는 병풍이 있다. 해와 달은 국왕과 왕비 또는 양과 음을 상징하고, 다섯 봉우리의 산은 전국의 오악 또는 오행을 상징하여, 국왕과 왕비가 전국토를 잘 다스림을 뜻한다고 한다.

 조선 궁궐 중 가장 오래된, 창경궁의 정전이자 유일의 '국보' 명정전! 책에서는 본래 궁궐 정전까지는 3개의 문을 거치며 중층 구조를 보인다고 한다. 명정전은 단층이며, 2개(홍화문과 명정문)의 문을 통과해 다다랐다. 내가 빛의 속도로 봤더라도 경복궁 근정전을 본 적이 있었는데, 결코 단층이란 이유로 명정전이 위엄 없어 보이진 않았다.

 문을 2개만 통과했다고 해서 격식이 낮다는 생각도 전혀 들지 않는다. 현대의 비전문가의 관점에서는 그렇다.

 가장 오래된 정전, 소위말해 "짬에서 오는 바이브"보다 강력한 것이 있는가?!

(좌) 답도 / (우) 내부

덕수궁과 비교해 흥미 있게 본 것은, 황제국인 덕수궁에서는 쌍용이었다면, 창경궁에서는 계단 가운데 '답도' 문양에서나 내부 천장에서나 "봉황"이 있었다는 것! 황제국이 아닌 왕국이라는 점에서 나오는 차이, 알고 보니 보이는 것들이다.

오래된 궁궐이라 색이 바래 오래된 표시가 난 것도 눈에 띄었는데, 낡아 보인다는 느낌은 없는 반면 오히려 그래서 더 멋있었다.


명정전만의 아름다운 요소로, 건물들이 이어져있으며 그 복도에서 보는 건축미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건물과 건물을 연결하거나 감싸고 있는 좁고 긴 구조물을 '낭'이라고 하는데, 명정전에는 뒤편으로 공간을 확장한 '익랑', 빈양문으로 연결된 '천랑'이 있다. 용어 설명은 봐도 언뜻 잘 모르겠어서 생략할 테니, 자세한 사항은 도서를 참조 바란다. 몰라도 그 아름다움을 만끽하는 데는 아무 지장 없다. 그저 보고 느끼면 된다!



5. 문정전(文政殿)

문정전은 창경궁의 편전으로, 문정(文政)이란 ‘문교(文敎)로서 정치를 편다'라는 뜻이다. 국왕이 관리들과 만나 업무 보고를 받고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던 집무실이었다. 문정전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타 광해군 8년(1616) 다시 지었고, 현재의 건물은 일제 강점기에 철거되었던 것을 1986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문정전은 왕실 가족의 신주를 모신 혼전(魂殿)으로 쓰인 경우도 있었고, 영조의 첫째 왕비인 정성왕후와 철종의 비인 철인왕후의 혼전으로 사용되었다.

 명정전 남쪽에 붙어 남향의 창경궁의 편전인 문정전. 편전 외에도 돌아가신 왕이나 왕비의 신주를 모시고 삼년상을 지내는 '혼전'으로도 기능했다고 한다. 영빈 이 씨에게서 태어난 사도세자는 전례에 따라 정성왕후의 아들로 입적했는데, 사도세자가 정성왕후의 신주를 모시고 온 곳이며,

 또한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라고 명하고 서인으로 폐한 곳이 여기 문정전이다. 사도세자의 사연 외에도, 일제 때 헐렸다가 1986년에서야 행각 없이 건물만 재건된 이야기까지. 여러모로 파란만장한 장소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정전으로 통하는 문정문을, 문정전에서 바깥으로 통과해 나서면 '남쪽 숲길' 이어진다.




사실 동선상 명정전과 문정전과 바로 인접해 숭문당이 있고, 거기서 조금만 더 가면 함인정이 나오고, 바로 뒤 환경전과 경춘전, 또 거기 근처에 통명전과 양화당, 영춘헌과 집복헌까지 쭉 다 볼 수 있다.


그러나 창경궁의 자랑, '남쪽 숲길'을 걷고 싶어 바로 문정문을 통과했다. 창경궁이 작은 궁궐이 정말 맞나? 벌써 탐방 분량이 이만큼이나 되다니. 역시 크기가 작다고 해서 볼거리가 작은 것이 아님을 덕수궁 탐방에 이어 다시금 깨달았다. 남쪽 숲길부터의 탐방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나누도록 하겠다.


https://brunch.co.kr/@greatpine7/129




보다 풍성한 창경궁 탐방을 하고 싶으시다면 <궁궐로 떠나는 힐링여행 : 창경궁>을 꼭 읽어보시기 바란다. 그리고 힐링 끝판왕 장소, 한양도성을 오르기 전 보다 재미있는 탐방을 위해 필자의 저서 <한양도성으로 떠나는 힐링여행>을 읽으시길 권해드린다.

이전 02화 <덕수궁> 힐링 탐방기 2편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