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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한솔 Sep 07. 2023

<덕수궁> 힐링 탐방기 2편

석어당~즉조당~준명전~석조전~돈덕전~중명전


https://brunch.co.kr/@greatpine7/124


 덕수궁을 조금 알고 탐방하니 예상외로 볼거리와 이야깃거리, 쉼 거리가 늘어났다. 한 마디로 분량이 넘쳐 2편으로 탐방기를 전격 편성!

1편의 대한문~중화전~덕홍전~함녕전~정관헌 탐방 이야기에 이어, 2편에서는 석어당~즉조당~준명전~석조전 그리고 돈덕전과 중명전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출처 : 덕수궁관리소 누리집






6. 석어당(昔御堂)

(昔御 : 옛날에 임어(臨御)하였다) 석어당의 창건 연대는 확실치 않습니다. 1904년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같은 해에 건물을 다시 짓고, 1905년 9월 현판을 걸어 완전히 중건하였습니다. 덕수궁의 유일한 중층의 목조 건물로 선조가 임진왜란 중 의주로 피난 갔다 환도한 후 거처하셨던 곳이자 1608년 2월 승하한 곳으로 추정됩니다. 이 밖에 광해군이 인목왕후를 유폐시켰던 곳, 인조반정이 성공한 뒤 광해군의 죄를 문책한 곳이기도 합니다. 특히 석어당은 단청을 하지 않은 “백골집”으로 아래층은 정면 8칸, 측면 4칸이며 위층은 정면 6칸, 측면 1칸으로 겹처마에 팔작지붕의 건물입니다.


이번 덕수궁 탐방에서 내게 제일 인상 깊었던 전각은 석어당이었다. 크게 두 가지 유일한 특징이 있었기 때문.


 먼저는 중화전이 단층으로 복원했기에 현재 외관상 덕수궁에서 유일한 중층 목조 건물로 매우 아름답다점이다. 물론 석어전도 화재 소실 후 1905년에 중건한 것이지만 그래도 지은 지 120년이 다 돼가는 귀한 목조 건물이어서 의미가 남다르다. 그냥 직관적으로 봤을 때 2층 목조 건물이 가장 아름답게 느껴졌고, 가로로 길게 뻗어있어서인지 단층 건물과 같은 안정감도 받을 수 있었다.

 

형형 색색의 단층을 하지 않아 그 유니크함으로 인해 오히려 더 눈에 띄었고, 더 아름답게 보였다.

내부 방안의 모습도 예스러운 멋이 그득했으며 창 너머로 보이는 나무들은 마치 살아 숨 쉬는 자연을 테마로 한 액자 작품을 보는 듯했다. 석어당에 앉아서 뒤뜰을 바라보면 세상 모든 걱정이 사라질 것만 같았다.


 단순히 예쁜 것에서 끝났다면 가장 인상 깊지는 않았을 것인데, 석어당은 스토리텔링이 있는 집이었다. 바로 선조가 임진왜란 피난길에서 돌아와 거처해 승하했던 곳이어서 그 의미가 깊은 석어당이다. 중화전, 정관헌 일대 등 감명받은 공간이 많았지만, 한 곳을 꼽으라면 나의 원픽은 석어당이다.



7. 즉조당(卽阼堂)과 준명당(浚眀堂)

'석'브라더스(?). 석어전과 석조전 사이 공간에는 두 채의 단층 건물, 덕수궁의 모태가 된 즉조당과 준명당이 녹지의 앞마당과 함께 있다.


- 즉조당

(卽阼 : 즉위(卽位)) 준명당과 복도로 연결되어 있는 이 건물은 15대 광해군과 16대 인조가 즉위한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897년 고종의 경운궁[덕수궁]으로 환궁한 직후 정전으로 이용하였으며, 이때 즉조전의 이름을 태극전, 중화전으로 불렀습니다. 이후 1902년 새로운 정전이 세워지자 다시 즉조당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1904년 덕수궁 대화재 때에 소실되었던 즉조당은 그 해에 석어당, 준명당과 함께 건물을 다시 짓고, 1905년 9월 현판을 걸어 완전히 중건하였습니다. 이곳은 고종의 후비인 순헌황귀비가 1907년부터 1911년 7월 승하할 때까지 생활하던 공간이기도 하며, 건물은 정면 7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습니다.

즉조당은 왕년에  한가닥 했던 건물이다. 1897년 고종이 환궁한 직후 정전으로 이용한, 핵심 건물이었다. 태극전, 중화전으로 불리다 1902년 지금의 중화전이 새워지고 정전이 되면서 즉조당으로 명명되었다. 즉조란 즉위를 의미하는데, 15대 광해군과 16대 인조가 즉위한 곳이다.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책을 통해 새롭게 안 내용이었다.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후 황제의 자리에 오른 장소도 즉조당(당시 이름은 태극전)이었단다.


 언뜻 보기에 궁궐에서는 평범한 집 한 채 정도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이곳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일들이 많이 일어났었다. 역시 알고 보니 그저 평범한 집이 아닌, 뭔가 특별해 보이는 효과가 있었다. 천장의 용 단청도 눈에 들어오고 말이다.


- 준명당

(浚明 : 다스려 밝힌다) 이 건물은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1904년 화재 때에 소실되었으며, 같은 해에 건물을 다시 짓고, 1905년 8월 현판을 걸어 중건하였습니다. 목조 건물로 즉조당과는 복도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건물은 높은 기단 위에 세워졌고, 정면 6칸, 측면 5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또한 좌우 툇간에는 쪽마루가 있습니다. 이후 1916년 4월에는 덕혜옹주 교육을 위한 유치원으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준명당은 즉조당이 정전으로 사용되었을 때 황제가 업무를 보던 곳으로, 대신들을 만나고 외국 사신을 접견하는 곳이 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고종이 사랑한 늦둥이 딸, 영화 일대기의 주인공 '덕혜옹주'의 교육을 위해 1916년 유치원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의 비극적 삶 속에서, 덕혜옹주에게는(물론 고종에게도) 이곳에서의 시간만큼은 행복했을 것이다. 준명당을 보는 내내 이러한 부분에 감정이입이 돼 애잔한 마음이 들었다.


- 화합의 상징

전술한 것처럼 즉조당과 준명당은 연결되어 있는데, 마치 화합을 상징하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그렇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각 분야에서 양측의 진영이 서로 화합하지 못하고 싸우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이 당사자들이 함께, 꼭, 여기 와서 서로 연결된 모습을 보며 무엇인가를 느꼈으면 하는 바람이다. 위로는 두 지붕처마가 마주 보고, 가운데로는 합쳐져 있으며, 아래에는 통행 공간의 형태. 이 모두를 담은 위의 사진이 매우 마음에 들었다.


 연결 통로 아래 공간을 통해 건너가면, 아름다운 뒤뜰과 또 하나의 힐링스폿, 정관헌 부근에서부터 이어져오는 산책로가 있다. 뒤편에 있어 놓치기 쉬운 장소이지만, 이 힐링의 공간을 절대 놓치지 마시길 당부드린다.



9. 석조전(石造殿)

(石造 : 돌로 짓다) 조선시대 궁중건물 중 대표적인 유럽풍의 석조 건축물로 영국인 “하딩”이 설계하였고, 1900년 기공되어 1910년에 준공되었다. 고종은 고관대신과 외국 사절들을 만나는 용도로 석조전을 사용하였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기 이전까지는 현대미술품을 진열하였으며, 1946년~1947년까지 미.소 공동위원회가 사용하였고, 1948년~1950년에는 유엔 한국위원단이 이곳을 사무실로 사용하였다. 그 후 국립중앙박물관, 궁중유물전시관 등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2009년 문화재청에서 석조전을 1910년 준공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 공사를 진행하여 2014년에 석조전 대한제국역사관으로 개관하였다.


 정면 54미터, 측면 31미터, 3층짜리의 장대한 건축물. 다른 궁궐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규모의 서양식 건축물, 석조전이 있었기 때문에 덕수궁이 더욱 빛이 난다고 할 수 있다. 석조전과 덕수궁 미술관 방문 목적으로 덕수궁 안으로 들어오는 관광객들이 꽤 많을 것이다. 실제로, 관광 중 한 무리에 속한 청년들이 석조전과 미술관은 예전에 여러 번 와 본 적이 있다고 하는 것을 듣기도 했다.

 배경지식 없이 잘 모르고 덕수궁에 가봤을 때, 직관적으로 가장 멋졌던 곳은 단연 석조전이다. 웅장한 건물의 자태와는 달리, 이곳도 "덕수궁 미술관, 이왕가미술관, 미소공동위원회 회의장, 유엔 한국임시위원단 회의장, 국립현대미술관, 궁중유물전시관, 덕수궁사무소" 등 참 여러 용도로 사용되었더라. 준공 당시 모습으로 복원한 것이 불과 10여 년 밖에 안되었다.


 내 마음속의 최애 전각이 바뀌었다는 것이지, 석조전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매우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멋진 건축물에 맘껏 취하며 석조전 둘레를 걸었다. 좌에서 우로, 우에서 좌로. 왕복했다. 신고전주의 양식, 이오니아식 기둥 이런 거 몰라도, 그 멋지고 아름다움을 느끼는 데에는 아무 지장이 없다.

  충분히 둘러본 외관과는 달리, 내부의 대한제국역사관은 예약자에 한해서만 방문이 가능해서 이날 나는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결코 아쉽지 않았다. 예전에 가본 적이 있었고, 무엇보다도 <궁궐로 떠나는 힐링여행 : 덕수궁> 개정판 도서 속 사진을 통해 충분히 관람했기 때문이다. 또한, 황실 공간은 아니었지만 앨버트 태일러의 가옥 딜쿠샤와 경교장 내부를 관람하면서 그 바로 이어진 시대의 건축물 내부를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 덕수궁 미술관(석조전 서관), 바로크식 정원과 분수대

 석조전 서관으로 불리는 덕수궁미술관은 석조전과 연결되어 있다. 이번에 새롭게 알게 됐는데 1937년에 이왕직박물관으로 지어졌다고 하더라. 복원이 아닌, 최초 건설 시기는 가장 늦게 지어진 건물이 석조전 서관이었다. 석조전 본 건물과 비슷한 모습이지만 철근 콘크리트로 지어 재료의 변화를 보여주는 건축물이라고 한다. 역시 외관이 웅장하고 화려하여 보는 즐거움이 있는 건축물이다.


덕수궁의 또 하나의 시그니처. 중화전에서 봐도, 석조전에서 봐도, 덕수궁 미술관에서 봐도, 석조전 반대 등나무 쉼터에도 봐도. 어디에서 봐도 힐링이 되는, 덕수궁의 상징적인 공간 중 손꼽히는 석조전 앞 정원과 분수대.

등나무 쉼터에서 찍은 전경
석조전에서 찍은 전경
미술관에서 찍은 전경

  등나무 쉼터에 앉아 뻥 뚫린 공간 가운데의 분수대를 보고 있노라면, 걱정근심은 저 멀리 여행을 떠난 것과 같다. 평일 아침이라 관광객들이 상대적으로 모여 있는 모습을 잘 못 봤었는데, 여기서만큼은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하루에 석조전 대한제국역사관과 덕수궁 미술관까지 보기에는 사실 시간이 많이 소요되기에, 아직 개방이 안돼 이날 못 본, 후술 할 돈덕전과 함께 한번 날 잡아 다시 석조전 일대만을 따로 방문해보려 한다.



10. 돈덕전(石造殿)과 중명전(重眀殿)

실질적 탐방은 석조전 일대에서 끝났지만, 황제가 즉위식을 열었던 곧 개방될 돈덕전과 덕수궁 밖에 위치해 있는 중명전의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나누려 한다.


- 돈덕전

덕수궁에서 가장 힙한 건축물은?! 복원 공사를 통해 조만간, 현재 우리 사회 구성원들에게 처음 선보이는 돈덕전일 것이다. 프랑스식 외관의 돈덕전은 석조전 뒤편에 있었던 건물이며 지금 그곳에 복원되었다. 아직 내부시설 이라든지 완전한 복원이 되지 않아서인지 그 일대의 출입은 제한돼 있었다. 하지만, 정동으로 나가는 서편 출구문 쪽에서 돈덕전을 볼 수가 있었다! 조금 떨어져서 봤는데도 녹색 창틀과 적색과 검은색이 어우러진 벽돌의 모습이 정말 예뻤다.


 본래는 1902년 10월에 있을 '고종 즉위 40주년 기념 칭경예식'을 치를 목적으로 짓기 시작했다는데 여러 사정으로 짓기 시작했는데, 칭경예식 행사는 연기 끝에 개최하지 못했다고 한다. 정확한 완공시기는 알 수 없지만 황성신문의 1903년 4월 6일 자 기사에 언급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 이전에 완공이 됐다.


 그 대화재 때도 돈덕전은 무사했고, 황제가 신하들을 접견하거거나, 각국의 공사와 사절들을 만나고 연회를 여는 장소로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순종이 1907년 7월 중화전에서 권정례(절차를 다 밟지 않고 진행한 의식)로 즉위한 이후, 8월 즉위식을 거행한 장소가 바로 돈덕전이다.


 1919년 고증 승하 후 돈덕전은 방치되다가 그 후 어느 때인가 없어졌다. 1921년 7월 25일 자 동아일보 기사에서는 돈덕전의 사진이 있지만, 1926년 경성부 시내를 촬영한 항공사진에서는 보이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 사이에 철거된 것으로 예상된다. 2017년 문화재청에서 복원을 위한 발굴조사를 실시하고 2018년부터 복원 공사를 시작한 돈덕전, 그 외관은 완성된 것으로 보였다. 조간 내부 공개가 이뤄질 것으로 기대된다.


- 중명전

(重眀 : 광명이 계속 이어져 그치지 않다) 1897년 황실의 도서와 보물을 보관하는 용도의 황실 도서관으로 계획되어 1899년 준공되었다. 한성부 건축기사로 초빙된 미국인 다이(J. H. Dye)의 설계로 1층 서양식 건물로 지어졌다. 1901년 11월 화재로 전소되어 이듬해 회랑이 있는 2층 건물로 재건축되었다. 처음에는 수옥헌(漱玉軒)이라 불렸으나, 1906년경부터 중명전重明殿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1904년 4월 고종이 이곳으로 이어하면서 편전 겸 폐현 장소로 사용되었으며, 이듬해인 1905년 이곳에서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이후 중명전은 외국인클럽 등 민간 영역에서 활용되면서 내외부가 많이 변형되었다. 2009년까지 문화재청에서는 복원공사를 진행하고, 실내를 전시장으로 개비하여 2010년부터 전시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황실도서관으로 계획되어 1899년 처음 준공된 중명전. 현재는 덕수궁의 영역 밖에 위치해 있다. 위 설명에 나와있듯이 우여곡절 끝에 2010년부터 덕수궁과 중명전, 을사늑약의 현장, 을사늑약 전후의 대한제국, 대한제국의 특사들이라는 이름의 전시실이 있는 전시관으로 운영 중이다. 전시관의 명칭에서 보듯,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장소다.


  나는 한양도성 숭례문 구간 중 정동길을 걸었을 때 중명전 건물을 문 너머로 본 적이 있었다. 문이 닫힌 날이라 내부는 못 들어가 봤는데, 역시나 기회 되면 한번 날 잡아 덕수궁과 중명전 그리고 뼈아픈 을사 늑약의 기록을 한번 살펴보는 시간을 가져보겠다.


두 번째 탐방 궁궐은 역시나 상대적으로 작은 궁궐인 창경궁이다.


https://brunch.co.kr/@greatpine7/128






여러분들이 알고 있던 덕수궁과 위 탐방기를 통해 본 덕수궁이 비슷하신가? 혹은 좀 다르신가? 나는 첫 번째 30분도 안 돼서 쓱 둘러봤을 때의 덕수궁은 오직 석조전과 내부 전시만 기억날 뿐이었다. <궁궐로 떠나는 힐링여행 : 덕수궁>을 읽고 나서, 덕수궁을 조금 알고 탐방하고 나니 비교가 안될 정도로 풍성한 힐링여행을  할 수 있었다.


 책과 이 글을 통해 덕수궁을 알고, 필자와 같이 힐링 가득한 탐방 해 보시길 강추드린다! 아울러 힐링 끝판왕, 한양도성도 가을에 꼭 가보시길 비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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