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어당~즉조당~준명전~석조전~돈덕전~중명전
(昔御 : 옛날에 임어(臨御)하였다) 석어당의 창건 연대는 확실치 않습니다. 1904년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같은 해에 건물을 다시 짓고, 1905년 9월 현판을 걸어 완전히 중건하였습니다. 덕수궁의 유일한 중층의 목조 건물로 선조가 임진왜란 중 의주로 피난 갔다 환도한 후 거처하셨던 곳이자 1608년 2월 승하한 곳으로 추정됩니다. 이 밖에 광해군이 인목왕후를 유폐시켰던 곳, 인조반정이 성공한 뒤 광해군의 죄를 문책한 곳이기도 합니다. 특히 석어당은 단청을 하지 않은 “백골집”으로 아래층은 정면 8칸, 측면 4칸이며 위층은 정면 6칸, 측면 1칸으로 겹처마에 팔작지붕의 건물입니다.
(卽阼 : 즉위(卽位)) 준명당과 복도로 연결되어 있는 이 건물은 15대 광해군과 16대 인조가 즉위한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897년 고종의 경운궁[덕수궁]으로 환궁한 직후 정전으로 이용하였으며, 이때 즉조전의 이름을 태극전, 중화전으로 불렀습니다. 이후 1902년 새로운 정전이 세워지자 다시 즉조당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1904년 덕수궁 대화재 때에 소실되었던 즉조당은 그 해에 석어당, 준명당과 함께 건물을 다시 짓고, 1905년 9월 현판을 걸어 완전히 중건하였습니다. 이곳은 고종의 후비인 순헌황귀비가 1907년부터 1911년 7월 승하할 때까지 생활하던 공간이기도 하며, 건물은 정면 7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습니다.
(浚明 : 다스려 밝힌다) 이 건물은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1904년 화재 때에 소실되었으며, 같은 해에 건물을 다시 짓고, 1905년 8월 현판을 걸어 중건하였습니다. 목조 건물로 즉조당과는 복도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건물은 높은 기단 위에 세워졌고, 정면 6칸, 측면 5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또한 좌우 툇간에는 쪽마루가 있습니다. 이후 1916년 4월에는 덕혜옹주 교육을 위한 유치원으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石造 : 돌로 짓다) 조선시대 궁중건물 중 대표적인 유럽풍의 석조 건축물로 영국인 “하딩”이 설계하였고, 1900년 기공되어 1910년에 준공되었다. 고종은 고관대신과 외국 사절들을 만나는 용도로 석조전을 사용하였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기 이전까지는 현대미술품을 진열하였으며, 1946년~1947년까지 미.소 공동위원회가 사용하였고, 1948년~1950년에는 유엔 한국위원단이 이곳을 사무실로 사용하였다. 그 후 국립중앙박물관, 궁중유물전시관 등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2009년 문화재청에서 석조전을 1910년 준공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 공사를 진행하여 2014년에 석조전 대한제국역사관으로 개관하였다.
(重眀 : 광명이 계속 이어져 그치지 않다) 1897년 황실의 도서와 보물을 보관하는 용도의 황실 도서관으로 계획되어 1899년 준공되었다. 한성부 건축기사로 초빙된 미국인 다이(J. H. Dye)의 설계로 1층 서양식 건물로 지어졌다. 1901년 11월 화재로 전소되어 이듬해 회랑이 있는 2층 건물로 재건축되었다. 처음에는 수옥헌(漱玉軒)이라 불렸으나, 1906년경부터 중명전重明殿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1904년 4월 고종이 이곳으로 이어하면서 편전 겸 폐현 장소로 사용되었으며, 이듬해인 1905년 이곳에서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이후 중명전은 외국인클럽 등 민간 영역에서 활용되면서 내외부가 많이 변형되었다. 2009년까지 문화재청에서는 복원공사를 진행하고, 실내를 전시장으로 개비하여 2010년부터 전시관으로 활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