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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한솔 Sep 06. 2023

<덕수궁> 힐링 탐방기 1편

대한문~금천교~중화전~덕홍전~함녕전~정관헌

<궁궐로 떠나는 힐링여행 : 덕수궁> 책 읽고 덕수궁 탐방하기!


 지난주에 책을 다 읽고 나서, 9월이지만 여름 날씨가 이어지는 탓에, 무더운 오후를 피해 아침 개방시간에 맞춰 덕수궁을 찾았다. 가장 먼저 지어진 대표 궁궐인 경복궁이 아닌, 덕수궁으로 정한 이유는 시청역 인근에 위치해서 접근성이 매우 좋으며, 다른 궁궐에 비해 크기가 작아 궁궐 탐방 입문자분들께서 부담스럽지 않게 탐방하기 좋은 곳이기 때문이다.


 지방에서 20대 중반까지 살다 서울로 상경한 나는 덕수궁 하면, 그 돌담길과 정동 등 일대 등 그 둘레가 먼저 떠오른다. 그리고 그 내부를 딱 한번 아무 배경지식 없이 짧은 시간 둘러본 적이 있을 뿐이었는데, 외관상 기억에 남은 유이한 건물이자 가장 상징적이라고 생각하는 건물은 "석조전"과 "덕수궁 미술관"이었다.


(좌) 석조전 / (우) 덕수궁 미술관

그런데, 책을 읽고 덕수궁을 조금이나마 알고 탐방해 보니 이 생각은 완전히 뒤집혔다. 또한 책을 읽는 중에는 왜 책 제목에 "힐링여행"이 들어가는지에 대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한양도성 탐방길 정도는 되어야 힐링여행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산속에 있지도 않은 '궁궐' 보는 것이 "힐링여행"이라고 말하는 것은 조금은 과장된 말이 아닌가 싶었다.


 아니었다. 오늘 나는 제대로 힐링여행을 했고, 탐방 이후부터 덕수궁 하면 떠오르는 건물은 더 이상 석조전이나 덕수궁 미술관이 아니다. 왜 생각이 바뀌게 되었는지 이제 앞으로 찬찬히 다루도록 하겠다.


서설이 길었는데, 대한제국의 환궁이자, 옛 이름이 경운궁(慶運宮)으로 불렸던 덕수궁(德壽宮) 탐방이야기를 시작해 보겠다. 각 타이틀 아래의 인용문구 내용 출처는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덕수궁관리소" 누리집임을 말씀드린다. 또한, 덕수궁은 1904년 큰 화재로 어지간한 건물들이 다 불타 소실되거나 크게 훼손, 이후 다시 복원했던 작업을 거쳤음을 참조하시기 바란다.

출처 : 덕수궁관리소 누리집
덕수궁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주로 피난 갔던 선조가 다시 한양으로 돌아왔을 때, 월산대군 저택과 그 주변 민가를 여러 채 합하여 ‘시어소’로 정하여 행궁[정릉동 행궁]으로 삼았던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이후 광해군이 즉위한 후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경운궁’이란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궁궐의 모습을 갖춘 덕수궁은 인목대비 유폐와 인조반정을 겪으면서 규모가 축소되었고, 특히 인조가 즉위한 이후 즉조당과 석어당을 제외한 나머지는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었습니다. 이로써 덕수궁은 더 이상 왕이 공식적으로 머물며 국정업무를 보던 궁궐의 기능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난 이후 덕수궁이 다시 역사에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을미사변으로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후, 1897년 2월에 덕수궁으로 환궁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대한제국이라는 황제국을 선포한 후 황궁으로서의 규모와 격식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1904년 덕수궁 대화재와 1907년 고종의 강제퇴위 이후 덕수궁은 그 규모가 대폭 축소되었습니다. 이때 경운궁에서 덕수궁으로 이름 또한 바뀌게 되었습니다.





1. 대한문(大漢門) 금천교

- 대한문

(大漢 : 한양이 창대해진다) 원래 궁궐의 정문은 남쪽으로 난 인화문仁化門이었는데, 환구단 건립 등으로 경운궁의 동쪽이 새로운 도심이 되자 동문인 대안문大安門을 정문으로 삼았습니다. 1906년에 대한문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1970년 태평로를 확장하면서 서쪽으로 물러 앉게 되면서 현재의 위치에 자리 잡았습니다. 대한문을 지나 건너게 되는 금천교는 1986년에 발굴 복원한 것입니다.

 위치를 옮겨야 했던 시련을 겪은 '대한문'. 내가 알던 모습과는 뭔가 달라 보였다 싶었는데, 바로 궁궐의 주요 건물 앞에 설치하는 넓은 기단형식의 대를 말하는 "월대"가 조성됐기 때문이었다. 복원된 지 불과 한 달 여 밖에 안 됐다고 한다. 매스컴에서는 월대 복원 및 용두석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 시민도 있다고 하던데, 나는 보기 좋더라. 황제국 대한제국의 궁궐의 첫 관문인 대한문 앞에 월대가 있으니 위신이 한 층 올라간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무려 용머리를 조각한 용두석, 그 존재 목적과는 별개로 귀여워서 나는 좋았다.


 가뜩이나 덕수궁 앞 일대는 도로와 인접하고 유동인구가 많아 혼잡한데, 그나마 월대가 자리 잡아 혼잡함을 조금이나마 잡아주는 역할을 하는 것도 같아서 복원을 환영하는 바이다. 1970년 현 위치로 자리 잡은 지 이제 50년이 되었는데, 월대와 함께 앞으로는 시련 없이 우리를 맞이해 주길 기원한다.

 대한문 우측의 키오스크로 티켓을 발행(대인 1,000원), 수도 없지 지나가면서 보기만 했던 대한문을 생애 두 번째로 통과했다.


 - 금천교

 모든 궁궐이 본격적인 진입로에 돌다리가 있듯이, 덕수궁에도 돌다리 "금천교"가 있다. 1986년에 발굴하여 정비한 금천교는 위로는 삼도로, 다리 아래는 서양에서는 아치라 부르는 두 개의 '홍예'로 구성된 모습이다. 지금은 물이 흐르지 않는 금천교는 다른 궁궐의 다리와는 달리 다리의 난간 치장이나 장식이 화려하지 않은 기본형태를 보이고 있다.

우측에는 '대소인원개하마'라는 문자가 새겨진 비석이 있는데 이는 궁궐 밖 정문 앞에 세우는, 말을 내리라는 뜻의 '하마비'라고 한다. 궁궐 밖에 있어야 할 비석을 여기에 배치한 것. 아마도 대한문 일대에 놓을 자리가 없기도 해서 이곳으로 들여다 놓았을 것이라 한다.

  배경지식 없이 갔다면 10초 컷. 그냥 다리를 바로 건너갔을 텐데, 책을 읽고 가니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 아닌가!? 다음 전각들도 이렇게 하나하나 아는 배경지식을 곱씹으면서 보니 몇 배로 재미가 있었다.



2. 광명문과 중화문

- 광명문

금천교를 건너 중화전 방면으로 가다 보면 광명문(光明門)이 보인다. 함녕전의 남쪽 대문으로, 광명이란 밝음을 맞다는 의미이다. 1904년 화재 이후 중건되었다가 1930년대에 석조선 서관 남쪽으로 옮겨졌다가, 2018년에 이르러서야 80여 년 만에 제자리를 찾아 함녕전 남쪽으로 옮기고 없어졌던 문과 잡상 등을 복원하였단다. 대한문 월대, 광명문과 같이 최초의 위치나 모습과는 다를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하나씩 복원하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부분 부분의 복원이 궁궐 전체를 더욱 빛 나게 해 줄 것이기에.


- 중화문

 함녕전은 후에 볼 계획이어서 광명문을 통과하지 않고 그대로 올라가 중화문 앞에 다다랐다. 명칭에서 예상되듯 중화전의 정문이다. 1902년 건립했다가 마찬가지로 1904년 화재로 소실된 후 새로 세웠다.

좌우에 행각, 즉 종의 방으로 구성된 줄행랑이 있었으나 지금은 동측에 일부만 남아 있는데 약간 그늘을 피하는 용도의 멋들어진 보기 좋은 한옥 구조물 같은 느낌을 준다. 본래 이 용도는 아니었겠지만.



3. 중화전(中和殿)

(中和 :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바른 성정) 1897년 러시아공사관에서 덕수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즉조당을 정전으로 사용하였으나, 협소하였으므로 1902년 새로운 정전으로 중화전을 지었습니다. 본래는 2층으로 된 중층 건물이었으나 1904년 4월 화재로 소실된 후 현재의 단층 건물로 중건되었습니다. 앞뜰에 조회 등의 의식이 있을 때 문무백관의 위치를 표시하는 품계석이 좌우에 있으며, 중화전의 정문으로 중화문이 있습니다. 특히 중화전은 중화문과 더불어 보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 앞뜰의 품계석과 박석

(좌) 중화전 방면 / (우) 중화문 방면

다리를 건너고, 문을 통과하고 드디어 중화전을 맞이했다. 아니 중화전이 나를 맞이한 건가? 바로 건물이 딱 맞닥뜨리는 것이 아니고 뜰이 눈에 들어온다. 먼저 문무백관의 위치를 표시한 품계석(동쪽은 문관, 서쪽은 무관)이 양쪽으로 보이며  돌의 결을 따라 얇게 떠낸 판돌인 '박석'이 바닥에 깔려 있다. 궁궐시리즈 이향후 작가님은 덕수궁의 박석이 기계로 매끈하게 깎아낸, 옛 조선 석공의 손맛이 살아 있지 않은 모습이라 아쉽다고 표현했더라. 아직 경복궁의 박석을 심도 있게 보지 않은 상황이다 보니  눈엔 그저 멋들어져 보이기만 했는데, 역시 아는 만큼 보이나 보다. 때문에 꼭 풍성한 배경지식과 비하인드 스토리가 담겨있는, 인문산책 <궁궐로 떠나는 힐링여행> 시리즈 도서를 꼭 읽어보시길 당부드린다.


- 계단 위 답도와 석수

(가운데) 답도 / (우) 석수

 중화전으로 가는 길은 금천교에서와 마찬가지로 삼도, 즉 세 길이 있다. 금천교에서는 가운데 길로 건너갔으나, 중화전의 위엄에 기가 죽은 나는 가운데 옆 길로 건너갔다. 중화전에 가까이 이르면 계단과 그 위의 답도와 석수가 눈에 들어온다. 답도는 궁궐의 격을 나타내주는 장식물 중 하나로서 주로 정전의 중앙 계단을 장식했다. 쌍룡이 새겨져 있는데 위엄이 장난이 아니다.


 이 역시 책을 읽고 안 사실인데 경복궁과 창덕궁에 있는 답도에는 '봉황'이 새겨져 있단다. 중국 제후국의 위치였기 때문에 봉황을 새긴 것인데, 이에 반해 황제국인 대한제국의 궁궐인, 오직 덕수궁에서만은 황제를 상징하는 '쌍룡'이 새겨진 답도를 볼 수 있다. 그리고 8개의 석수는, 대한문 앞의 것과 마찬가지로 본래 귀여울 목적으로 만든 것은 아니지만 너무 귀엽게 느껴졌다.


- 중화전 내부

계단을 다 오르고, 1902년 새로운 정전으로 지은 중화전 앞에 도달했다. 본래는 2층 건물이었다. 사진으로 옛 모습을 봤는데 역시 2층 건물이 더 멋져 보이더라. 그런데, 그놈의 1904년 대화재. 계속 언급하고 또 언급할 이 화재로 소실, 재정 문제 등으로 단층으로 축소돼 중건됐다. 그럼에도 고정이 '칭제건원(왕을 황제라 칭하고, 연호를 제정하자는 주장)'했던 대한제국의 법전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건물이다. 중화전 천장에는 황금빛깔의 쌍룡이 위엄 있게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창살의 색은 황제국의 위상을 나타내는 황색으로, 경복궁 근정전과 창경궁 명정전의 만창살이 뇌록색(밝은 녹색)인 것과 차이가 있다.


- 월대 위 향로와 드므

중화전 월대에는 향을 피우던 향로가 있다. 향로가 원래 이렇게 멋있는 형상이었던가?! 뭔가 앙부일구와 비슷한 느낌도 났다. 또한 화재 예방을 위한 무쇠 물동이, 네 개의 '드므'도 있다. 관광객들이 쓰레기통으로 생각하고 쓰레기를 투기하는 것을 막기 위해 뚜껑을 두었다고 한다.   


중명전에서 바라본, (좌) 석어당과 즉조당 / (우) 덕홍전 및 함녕전 방면

 자립의지의 상징, 중화전은 덕수궁의 정전이다. 왕이 신화와 정사를 나누던 핵심 장소인데, 처음에는 잘 몰랐는데 위치적으로도 매우 핵심적인 위치였다. 다른 전각들의 멋진 사진을 찍으려고 이동하다 보니 결국 다시 중화전 월대를 오르게 되더라. 중화전 우측에서는 덕홍전과 함년전, 위쪽에서는 석어전과 즉조당-준명당, 좌측에서는 석조전과 국립현대미술관의 멋진 전경을 볼 수가 있다. 이제는 석조전보다는 중화전이 더 기억에 남는다.



4. 함녕전(咸寧殿) 덕홍전(德弘殿)

중화전에서 바라 본 광경 / 함녕전에서 바라 본 광경

가이드 리플릿이나 참조 도서의 순서와는 달리 다음 행선지로 석어당 방면이 아닌 덕홍전과 함녕전으로 정해, 중화전 동쪽으로 계단으로 내려왔다. 가까운 건물이 덕홍전으로, 처음에는 일반 빈객들을, 후에는 외국 사신이나 대신들을 접견하던 곳이다.  


- 함녕전 

(咸寧 : 모두가 평안하다) 1897년 건립된 함녕전은 고종의 침전으로 사용되었으나, 1904년 함녕전 온돌 수리공사 중 일어난 화재로 함녕전은 물론 덕수궁 내 전각들이 모두 소실되었습니다. 함녕전은 이듬해인 1905년 8월에 중건하였습니다. 이곳은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승하한 곳이기도 합니다.

중화전에서 더 멀리 있는 건물이, 고종의 침전 함녕전이며 이곳에서 고종이 승하했다. 문제의 그 대화재가 함녕전 온돌을 수리한 뒤 말리는 과정에서 아궁이에 불을 잘못 때어 나무기둥에 불이 옮겨 붙으면서 삽시간에 급한 북동풍을 타고 궁궐 전체로 번졌다고, "일본 언론 측에서" 전했단다. 그런데 아궁이는 나무기둥 사이에 한 자 이상의 돌기둥이 버티고 있는 구조로, 불이 옮겨 붙기가 쉽지 않은데... 여기까지만 말씀드리겠다.

함녕전 내부
행각 모습

 고종의 침전 이래서 뭔가 보다 화려한 모습을 기대했는데, 단출해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복원된 남문인 광명문과 남쪽과 동쪽의 행각의 존재, 우측에 앞면에 보물 제820호, 뒷면에 대한민국(1984.12.29.) 글이 새겨져 있는 비석을 보고 나니 다시금 중요한 건물이었음이 전해졌다. 고즈넉한 분위기가 매력적인 함녕전 일대다.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경복궁에서 명성황후가 시해된 후 고종이 황후를 맞이하지 않았기에 이곳 덕수궁에는 황후의 침전은 없다고 한다.


- 덕홍전

-(德弘 : 덕이 넓고 크다) 함녕전을 고종의 침전으로 사용할 때 일반 빈객들을 접견하기 위하여 1906년 건립한 후 1911년에 개조한 전각으로 주로 황제가 외국 사신이나 대신들을 만나던 접견실로 쓰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4칸이며 겹처마 팔작지붕의 단층건물로 측면에는 좌우 툇간이 있어서 전체의 평면은 정사각형에 가까운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원래 덕홍전 주위에는 행각들이 있었으나 지금은 남행각 일부만 함녕전 남행각에 연접되어 있습니다.
덕홍전 내부

 외국 사신을 접견한 곳이니만큼 그 내부가 화려했다. 찬란한 빛깔의 천장 한가운데에는 '샹들리에'가 달려 있었고, 봉황 문양의 단청도 눈에 띄었다. 내가 외국 사신으로 이곳에서 대접을 받았다면 굉장히 만족스러웠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방향에 가까운 외관으로 인해 더욱 쉽게 잊히지 않을 것이다.


 함녕전과 덕홍전 뒤뜰, 좌측으로 함녕전 행각, 정면으로는 정관헌이 보이는 한쪽 벤치에서 한참을 쉬었다. 힘들어서가 아니라 너무 힐링되었기 때문이다. 우거진 나무 사이로 보이는 건물, 그 조화로운 모습에 더해 새파란 하늘까지. 서두에서 궁궐에서 무슨 힐링을 하냐는 나의 생각을 와장창 깬 순간이었다. 거창한 자연의 모습이 아니라도 궁궐 건축물과 어우러진 꽃과 나무만으로도 충분히 힐링이 가능, 했다! 덕수궁의 숨어 있는 최고의 힐링 스폿이다.



5. 정관헌(靜觀軒)

(靜觀 : 고요히 바라보다) 정관헌은 조선 역대 왕의 초상화인 어진을 봉안했던 장소로 1900년 건립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전각은 동서양의 양식을 모두 갖춘 건물로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동양식이며, 건물은 차양칸과 난간을 서양식처럼 꾸몄습니다. 또한 난간에는 사슴, 소나무, 당초, 박쥐 등의 전통 문양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정관헌은 상대적으로 깊숙한 지점에 있어, 앞서 말한 것처럼 주변이 소나무 등 나무에 둘러싸여, 가까이 가면 갈수록 마음이 정화되는 기분이 들었다. 고요히 바라보다는 뜻을 가진 게 괜한 게 아니었다. 정관헌에서 바라보든, 정관헌을 바라보든 경관이 일품이었다.


광경뿐만 아니라 서양식 정자, 건물 외관 그 자체도 예뻤다.

그중에서도 금빛 테라스가 돋보였다. 책에서 읽은 내용으로는 소나무 아래 사슴, 박쥐, 불로초 등 문양을 한 테라스는 재료가 철제가 아니라 나무를 조각한  것이라고 한다. 알고 보니 더욱 놀랍더라. 또한 붉은 벽돌로 쌓은 조적조* 몸체도 볼만했다.

조적조 : 돌 ·벽돌 ·콘크리트블록 등을 쌓아 올려서 벽을 만드는 건축구조를 말함


TV에서 정관헌의 내부를 봤던 기억이 있다. 안으로 출입은 못하고 바라보기만 했는데, 요즘 유행하는 고풍스러우면서도 클래식한 느낌을 주는 카페가 연상됐다. 실제로 고종은 이곳에서 외교사절에게 연회를 베풀며 커피를 즐겨 마셨다고 한다. 그러니까 판매한 건 아니지만 아니더라도  그들만의 카페였다고 할 수 있겠다.


- 회화나무와 힐링산책길

정관헌에서 석어전 방면으로 가는 길도 기가 막히게 힐링되는 길이었다. 커다란 회화나무가 있었는데 상서로운 나무라 하여 궁궐 주변에  많이 심었다고 한다. 또 한조선시대 선비들도 이 나무를 좋아해 많이 심었는데 정동 주변에 조선 중-후기 학자들이 많이 살았어서 이 일대에 회화나무가 많단다.


 이 거대한 회화나무는 약 350년 된 것으로 덕수궁이 들어서기 전부터 이 자리를 지켰으며, 대화재 때도 살아남아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웅장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덕수궁의 여러 힐링스폿 중 자연과의 조화 측면에서 가장 으뜸 되는 곳은 정관헌 일대라고 자신 있게 말씀드리는 바이다.





중화전과 정관헌. 이미 내 마음속에는 석조전과 덕수궁 미술관은 사라지고 이들 건물이 자리를 꿰찼다. 덕수궁이 궁궐 중 규모가 작다고 하여 그 탐방기를 하나의 글에 닮으려고 했었는데... 규모가 작다고 볼거리나 내게 주는 감명이 적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최대한 줄였음에도, 절반밖에 못 다루었는데도, 분량이 이렇게나 넘쳐 여기서 1편을  마치겠다.

 

 힐링 스폿이 다채로운 2편도 많은 기대 바란다.


https://brunch.co.kr/@greatpine7/133





*  <궁궐로 떠나는 힐링여행 : 덕수궁>을 읽고 덕수궁을 탐방한다면 이렇게나 풍성하고 유익하며 힐링되는 탐방이 가능하다. 또한 더 큰 힐링이 필요하다면? <한양도성으로 떠나는 힐링여행> 읽고, 한양도성을 탐방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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