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문~금천교~중화전~덕홍전~함녕전~정관헌
덕수궁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주로 피난 갔던 선조가 다시 한양으로 돌아왔을 때, 월산대군 저택과 그 주변 민가를 여러 채 합하여 ‘시어소’로 정하여 행궁[정릉동 행궁]으로 삼았던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이후 광해군이 즉위한 후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경운궁’이란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궁궐의 모습을 갖춘 덕수궁은 인목대비 유폐와 인조반정을 겪으면서 규모가 축소되었고, 특히 인조가 즉위한 이후 즉조당과 석어당을 제외한 나머지는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었습니다. 이로써 덕수궁은 더 이상 왕이 공식적으로 머물며 국정업무를 보던 궁궐의 기능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난 이후 덕수궁이 다시 역사에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을미사변으로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후, 1897년 2월에 덕수궁으로 환궁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대한제국이라는 황제국을 선포한 후 황궁으로서의 규모와 격식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1904년 덕수궁 대화재와 1907년 고종의 강제퇴위 이후 덕수궁은 그 규모가 대폭 축소되었습니다. 이때 경운궁에서 덕수궁으로 이름 또한 바뀌게 되었습니다.
(大漢 : 한양이 창대해진다) 원래 궁궐의 정문은 남쪽으로 난 인화문仁化門이었는데, 환구단 건립 등으로 경운궁의 동쪽이 새로운 도심이 되자 동문인 대안문大安門을 정문으로 삼았습니다. 1906년에 대한문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1970년 태평로를 확장하면서 서쪽으로 물러 앉게 되면서 현재의 위치에 자리 잡았습니다. 대한문을 지나 건너게 되는 금천교는 1986년에 발굴 복원한 것입니다.
(中和 :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바른 성정) 1897년 러시아공사관에서 덕수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즉조당을 정전으로 사용하였으나, 협소하였으므로 1902년 새로운 정전으로 중화전을 지었습니다. 본래는 2층으로 된 중층 건물이었으나 1904년 4월 화재로 소실된 후 현재의 단층 건물로 중건되었습니다. 앞뜰에 조회 등의 의식이 있을 때 문무백관의 위치를 표시하는 품계석이 좌우에 있으며, 중화전의 정문으로 중화문이 있습니다. 특히 중화전은 중화문과 더불어 보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咸寧 : 모두가 평안하다) 1897년 건립된 함녕전은 고종의 침전으로 사용되었으나, 1904년 함녕전 온돌 수리공사 중 일어난 화재로 함녕전은 물론 덕수궁 내 전각들이 모두 소실되었습니다. 함녕전은 이듬해인 1905년 8월에 중건하였습니다. 이곳은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승하한 곳이기도 합니다.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경복궁에서 명성황후가 시해된 후 고종이 황후를 맞이하지 않았기에 이곳 덕수궁에는 황후의 침전은 없다고 한다.
-(德弘 : 덕이 넓고 크다) 함녕전을 고종의 침전으로 사용할 때 일반 빈객들을 접견하기 위하여 1906년 건립한 후 1911년에 개조한 전각으로 주로 황제가 외국 사신이나 대신들을 만나던 접견실로 쓰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4칸이며 겹처마 팔작지붕의 단층건물로 측면에는 좌우 툇간이 있어서 전체의 평면은 정사각형에 가까운 형태로 되어 있습니다. 원래 덕홍전 주위에는 행각들이 있었으나 지금은 남행각 일부만 함녕전 남행각에 연접되어 있습니다.
(靜觀 : 고요히 바라보다) 정관헌은 조선 역대 왕의 초상화인 어진을 봉안했던 장소로 1900년 건립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전각은 동서양의 양식을 모두 갖춘 건물로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동양식이며, 건물은 차양칸과 난간을 서양식처럼 꾸몄습니다. 또한 난간에는 사슴, 소나무, 당초, 박쥐 등의 전통 문양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조적조 : 돌 ·벽돌 ·콘크리트블록 등을 쌓아 올려서 벽을 만드는 건축구조를 말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