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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리스러브 이유미 Mar 02. 2023

딸과 고등학교 자퇴서를 쓰고 잔치국수를 먹었다.

자퇴 말고 조기 졸업

작년 22년 9월에 쓴 글입니다.



엄마 나 고등학교 자퇴할래요. 


"학교 그만 다니고 싶으면 언제든지 그만 다녀도 돼!"


남편과 나는 아이에게 늘 말했다. 엄청난 교육관이 있었던 건 아니고 딸이 중학교를 힘들게 졸업하면서 중학교만이라도 졸업하자고 마음을 내려놓아서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딸은 걱정보다 잘 적응했고, 중학교에서 힘들어했던 친구관계가 무색할 정도로 친구들 사이에 인싸가 되었다. 자신이 그림을 잘 그려 그런 거라고 너스레를 떨었지만 학교 입학 전 친구와 잘 지내는 법을 배우기 위해 아는 언니들에게 과외를 받을 정도의 노력을 하며 만반의 준비를 한 것을 알았다. 그 노력을 친구들이 몰라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고등학교 친구들은 하연이를 굉장히 좋아했다. 더군다나 그림과 글로 책을 출판한 친구라니 자신들은 하지 못한 일을 해내는 친구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한 두 달 지나고 고등학교는 잘 다니려나 안심하고 있을 때쯤 담임선생님에게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하연이가 학교에 안 와서 전화드렸어요. 다른 아이들은 1학년부터 학점관리 한다고 조금이라고 지각하면 제게 와서 지각처리 하지 말아 달라고 하고, 수행평가 점수를 확인하러 와요. 하연이는 학점관리만 잘하면 좋은 대학도 갈 수 있는데 자꾸 지각하고 무단결석도 있어요. 하연이가 부회장인데 자신이 해야 할 일도 놓치고요. 그 일로 제가 조금 야단을 쳤는데 너무 심하게 울고 대답도 안 하더라고요. "


학점관리라니. 우리 딸이 그런 걸 할리가 없다. 자기 챙기는 것도 버거운 아이가 남을 챙기는 역할을 맡다니. 어려운 일이었다. 집에서도 아침에 깨워 보내는 게 어려우니 할머니 집에서 학교를 다니는 상황에 오죽할까. 할머니가 잠에 취해 자는 아이를 깨울 수 있을 리 없었다. 이상하기도 했다. 그동안 친구들과 어울려 늦게 자도 일찍 일어나 화장하고 헤어를 만지고 일찍 집을 나선다고 했다. 그랬던 아이가 무슨 일인 걸까. 다시 지루해진 걸까. 확인해 보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딸에게 전화를 했다.

"하연아 학교 안 갔어? 어제 선생님에게 혼났어?"

수도꼭지가 터졌다. 다시 말을 하지 못다.

"알았어. 그만 울고 엄마랑 만나서 이야기하자."


아이와 만나 들은 이야기는 이랬다. 부회장으로 해야 할 일 하지 않아서 선생님에게 불려 앞으로 나갔고, 선생님이 친구들 보는 앞에서 자신을 나무랐다는 것이다. 친구들 앞에서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 결국 눈물이 터졌고, 밖으로 나가려는 자신을 선생님이 붙잡고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보통의 고등학생이었다면 그냥 넘길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하연이 게는 날벼락같은 일이었다. 친구들에게 좋은 모습만 보이고 싶었는데 자신이 정말 보이고 싶지 않던 우는 모습을 보이고 만 것이다.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선생님은 방과 후 다시 이야기하자고 했고, 아이는 그 시간 이후 내내 불안했을게다. (불안증이 높은 아이였다.) 방과 후 선생님과의 대화에서 아이는 갑갑함을 느끼고, 대답도 없이 울기만 하는 아이에게 선생님은 계속 질문하고. 아이는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아서 선생님에게 말했다.


"제발 집에 보내주시면 안 돼요?"


선생님은 말하고 가라고 했고, 몇 차례의 부탁에도 거절당하면서 아이는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중학교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던 아이는 그때가 떠올라 더 힘들었겠다. 속상했다. 아무리 설명을 해도 아이의 상태를 이해 못 해주는 건가? 아이의 우울증 상태도 이야기 했고, 책도 읽으셨을 선생님이 아이를 그렇게까지 몰아붙이다니 속상했다. 한편으로는 선생님이 이해도 되었다. 아이들과 있을 때 한없이 명랑하고 리더십 있는 아이가 갑자기 울기만 하니 무작정 봐주기도 어려웠겠지. 심하게 우는 아이를 그냥 집에 돌려보내기로 어려웠을 테지.


그때부터였다. 하연이는 다시 학교 가는 걸 힘들어했다. 친구들과 노는 건 좋지만 선생님과의 대면 자체가 스트레스가 됐다. 무시도 해보고, 잘 지내보려고 노력도 했지만 그때의 감정이 살아나서 선생님이 부르면 불안했다. 선생님에게도 아이 상황을 설명했지만 우리 아이만 봐달라고 할 수 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이를 달래 지각하지 않고, 최소한의 할 일만 하자고 말했다. 이미 심리적으로 거부감을 느낀 아이는 점점 아침에 늦게 일어났고, 학교에서 아프다며 조퇴를 하기 시작했다. 학교를 그만두겠냐고 물으면 그래도 친구들이 좋으니 노력해 보겠다니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친구들과는 웃고 떠들고, 선생님 앞에서는 반항하는 아이가 선생님도 버릇없는 사춘기 반항처럼 보였을 테지. 말과 감정의 충동 조절이 힘든 아이였지만, 그때는 ADHD판정을 받기 전이었기 때문에 조절이 될 거라 믿었다. 아이의 불안증은 점점 더 심해졌다.


방학이 되어 아이가 집에 있으면서 점차 안정이 되었다. 친구들도 보고 싶다고 했고, 학교 가서도 잘할 수 있다고 했다. 그렇지만 개학이 다가올수록 두통이 심해졌다. 그즈음에 ADHD 판정을 받고 주의력 약과 불안증 약을 처방받았다. 약을 가슴에 품은 딸은  완전 무장한 듯 당당하게 학교에 갔다. 학교 가는 일이 이렇게 비장할 일인가. 속이 쓰렸다. 학교에 다녀온 아이는 경험담을 늘어놓듯 말했다.


"엄마, 선생님이 또 부르시더라고. 내가 또 지각을 했거든. 그래서 불안증 약을 먹었지. 그랬더니 눈물은 나는데 말은 할 수 있더라고. 숨이 쉬어지더라고." 이걸 잘했다고 해야 할까. 다행이라고 말해줘야 할까.


그 이후로도 몇 차례 선생님과 충돌이 있었고, 어느 평일 늦은 밤 할 말이 있다며 딸 집으로 왔다.


"엄마! 나 자퇴할래요. 더 이상 못 다니겠어요.


1부 끝




검정고시 보고, 입시학원 다니고 애니메이션과 대학 갈게요."


자신의 미래가 걱정되었는지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래, 그러자. 1학기 다닌 것도 장하다."


다음날 선생님에게 전화를 했다.


"선생님, 자퇴를 하려고 하는데요. 어떤 서류를 준비해야 하나요?"


선생님은 놀란 듯 이런저런 질문을 했고, 적당히 말했다. 서류를 쓰러 가겠다고 약속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학교에 다니기 위해 그토록 애썼는데 학교를 그만두는 일은 참 간단했다. 서류에 사인만 하면 된단다.


"자퇴"

퇴라는 말은 어감이 참 좋지 않다. 은유작가는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보지 않는 일이 글쓰기의 시작이라고 했다. 그래보기로 했다. 학교를 중간에 그만두는 것은 자퇴라는 당연한 말을 당연히 여기지 않고 싶었다. 내 딸의 일이 되고 보니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그 의미에 딸을 두고 싶지 않았다. 자퇴라는 말을 찾아봤다.


자퇴란 학생이 교육과정을 마치지 않은 채 자의로 학교로부터 나오는 것.
스스로 물러남.

 



"자의로"

"스스로"


행동의 선택에 자유는 없고, 물러나는 것에만 '스스로'라는 권한이 주어지면 자퇴를 하는 아이들의 자의가 진정한 자의인가?

학생들 스스로의 선택이라면서 긍정적 선택은 없고, "퇴- 나온다. 물러난다. 그만둔다." 와 같은 포기만을 선택지로 둔 제도가 진정 아이들을 위한 길인가. 사람이 스스로 무언가를 선택할 때는 자신에게 더 좋은 것을 선택하기 마련이다. 자퇴라는 말은 아이들의 긍정적인 선택 자체를 차단하고, 그 말이 주는 부정적 의미에 자신을 가두게 된다. 자퇴를 하는 아이들은 '나는 더 나은 선택을 한 거라고, 앞으로 잘하면 된다고' 다짐한다 그 자체가 무언가 노력하지 않으면 낙오자가 될 수 있는 위치라는 반증이기도 하다. 또 한 번 속이 쓰리다.


단 5분.

자퇴서에 도장을 찍고, 학교밖 아이들 제도에 대한 안내를 받았다. 인사를 하고 아이는 짐을 챙긴다며 교실로 갔다. 5분 정도 지나 딸은 두 손 가득 무언가를 안고 차에 탔다.


"이게 뭐야?"


"애들이 선물 주더라고. 롤링페이퍼도 써 주고. 애들이 나는 자퇴해도 잘 살 거라고, 나중에 자기 모르는 척하지 말래. 그래서 내가 너희들 졸업하기 전에 유명해지면 교실에 피자 쏜다고 했어."

롤링페이퍼에 아이들의 장난스러운 글씨와 그림들이 어지럽지만 정겹게 모여있었다. 마치 사춘기 아이들의 모습처럼.

 '좋은 친구들과 지냈구나. 이런 친구들 두고 후회하지 않을까.'

양동이에 가득 찬 물이 뒤집어져 내게로 한꺼번에 쏟아지는 것처럼 걱정이 쏟아졌다. 멍해지는 눈에 힘을 주고 크게 떴다.  닥치지 않은 걱정으로 아이를 혼자 두는 일을 멈추기로 했다.


"딸, 축하해. 고등학교 조기졸업했네. 이제 성인이 되었으니까 자신의 삶에 더 책임감을 갖고 살아. "


"응, 엄마. 우리 축하하는 날이니까 잔치국수 먹으러 가자."


"그러자."


우리는 근처 국숫집으로 갔다. 나는 칼국수. 딸은 잔치국수. 딸은 간장양념을 한 숟가락 떠 넣고 휘휘 저었다. 얇게 썬 호박과 양념김치가 김가루에 섞여 따라 돌았다. 식당 김치에서만 볼 수 있는 선명한 고춧가루로 버무려진 겉절이 하나를 그릇에 넣고 젓가락을 깊숙이 찔러 돌돌 말아 들어 올리니 김이 모락모락 나면서 군침이 돌았다. 입안으로 호로록 넣으니 멸치 감칠맛이 입안에 퍼졌다. 입으로 오물오물 씹으며 젓가락을 다시 그릇에 넣는 일만 반복했다. 그 일에만 집중했다. 그러고 있자니 그냥 평범한 어느 하루인 듯했다.


"2년 반이라는 시간을 선물로 받았는데 뭐 하며 지낼 거야? "

"응. 생각해 봐야지."


며칠 후 딸에게 문자가 왔다.(딸은 이후에도 할머니집에서 지내고 있었다.)


"엄마, 나 자퇴하기를 잘한 거 같아. 친구들을 못 보는 건 아쉽지만 그리고 싶은 그림 마음껏 그리고 너무 좋아."




어떤 이들은 말한다. 자기 조절능력이 부족한 아이

학교라는 통제권이 있는 게 지 않냐고. 허락한 부모가 대단하다고. 아이의 인생인데 남들이 인정하는 삶의 터를 송두리째 옮겨 홀로서기로 한 아이의 용기보다 부모의 용기가 더 대단한 걸까.


더 이상 부모가 해줄 수 있는 건 없다.  오로지 부모로서 낼 수 있는 용기는 자식을 어떤 것으로도 구속할 수 없는 시간을 견디는 용기. 끝까지 믿어주는 용기. 실수하더라도 실패를 통해 배우는 길을 지지하는 용기이다.


넘어져 피가 나도 다시 스스로 일어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한 아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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