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과 여름방학에 1박 2일 여행을 갔다. 하연이는 초등학교 3학년에 엄마와 단 둘이 간 여수 여행을 자주 이야기했지만 이번에는 가까운 영종도로 갔다. 그곳이라도 좋다고 했다. 책 [그런 그냥 살아만 있어. 아무것도 안 해도 돼.] 속 하연이와의 이야기가 있고 그 후, 나는 하연이 존재 자체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아이를 바꾸려는 대신 아이를 최대한 알아가는 일에 집중했다. 아이에 대해 하나씩 알아갈수록 행동과 말이 이해되었다.
고등학생 딸과의 여행은 역시 먹방이다. 예쁜 카페에 앉아서 달콤한 빵과 젤라토 아이스크림을 먹고, 나는 바다를 보고, 딸은 패드를 꺼내어 그림을 그렸다. 수산물 센터에서 고른 방어, 농어, 우럭 모둠회와 성인 4인분은 될 법한 음식 한 상을 먹고, 복숭아가 쏟아지는 조형물이 있는 과일가게에서 복숭아 한 봉지를 사 호텔로 왔다.
"우리 배부른데 밤 산책 갈까?"
바닷길을 따라 두런두런.
조명이 길게 늘어진 산책로 가운데 빔으로 쏘아 바닥에 새겨진 글씨가 있었다. '자살예방 상담전화 1393' 우리는 말없이 잠깐 머물러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어깨동무를 하고 걷기 시작했다. 호텔이 눈앞에 보일 무렵 하연이가 불쑥 이야기를 꺼냈다.
"엄마, 나 ADHD 검사받아보고 싶어."
"그래?"
얼마 전 존스 홉킨스 소아정신과 의사, 지나영 교수가 자신이 성인 ADHD라며 증상을 이야기해주는 영상을 보았다. 증상이 하연이와 너무 비슷했다. 이해되지 않던 모든 행동이 그 증상에 맞추면 이해되었다. 하연이도 그런가?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 영상을 먼저 본 덕분에 하연이의 말에 놀라지 않았다. 아이의 말에 당황하지 않고 부드럽게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줄 수 있어 감사했다.
"왜 그런 생각을 했어?"
"최근에 관련 영상을 봤는데 나랑 너무 비슷하더라고. 나는 내가 이상한 아이라고 생각해서 어른들이 좋아하는 모습으로 살려고 가면을 많이 쓰고 살았던 거 같아. 그래서 진짜 내 모습은 뭘까? 나답게 행동하면 사람들은 나를 싫어할까? 나는 왜 사람들이랑 다르지? 했었는데. 나랑 비슷한 사람들 이야기를 들으니까 내가 이해가 되더라고."
"어떤 점이 비슷한데?"
하연이가 들려준 이야기와 내가 본 영상들을 정리해 보니 몇 가지 하연이와 공통된 특징을 발견할 수 있었다.
(*청소년이기 때문에 성인 ADHD보다는 소아ADHD 증상에 더 가깝고, 사람마다 증상에도 많은 차이가 있더라고요. 아래는 제 딸의 개인적인 증상이에요. 추후 병원에 다녀온 이야기 남길께요. )
1. 충동조절이 어렵다.
ADHD는 주의력 결핍 및 과잉 행동장애라는 이름처럼 주의력이 부족해 과잉행동을 나타낸다. 충동을 조절하는 일이 어렵다. 남자아이들은 행동으로 많이 나타나기 때문에 알아차리기가 쉽지만 여자아이들은 많이 본 적이 없어서 생각하지 못하기도 했다. 하연이는 스스로 말 충동조절이 어렵다고 했다. 하고 싶은 말을 참기가 어렵다고. 얼핏 보면 표현하는 시대에 좋은 것 아닌가 할 수 있지만 어린아이가 상황에 맞지 않게 떠들 때 우리는 자주 혼낸다. 부정적인 말, 비난하는 말, 말에 끼어들기, 수다스럽게 혼자 말하기 같은 행동에 자주 혼을 냈었다. 하연이는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말하지 말아야 할지 그 기준을 정하는 일이 힘들었다고.
2. 약속이나 해야 할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정말 많이 야단을 맞았다. 자기 물건을 수시로 잃어버렸다. 싫증을 잘 내고, 아끼고 소중하다고 말하는 물건도 쉽게 방치되었다. 약속을 여러 번 이야기해도 자꾸 까먹으니 또 혼나고. 기억할 수 있는 장치(알람, 기록하기 등)를 같이 해보고 이야기해도 그 조차도 하루를 넘기지 못했다.
3. 주의를 기울이지 못한다.
해야만 하는 일을 할 때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고 부주의한 실수를 저지른다. 넘어진다거나 쏟는다거나 떨어뜨리는 행동이 잦고, 지속적인 행동이 필요한 일(공부, 숙제 등)을 피하고, 싫어한다. 일상적인 활동(씻기, 옷 갈아입기 등)을 잊어버린다. 사람에게도 그렇다. 친구들과의 약속도 자주 잊고, 친구들이 흔히 하는 일상적인 행동이나 관심사에 관심이 없어서 또래관계를 힘들어하곤 했다.
4. 우울, 불안 증세가 있다.
손을 가만히 두지 못하고 손톱을 뜯거나 계속 꼼지락 거린다. 여전히 손톱을 뜯는다. 긴장 상황에서 눈동자를 굴리며 불안해한다. 감정이 급격하게 다운되고, 눈물을 자주 흘린다. 이 증상은 아마도 2차적인 증상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자꾸 야단 맞고 자신도 고치고 싶은데 잘 고쳐지지 않으니 자신이 못나게 느껴지고, 우울하고, 불안했겠다.
하연이는 똘똘하다. 책을 읽을 때 집중을 잘하고, 문맥을 잘 이해해서 자신의 말로 바꾼다. 논리적이고 통찰력 있는 말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그림 그릴 때 초 몰입의 집중력과 창조성을 보인다. 하루에 10시간도 앉아 그림만 그린다. 그러니 ADHD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엄마! 나는 말을 할 때 집중력이 높아지나 봐. 그래서 그림 그릴 때, 공부할 때 음악을 듣거나 행아웃으로 사람들과 쉼 없어 말하면 더 잘 돼."
그래서 그런 거구나. 그림을 그릴 때 온라인이나 전화로 누군가와 쉼 없이 이야기를 한다. '외로워서 그러나?' 생각했는데 한 가지에 집중하기 어려운 아이가 말하고, 음악 듣고, 몸을 흔들면서 그림 안에 자신의 온갖 산만하게 화려한 세상을 펼치고 있었다. 그림을 그릴 때는 손톱을 물어뜯지 않는다. 유일하게 성취감을 주는 행위이고, 자신을 이해받지 못하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기 자체를 나타낼 수 있는 통로였다. 하연이는 그림을 그리면서 자신을 이해하고 치유하고 있었다.
그냥 살아만 있어 아무것도 안 해도 돼 이하연 작가의 그림 속 하연이 세상
"엄마도 얼마 전에 성인 ADHD 관련 영상을 봤는데 너랑 정말 비슷하더라. 엄마도 그런 생각했어. 생각보다 많다고 하더라고. 병원에 가서 검사해보자."
"응. 이렇게 말하니까 속이 시원하다."
호텔 건물 사이 바람길을 따라 바닷바람이 우리를 세차게 흔들고 지나갔다. 하연이가 옅은 웃음을 보였다. 늘 과장되게 웃는 아이였는데 지금 본 모습이 진짜 하연이 웃음 같았다.
"기분이 좋아 보이네."
"더 이상 자신이 아닌 모습으로 꾸미며 살 필요가 없다는 게 좋아."
하연이는 깊은 잠을 잤다. 새벽 산책을 나와 바닷길을 걸으며 나도 다독여 주었다.
'엄마인 너도 몰랐잖아.
이제 또 하나 알았으니 더 편안해질 거야.
문제는 모르는 게 문제지.
답을 알면 풀면 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