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단계 : 행복을 찾기 전에 쾌락부터

by 유주얼

"당신은 쾌락을 추구하십니까?"

이 질문에 주저함 없이 ‘네’라고 대답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쾌락을 추구한다 하면 지나친 탐닉의 상태를 연상하고 섹스 중독 혹은 마약을 떠올리기도 한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이 묻는다면 어떨까?

"당신은 행복을 추구하십니까?"

아마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수월하게 긍정할 것이다.

행복은 우리가 인생의 궁극적 목표로 삼을 만한 소중한 가치이며 또 인간으로서 당연히 획득해야 할 권리로 여겨진다. 반면 쾌락은 그 자체로 좋긴 하지만 왠지 삶의 목표가 되기엔 저급하고 어딘가 모르게 부도덕한 것 같고 자칫하면 거기에 빠져버려 인생을 망치는 된다는 인상을 풍긴다.

왜냐고 따지고 들면 딱히 근거를 대기 어려운 이 선입견은 쾌락이 몸의 감각과 몸 안의 물질로부터 얻어진다는 사실 때문에 생겨난다.

그렇다. 쾌락은 감각의 즐거움이다. 그리고 감각은 지극히 개인적이다.


따라서 쾌락은 ‘개인의 감각’이며 대단히 사적이고 물질적인 차원이다.

행복은 이와 다른 차원인 것처럼 보인다. 개인을 넘어 가족, 이웃, 사회와 같은 관계 속에서 그 의미가 더 깊어지고, 물질을 초월하여 마음, 의식, 정신으로 확장되는 개념으로 여겨진다.

이게 사실이든 아니든 행복이라는 말이 지니고 있는 고차원적 이미지 때문에 우리는 ‘행복’ 두 글자를 여기저기 아무 데나 마구 갖다 붙인다.


단적인 예가 ‘소확행’이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얻겠다는 이 트렌드는 꽃을 가꾸거나 책을 읽거나 산책을 하는 식으로 마음의 여유를 찾고 삶의 외연을 조금씩 확장하는 문화적인 변화로도 나타나지만, 그보다는 단순한 소비 욕망을 손쉽게 채우는 방식으로 더 강하게 확산되고 있다. 더욱이 그 대부분의 욕망은 ‘맛집’이나 ‘신상’인 만큼 대단히 자본주의적이고 상업적이다.

‘욕구 충족’이나 ‘만족’이라는 더 적확한 단어가 있는데도 굳이 행복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이유는 소비 욕망을 채우는 자신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싶어서다.

“내가 어디 가서 무엇을 사든 무엇을 먹든 그건 나의 행복이야.”

이렇게 주장하면 모든 것이 용서된다. 별 쓸데없는 물건을 사도 괜찮고, 내 몸을 망치는 음식을 먹어도 괜찮다. 그것이 ‘행복’이라 우기기만 하면 다 인정된다.

그만큼 ‘행복’은 우리 삶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자처럼 최고의 가치로 군림하고 있다. ‘쾌락’이 입에 담기에 민망하게 여겨지는 천덕꾸러기 처지인 것과 대조적이다.

사실 이런 현상은 행복이 정말로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 같다. 과연 행복이란 무엇일까? 욕망을 초월한 것인가 하면 너무 추상적이어서 모호하다. 역시나 욕망에 기초한 것인가? 그렇다면 인간의 욕망이 끝이 없으니 탐욕과 뭐가 다를까?

행복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이것저것 아무 데나 혹시 행복이 아닌가 찔러보는 한편,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오히려 진리인 듯 하여 삶의 목표가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잡히지 않는 행복의 정의를 쫓기 전에 개개인마다 느끼는 '행복감'을 먼저 들여다보자. 누구나 어떤 순간에 행복감을 느낀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 행복한 느낌의 실체는 ‘쾌락’이다. 감각의 즐거움이나 감정적 만족을 행복감으로 느낀다. 즉 감각기관의 반응 혹은 신경전달물질이나 호르몬과 같은 물질의 작용이다. 우리 몸에서 이루어지는 명확한 매커니즘이다. 바로 이 쾌락이 행복의 가장 기초적인 단계, 첫 걸음마이다.

쾌락을 알아야 행복을 향해 갈 수 있다.


감각적 쾌락을 무시한다면 행복을 향해 가는 길은 결코 열리지 않는다. 왜일까? 어린아이에게 사랑을 알게 해주려면 반드시 감각을 통해 사랑을 느끼게 해주어야 하는 원리와 같다. 포근하게 안아주고 부드럽게 만져주고 토닥토닥 두드려주고 말랑한 젖꼭지를 물려주고 다정한 목소리를 들려주고 웃는 얼굴을 보여주면 아기는 사랑의 개념이나 정의 따위를 몰라도 사랑을 알아가게 된다.


감각을 통한 배움이야말로 가장 깊은 배움이다.


예를 들어 다리미를 만져보고 싶어하는 아이에게 위험하다는 설명만으로는 그 호기심을 완전히 포기시키기가 어렵지만 아이가 약간이라도 그 뜨거움을 직접 느껴보게 되면 스스로 알아서 멀리하게 된다. 느껴서 알아야 온전히 아는 것이다.

예술이 어떻게 삶을 풍요롭게 만들고 사회를 성장시키는 힘을 가지는지 그 해답의 열쇠도 바로 감각에 있다.

예술은 사람의 이성이 아니라 감각에 호소하기 때문이다.


'질서는 아름다운 것'이라는 구호를 커다랗게 써 붙이고 각종 캠페인을 벌이고 또 질서를 해치는 행위에 벌금을 부과하는 방법으로 정말 질서있는 사회를 만들 수 있을가? 강요와 통제는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지 못한다.

하지만 화폭 위에 질서와 조화를 구현한 회화를 보면서 시각적 감동을 받거나 화성과 리듬의 질서가 펼쳐지는 음악을 들어서 청각적 감동을 받으면 사람들은 스스로 질서의 아름다움을 깨닫고 삶 속에서 질서를 구현하려는 자발적 의지가 생겨난다. 감각을 통해 스스로 경험할 때 실천적 깨달음이 일어나고 삶은 변화된다.

다름을 인정하고 편견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소리 높여 가르친다고 해서 사람들의 생각이 딜라질까? 다양한 예술적 경험을 통해 새로운 자극과 신선한 충격을 오감으로 받아들일 때에 사고방식도 함께 변화될 수 있다. 예술이 항상 새로움을 추구하며 기존의 틀을 벗어나는 용감한 실험 정신에 경의를 표하는 이유다.


예술은 감각의 혁명이다.


예술이 삶에 미치는 영향과 쾌락이 행복에 미치는 영향은 그 방식이 같다.

행복해지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몸소 쾌락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영원히 헤맬 수 밖에 없다.

쾌락에는 감각기관으로 느끼는 물리적 쾌감과 도파민, 세로토닌, 옥시토신 등 신경전달물질에 의해 생성되는 정신적 쾌감이 있다. 직접적인 감각의 자극 없이 상상만으로 즐거워진다든지 책의 감동으로 가슴이 벅차오른다든지 하는 경우도 쾌락을 경험한다고 할 수 있지만, 쾌락의 대부분은 감각에서 시작된다. 따뜻한 물 속에 몸을 담근다거나 신선한 향기를 맡는다거나 조화롭고 정제된 음악을 듣는다거나 오묘한 색채와 빛을 볼 때, 감각은 곧바로 쾌락으로 연결된다.


그리고 감각의 물리적 깊이가 깊어짐에 따라 쾌락의 차원은 달라진다. 솜씨좋은 마사지사의 손길이 좋은 것은 그 터치가 피부에만 머물지 않고 몸속 깊이 전달되기 때문이다. 요가수련법 중의 하나인 샹카프락살라나(Shankha prakshalana)는 위와 장에 이르는 소화기관 전체를 소금물로 정화하는 기법인데 이렇게 깨끗이 비워내고 나면 그 쾌감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세계의 느낌이다. 굳이 말하자면 저절로 오르가즘이 이루어지는 느낌인데, 오르가즘이 우리 몸 내부의 중심선을 따라 존재하는 기의 흐름이 위쪽으로 승화되는 현상이기 때문에 속이 가볍고 깨끗해져서 저절로 에너지의 흐름이 가볍게 위쪽으로 향하는 현상과 일치하는 것이다.

아로마테라피에서도 코끝으로만 향기를 맡는 것이 아니라 폐 깊숙이 마시도록 깊은 숨을 쉬게 한다.

그러니 섹스는 우리 몸에서 가장 깊은 감각을 건드리는 행위인 만큼 가장 깊은 차원의 쾌락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을 비록 경험하지 못했을지라도 짐작할 수 있다.


쾌감은 우리가 인생에서 무시해도 좋을만한 하찮은 것이 절대로 아니다. 돈을 벌고 명성을 얻고 많은 것을 소유했다 해도 몸의 감각을 통해 얻는 쾌락을 느끼지 못한다면 무슨 수를 써도 충만함을 얻을 수 없다. 행복의 첫 단계를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걸음마를 떼지 않고 달리거나 높이 뛰기 하겠다고 덤벼드는 것과 같다.


쾌락을 모른다면 쾌락을 초월할 수도 없다.


무엇이든 몸소 온전히 겪어야만 통과하여 초월하는 법이다. 쾌락을 모르면서 수련을 하겠다고 근엄한 자세로 여러 달씩 참선을 하거나 자신을 채찍질하여 모든 욕망을 힘껏 눌러봐야 결국 헛수고이고 오히려 역효과만 난다. 목사와 스님과 신부라는 사람들이 성직자라는 가면을 쓰고 뒤로는 온갖 추악한 짓을 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몸의 감각을 통해 정직한 쾌락을 누려보지 못한 사람들은 변태적인 방법을 찾는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마약이다. 마약은 감각을 통하지 않고 직접 뇌에 영향을 미쳐 쾌감을 준다. 이러한 쾌감은 자연스러운 삶의 법칙, 우주의 법칙에 대한 엄청난 반칙이다. 병적인 쾌감이다. 지극한 수련과 깊은 명상으로 삼매경에 든 경지가 마약의 효과와 동일하다고 하지만, 효과는 동일할지언정 과정은 정반대다. 요가는 물론이고 명상 역시 철저히 실재하는 몸의 수련과 물리적 감각의 수련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미안한 말이지만 건강하지 못한 몸으로는 명상도 제대로 이루어지기가 힘들다. 따라서 몸의 감각 없이 얻는 마약의 쾌락은 행복과는 정반대의 길로 가고 있는 것이다.


물론 감각의 쾌락이라고 해서 다 옳지만은 않다. 오늘날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미각의 쾌락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우리의 미각은 변질되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소비자의 입맛을 자극하고 계속 원하도록 중독시키려는 상업적 음식들 때문이다. 그래도 입안에서라도 쾌락을 느끼면 되는 것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입안의 쾌감 때문에 위와 장의 불쾌감이 생긴다. 더부룩하고 무겁고 쓰라리고 거북하다. 그런데 이런 불쾌감은 시간이 지날수록 무뎌진다. 불쾌감이 해소된 게 아니고 병들어서 마비되는 것이다. 뭘 먹든지 위는 멀쩡하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사실은 대단히 안 좋은 상태다. 동의보감에 의하면 비장과 위장은 본래 까다로워야 (비위를 맞춘다, 비위가 까다롭다는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제 소임을 다하는 것으로서 안 좋은 음식이 들어오면 탈을 일으켜야 정상이다. 위와 장이 둔해져서 반응이 느리고 아무 느낌이 없다면 몸속의 불쾌감이 극에 달해 한계치를 넘어섰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 입의 쾌감도 중요하지만 가능하면 신선하고 건강한 음식으로 내장의 쾌감도 함께 도모해줘야 한다.


생각해보면 감각의 쾌락, 몸의 쾌락의 궁극은 가벼움이다. 푹 자고 일어났을 때 몸이 개운하여 가벼운 느낌, 운동이나 샤워, 마사지나 찜질 후에 무겁고 뭉친 것들이 다 풀어져 몸이 가벼워진 느낌, 건강하고 맛있는 음식을 가볍게 먹고 시원하게 배출하여 몸이 가벼워진 느낌처럼 기분 좋은 쾌감이 있을까? 최고로 좋은 기분을 '날아갈 듯' 하다고 표현하는 것만 보아도 가벼움이란 쾌감의 절정임을 알 수 있다.


가벼움은 에너지가 위로 향할 때 생겨난다. 섹스는 두 사람이 서로의 에너지를 교류시키며 함께 위로 상승시키는 행위이다. 갸벼움의 쾌락이다. 쾌락의 에너지가 가볍게 솟구쳐 가슴에 다다르면 마음을 풀어주고 목을 지나 이마에 다다르면 의식을 열어주며 정수리를 뚫고 나의 몸을 통과하면 모든 집착과 괴로움의 근원인 에고(Ego)가 사라진다. 한 순간이나마 이러한 경지를 체험한다. 아집과 이기심으로 똘똘 뭉친 '나'의 경계가 사라지고 존재가 확장되어 상대와 내가 하나되는 쾌감, 나의 쾌감이 우주의 환희와 일치되는 쾌락을 맛본다.


진정한 쾌락은 탐닉하게 되지 않는다.


변태와 반칙으로 얻은 쾌락만이 탐닉과 중독을 부른다. 솔직한 몸의 감각에 기반한 건강한 쾌락은 스스로 초월되려는 욕구를 지니고 있어서 자연스럽게 더 높은 차원으로 변형된다. 섹스의 쾌락은 영적인 성장을 향해 나아간다.

행복은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어서 누구도 단정지어 정의내릴 수 없지만 쾌락을 느끼고 아는 사람이라면 행복을 누릴 줄 아는 사람이다.


왜 행복해야 할까? 행복한 사람은 남에게 끌려다니거나 통제받지 않는다. 행복한 사람은 거짓에 속지 않는다. 행복한 사람은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사람이다. 행복한 사람은 사랑하는 법을 안다.


대중을 하나의 집단으로 노예처럼 통제하고자 하는 권력은 반드시 쾌락을 억압하고 죄악시한다.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고 노동력 혹은 소비자로만 보는 자본세력 또한 건강한 쾌락 대신 변태적이고 반칙적인 쾌락을 부추긴다.

하여 섹스의 본성, 섹스의 자연을 회복하는 것은 인간답게 살기 위한 혁명이며 부패한 자본과 권력에 맞서는 독립운동이기도 하다.

행복해지고 싶다면 몸의 쾌락부터 찾아야 한다. 섹스를 회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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