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단계 : 섹스와 요가와 명상

by 유주얼

섹스와 요가와 명상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면 당신은 무엇을 고르시겠습니까?


황당할 수도 있을 것이다.

커피와 녹차와 홍차, 혹은 티라미수와 당근 케이크와 브라우니 중 하나를 고르라면 몰라도, 섹스와 요가와 명상은 언뜻 생각할 때 전혀 비슷한 값을 지닌 것 같지 않으니 말이다.

순전히 가정일지라도 뭘 골라야 가장 잘 고르는 것일까 잠시라도 고민했다면, 시시하게 만들어서 죄송하지만, 세 가지 중 무엇을 선택해도 마찬가지다.


섹스와 요가와 명상은 하나의 넓은 천에 염색된 세 가지 색깔과도 같다.


어떤 색을 끌어당겨도 나머지 색들이 함께 따라간다.


명상을 선택한다고 해보자. 딴에는 가장 실행하기도 쉽고 단순할 것 같아서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상은 다르다. 명상은 섹스와 요가보다 훨씬 어렵다.

나는 제주도에 살면서 여행 오신 분들을 대상으로 요가와 명상을 가르치고 있는데, 매 시간마다 요가보다 명상이 어렵다는 걸 실감한다. 선생으로서 안내하기도 어렵고 시간 내에 효과를 거두기도 어렵다.

겉모습만으로는 요가처럼 땀을 흘리지도 않고 숨을 몰아쉬거나 끙끙 앓는 소리도 나지 않으면서 그저 고요히 앉아있으니 대충 잘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굉장히 산만하고 복잡하고 엉망이다.


요가와 명상 두 가지는 모두 '나와 우주의 합일'을 향해 집중하는 수련이지만 요가는 그래도 뭔가를 하는 데에 집중하는 반면, 명상은 하지 않는 데에 집중해야 한다. 명상을 안내하는 나부터도 뭔가를 하라고 설명하는 것보다 뭔가를 하지 않는 상태를 설명하기가 훨씬 까다롭다.

물론 그래도 최대한 알기 쉽게 원리와 방법을 알려준 다음 명상을 진행하는데, 10분만 넘어가도 많은 분들이 힘겨워한다. 몸의 여기저기가 쑤시고 아파오거나 고요함 속의 답답함을 이기지 못해 괴로워지거나 의식이 흐릿해져 꾸벅꾸벅 졸게 된다. 무엇보다도 명상을 시작하자마자 금세 줄줄이 밀려오는 사념과 감정들로부터 벗어나기가 가장 힘들다.

명상에 오신 분들에게 어떤 기대를 갖고 왔느냐고 물으면, 편안해지고 싶어서, 마음을 비우려고, 복잡한 생각들로부터 해방되고 싶어서라고 대답한다.

명색이 명상 선생인 나에게 비법이 있어서 단박에 그런 상태에 몰입할 수 있게 도와드리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그런 편법은 없다.


명상은 바른 자세로 앉아서 눈을 감고 호흡에 집중한다는 형식의 기초로만 보면 모든 수련법 중에 가장 단순해 보이지만, 그 단순한 형식이 가능해지려면 반드시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전제조건을 갖추기까지 부단한 수련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한 자세로 오래 앉아있는 것이 괴롭지 않고 편안하려면 몸 전체에 음과 양의 균형이 바르게 잡혀 조화를 이루고 있어야 한다. 가만히 멈추어 있는 가운데에서도 기의 흐름이 활발하고 순탄해야 한다. 어느 곳에도 긴장이 없는 유연한 몸이어야 하면서도 의식만은 맑게 깨어있어야 한다. 정중동(靜中動)의 상태다.


요가의 아사나(Asana, 자세) 수련을 열심히 하는 이유도 결국 명상을 잘하기 위함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많은 아사나 가운데 궁극의 아사나는 명상을 위한 연꽃 자세라고 한다.

영적인 깨달음, 해탈을 향해 가는 길에 몸을 뒤로 휘어서 발끝이 머리에 닿는 게 뭐 중요하겠는가? 한 팔로 몸 전체를 들어 올린다고 해서 깨달음이 얻어지지는 않는다.

그 모든 기이한 자세들을 통해 몸을 최대한 가볍고 유연하게 만들어서 더 맑고 깊은 명상의 경지로 들어가고자 함이다.


그러니 명상을 선택한 사람이 자신의 선택에 정말로 진지하다면 자연스럽게 자신의 몸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다. 몸에 흐르는 에너지를 생각하게 된다.

막힌 것을 풀어내고 굳은 것을 유연하게 하기 위해 몸의 수련을 시작한다. 요가가 유일한 선택지는 아니지만 최선의 선택이 될 수 있다.

깨끗하고 맑은 에너지를 갖고 싶다면 섭생(攝生)에 신중하게 될 것이다. 동물들을 감옥 같은 축사에 가두고 고통스럽게 살을 찌워 얻어낸 고기의 더러운 에너지를 거부하게 될 것이다.


요가를 먼저 선택한 사람은 어떨까? 체형관리나 운동 효과를 내세워 이름만 요가라고 내세운 가짜 요가가 많지만, 수련으로서 올바른 요가를 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차크라(Chakra)를 배우게 된다.

차크라는 우리 몸을 소우주(小宇宙, Microcosm)로 보는 관점에서 대우주(大宇宙, Macrocosm)와 공명(共鳴)을 이룰 때에 활성화되는 주된 에너지 채널이다.

대우주와 소우주에는 동일하게 7단계의 에너지 레벨이 있어서 우리가 대우주의 에너지와 같은 진동의 리듬을 갖게 될 때 ‘우주와 나의 하나 됨’을 이룰 수 있다.

따라서 내 몸에 존재하는 일곱 개의 차크라를 모두 깨워내고 활성화시키는 것이 요가의 아사나 수련법이다.

1번 차크라인 물라다라 차크라(Muladhara -)는 가랑이 사이, 생식기와 항문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신체의 기본적인 지지력, 활동력 단계이다. 땅의 힘이다. 잘 먹어야 한다. 건강한 음식, 깨끗한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뜻이다. 여기서도 올바른 섭생과 만난다.


2번 차크라는 스와디스타나 차크라(Swadhisthana -)로, 생식기에 위치한다. 성(性) 에너지의 채널이다. 산스크리트어를 그대로 해석하면 ‘자신이 거주하는 집’이다. 섹스라는 에너지에서 비로소 나의 정체성이 시작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 정체성은 창조력이다. 인간에게 창조력이 없다면 먹기 위해 살고 살기 위해 먹는 생존의 차원을 넘어서지 못한다.

그러나 섹스가 있기에,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킬 만큼 위대한 신비한 창조의 힘을 갖고 있기에 인간은 삶의 의미를 갖고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모든 차크라를 설명할 생각은 없다. 2번 차크라에서 벌써 요가에서 섹스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섹스가 없이는 제대로 된 요가를 할 수 없다는 사실에 직면한다.

섹스를 무시한 채 임시방편으로 아무리 다른 데서 힘을 끌어와 봐야 영적 성장은 불가능하다. 생성의 힘, 창조의 힘이 없기 때문이다. 요가도 이루어지지 않고 명상도 억지스러워진다.


의문이 생길 수도 있다. 요가는 그렇다 쳐도 명상은 비움이고 해탈은 곧 자아의 소멸이니 애당초 생성하고 창조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하는.

‘비움’이나 ‘소멸’이나 ‘벗어남’ 같은 표현은 이기심과 아집과 욕심으로 뭉친 에고(Ego)에 대해 쓰는 말이다. 비움이나 소멸은 에고가 없어지고 참된 나의 본성을 회복한다는 뜻이다. 나를 가두었던 딱딱한 경계가 사라지고 내가 확장된다는 뜻이다.

내가 없다는 말은 곧 내가 모든 것이라는 뜻의 은유이다. 소우주와 대우주의 화합이다.

엄연히 있는데 없다고 우겨본들 내가 없어지지는 않는다.


나를 없애는 유일한 길은 나를 확장하는 길 뿐이다.


그러니 더더욱 생성의 힘, 창조의 힘인 섹스가 필수가 아니겠는가.


마지막으로, 섹스를 선택해도 궁극적으로는 요가와 명상에 연결된다. 이 책에 실린 글을 통틀어 꾸준히 강조해왔듯이 섹스는 영적인 깨달음을 향해 스스로 변화하는 에너지이기 때문이다.

수학 문제를 풀 듯 증명을 해보려 한다.


1. 섹스의 시작은 성욕이다.

2, 성욕은 쾌감으로 귀결된다.

3. 쾌감은 더 깊은 쾌감을 원한다.

4. 더 깊은 쾌감을 위해서는 온몸에 흐르는 생명의 기운이 원활해야 한다.

5. 최고로 깊은 쾌감은 몸 전체를 관통하여 존재의 변형을 일으키는 에너지가 된다.

= 이 단계는 요가 아사나의 수련으로 도달할 수 있는 차원과 일치한다.

6. 이것은 곧 사랑의 에너지다. 상대를 통하여 내가 변화되고 나를 통하여 상대가 변화되는 것이 사랑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7. 사랑은 현실을 초월하는 힘으로 성장한다. 시공간의 물리적 차원을 넘어선 근원적 세계를 감지하는 능력이 생겨난다.

8. 영적인 차원의 아름다움을 느낀다.

9. 의식이 우주적으로 확장된다.

10. 해탈한다.


예리한 사람은 알아챘을지도 모른다.

명상이나 요가로 시작한 과정과 달리, 섹스로 시작한 과정에만 ‘사랑’이 포함되어 있다.

바로 이러한 이유, 섹스는 사랑으로 인해 폭발적인 시너지를 낼 수 있다는 점에서 명상이나 요가보다 더 효과적인 수행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 힘을 얻는다.

나의 섹스 멘토 중 한 분인 올리비아(Olivia)는 온라인상에서 Self:Cervix(selfcervix.com)라는 웹사이트를 운영하며 전 세계 여성들에게 섹스를 통해 참된 기쁨을 발견하는 법을 전파하고 있는데, 바로 그녀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요가 대신 섹스를 선택했노라고.


하지만 명상과 요가 역시 조금 멀기는 해도 결국은 사랑으로 간다. 나와 우주의 합일을 이룬다는 건 우주 만물, 곧 이 세상의 모든 생명체들이 나와 다르지 않다는 깨달음에 도달하는 경지이다. 모두가 하나라는 깨달음은 공감과 연민, 나아가 사랑의 마음을 만들어 낸다.


명상이나 요가 대신 섹스를 통해서도 수련을 할 수 있다는 말은 종종 이상한 방향으로 전개되어 오해를 낳기도 한다. 특정한 방식의 섹스만이 영적 각성으로 견인된다는 주장이다. 특히 남자가 사정을 참아야만 에너지가 정수리로 향하면서 신의 경지에 오른다고 한다. 정기를 낭비하지 않고 영적인 힘으로 돌리면 세상을 지배할 만큼 무한한 능력을 가질 수 있다고도 한다. 그러면서 그런 섹스를 ‘탄트라 섹스’라고 명명한다.


‘탄트라(Tantra)’는 단어 자체로는 ‘길(道, Way)’이라는 뜻이고, 엄격한 금욕을 통해서 해탈할 수 있다고 믿는 율법적, 교조적 종교와 대비되는 수행 방식으로서 이 세상의 모든 생명현상과 삶의 다양한 차원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긍정함으로써 저절로 초월하게 되는 영적 성장의 길이다.

그런데 섹스의 자연스러운 욕구와 과정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탄트라 섹스라고 이름을 붙이는 것은 탄트라에 대한 모욕이 아닌가 싶다.

또한 백번 양보해서 남자가 사정을 참는 방식으로 신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고 치자. 신의 경지에 오르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세상을 지배하고 싶어서? 무한한 능력을 갖고 싶어서?

만일 그렇다면 그건 수행이 아니라 성취, 혹은 성공이라고 해야 한다.


명상과 요가와 섹스는 무엇을 성취하거나 성공하기 위한 방법이 아니다.

수행이다.

수행의 목적은 사랑이다.

더 많이 사랑하고 더 깊이 사랑하기 위해 우리는 명상이든 요가든 섹스든 꾸준히 해나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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