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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다도, 오래된 별명

by RNJ Apr 18. 2023
신-삼다도신-삼다도

 *삼다도라는 오래된 별명에는 궁핍함이 서려있습니다. 거친 바다 생활과 섬을 휩쓴 환란의 불길은 남자를 집어삼켜 이곳을 여자가 많은 섬으로 만들었고, 만성적인 자원 부족은 지구 어디에나 넘치는 흔한 돌을 돋보이게 만들었습니다. 쓸쓸하고 허전한 섬에서 바람소리는 더욱 크게 느껴집니다(실제로 바람이 육지보다 강하기도 합니다). 물론, 이제는 백(百)다도라고 불려야 할 만큼 풍족한 섬이 되었습니다. 어업 기술의 발달과 아직까지 일부 남아있는 남아선호사상으로 성비는 뒤집혔고, 시멘트와 콘크리트는 진작에 돌담의 자리를 차지했으며, 거침없이 부는 바람은 풍력 발전에 적극 활용되고 있습니다. 


* 삼다도 : 돌과 바람과 여자가 많은 섬. 제주도의 별명.


 제주도 수출액 1위는 반도체이며(귤이 아닙니다!), 전국에서 가장 거대한 렌터카 산업이 자리 잡은 곳이자 인구대비 카페가 가장 많은 지역이 되었습니다. 오랜 세월 소외당했던, 개발이 비켜간 척박한 땅은 새로운 산업 패러다임이 등장하고 국민 소득이 증가하자 대한민국 최고의 관광지가 되었습니다. 제주공항에는 비행기가 쉼 없이 오르내리고(스릴 넘치는 비행기 계주를 보고 싶다면 도두봉에 올라가세요), 연동과 노형동의 화장품 가게는 세계 각지에서 온 여행객으로 넘쳐납니다. 그리고 한 달 동안 300곳의 학교에서 수만 명의 학생이 찾아오는 수학여행의 성지이기도 하죠. 넘쳐나는 차량 때문에 관광버스가 공항에 진입조차 못해 학생들을 제때에 태우지 못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섬에 존재할 수 없었던 이름들이 하나씩 바다를 건너 도착하면서 지금은 없는 것이 없는 섬이 되었습니다만, 제주도민들은 여전히 "저렴한 건 삼다수랑 귤밖에 없다."라는 웃픈 농담을 주고받습니다. 섬이라는 태생적 환경 덕분에 일부 품목(가스비, 전기세, 수도세, 배송비, 외식 비용, 기름, 집값.... 잠시만...?)의 가격이 여전히 부담스럽긴 합니다만, 대형마트와 쿠팡의 등장으로 생활 여건이 갈수록 좋아지고 있음을 느낍니다. 반면에 생활권이 아닌 관광지를 돌아다니는 여행객의 입장에서 제주도는 비싼 섬일 수밖에 없습니다. 여행객의 입장에서 삼다도는 물가가 높고, 관광객(자신을 포함한)이 너무 많고, 휴무일(제주도에서 전화 문의는 필수입니다) 마저 너무 많은 섬입니다. 


 50~100년 전 제주사람들은 이런 변화를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겁니다. 예부터 쌀이 귀해서 제사상에 밀가루 빵을 올리는 지역이었고, 유배를 온 추사 김정희가 조밥에 막장을 비벼먹으며 편지로 반찬 투정을 했던 섬입니다. 배수가 쓸데없이 좋고 파도 파도 자갈만 나오는 땅은 격렬하게 농사를 거부했고, 한라산에 집중호우라도 내리면 사람과 가산이 함께 휩쓸려 바다로 떠내려갔다고 합니다. 땅을 일구는 것만으로는 생존이 힘들었던 제주 사람들은 자연스렌 바다로 시선을 돌렸지만, 설상가상으로 조선 정부가 조선업을 금지하고 말았죠. 제주인들은 조악한 테우에 의지해서 바다를 헤매야 했습니다. 구멍이 숭숭 난 대지에는 땀방울이 고일 자리도 없었습니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은 이미 오래전부터 세상을 담아내지 못하는 구닥다리 속담이 되었습니다. 죄인을 가두던 섬은 누구나 한 번쯤 자발적 한 달-유배지로 삼고 싶은 아름다운 장소가 되었죠. 우후죽순 세워진 타워 크레인은 이제 제주도의 일상 풍경이자 능선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수도권 부동산이 침체기에 빠지자 소문에 밝은 중개사들이 제주도로 모여들었습니다. 해가 수평선을 넘어 사라지면 제주공항 택시 승강장에 끝이 보이지 않는 대기줄이 만들어집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학생들의 손에는 감귤 초콜릿, 한라봉 타르트 박스가 한아름 들려있습니다. 중국인 관광객들은 올리브영 앞에서 기념사진을 남깁니다.


 이런 변화에도 불구하고 제주도의 오래된 별명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름에는 염원이 담기고 별명에는 이야기가 담깁니다. 이미 탐라라는 고유한 이름이 '바다 건너 마을'이라는 육지와 서울 중심의 시선이 담긴 제주로 개명되었습니다. 어린 시절의 별명을 지금 무엇하러 바꾸겠습니까? 성인이 되어 만난 연인의 어린 시절 별명에 애정을 느끼듯이, 저 또한 석주명 선생님이 지은 삼다도라는 오래된 별명에 즐거움을 느낍니다. 다신 볼 수 없는 제주도의 어린 시절을 잠시나마 목격한 기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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