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온기가 떠나지 않았다. 멸균포 위에 놓인 따듯한 태반에 물감을 올리고 조심스레 도화지를 올렸다. 최대한 팔에 힘을 뺀 다음 종이를 부드럽게 눌렀다. 부들부들한 촉감이 손 끝으로 전해질 때 인중에 도달한 피의 향기가 느껴졌다.
태반은 놀랍게도 엄마가 아닌 아기로부터 만들어진다. 어느 정도 형태와 기능을 갖춘 태반은 엄마의 자궁벽에 뿌리를 내리고 태아는 엄마의 피 속의 영양을 흡수하며 몸을 키운다. 태반은 아이가 엄마를 꼭 붙잡았다는, 가장 오래된 만남의 증거랄까. 10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아이는 태반을 쿠션 삼아 낮잠을 자기도 하고 탯줄을 만지며 홀로 촉감놀이를 하기도 한다. 아이가 만출되고 난 이후에도 태반은 아이에게 뜨거운 피를 흘려보낸다. 아버지가 아이의 탯줄을 잘라버리기 전까지.
조선 왕실은 아이가 태어나면 태반을 태옹이라는 항아리에 담아 태실에 보관했다고 한다. 왕의 태실 반경 500m 내에서는 벌목과 방목이 금지되었고, 옛사람들은 태반에 왕의 건강은 물론 국가의 운명까지 얽혀있다고 믿었다. 평민들은 태반을 불에 태워 강에 뿌리거나 산에 묻어줬다고 하는데, 병원에서 아이를 낳는 현대 한국 사회에선 아이의 생명 유지 장치가 일순간에 의료 폐기물로 격하될 뿐이다. 병원 실습 중에 만난 베트남 출신 산모는 태반을 따로 챙겨달라 부탁했고, 미리 준비해 놓은 도자기에 담아 퇴원할 때 가져갔다. 그 모습이 어째선지 참으로 아름답게 느껴졌고 동시에 우리가 무언가를 잃어버린 채 살고 있음을 상기시켜 주었다.
몸 누일 땅 한 뼘이 없는, 원룸에 아이를 모신 아빠에게 태반을 묻을 만한 땅이 있을 리도 없고 산분장도 2025년이 되어서야 합법화가 되었으니 궁여지책으로 태반 판화를 찍기로 하였다. 좁은 원룸이라 하더라도 그림 하나 걸 벽 정도는 충분히 마련할 수 있으니. 의료진은 태반의 모양을 확인한 이후 우리가 그림을 만들 수 있도록 욕조 아래에 조심스레 태반을 내려주었다. 한두 장 찍고 마무리를 할 생각이었으나 다신 없을 순간이라는 생각이 들어 열 장도 넘게 정성껏 태반 프린팅을 찍어냈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태반을 둘러싼 피의 길, 이 길들이 모여 아이와 엄마가 10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서로를 강하게 맞잡을 수 있었다. 더 이상 전해줄 것이 남지 않을 때까지! 태반은 엄마의 몸에 새겨진 아이의 첫 유산이었고, 아이의 첫 애착인형이었다. 출산 이전에 초음파로만 만났던 아이는 폭신한 태반에 얼굴을 파묻고 고개를 돌리지 않는 바람에 엄마와 아빠의 애를 살살 태우곤 했었다. 그때의 기억이 아직 남은 탓인지 아이는 두 돌이 지난 지금도 부드럽고 푹신한 쿠션과 인형 없이는 쉽게 잠에 들지 못한다.
분만실을 둘러싼 암막 커튼을 열어젖히니 맑은 가을 하늘이 우리 앞에 펼쳐졌다. 동쪽으로 난 창문을 향해 뜨거운 아침 햇살이 쏟아졌고 나는 창가에 그림을 하나하나 올려둔 채, 우리 가족의 첫 콜라보가 바짝바짝 마르기를 기다렸다. 아이 엄마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고 속싸개에 쌓인 축축한 아이는 신생아실로 옮겨졌다. 아침밥으로 나온 미역국은 차갑게 식어 고기 기름이 둥둥 떠다녔다. 이야기를 나눌 사람도 없으니 멍하니 창 밖을 바라보았다. 끝이 보이지 않던 대장정이 끝남과 동시에 다시 새로운 여정이 시작되고 있었다.
단장(斷腸). 장이 끊어지는 고통이라는 뜻의 고사에서 유래된 오래된 단어다. 좁은 산도에서 계속해서 지연되던 어미와 아이의 이별은 모두에게 극심한 고통을 유발했다. 피를 잃은 엄마는 순식간에 창백해졌고 태지가 붙은 아이는 나의 가슴팍 위에서 세상이 떠나가라 울어댔다. 케테 콜비츠는 전쟁터로 나가는 아들을 바라보며 탯줄을 한 번 더 자르는 기분이 들었다고 했다. 살려고 낳은 자식이 기어코 죽으러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던 그녀는 단장의 심정을 오직 빛과 어둠으로 이루어진 판화에 생생히 옮겨냈다. 알록달록하기 짝이 없는 우리의 판화는 아직 탯줄을 한 번만 자른 부모이기에 만들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진통이 시작되고 아이가 나오기까지 약 12시간이 필요했다. 아이가 몸부림을 시작하자 엄마가 울부짖었고 아빠는 스테인리스 가위로 탯줄만 잘랐다. 아이는 태반을 만들었고 엄마는 아이를 키웠으며 아빠는 그림 몇 장을 남겼다. 신체적인 고통에 함께할 수 없는, 이 과정에서 분리될 수밖에 없는 아빠는 불가피한 부끄러움을 느꼈고 그럼에도 출산에서 해리된 채 방관자로 남기를 원하지 않았다. 클로드 모네는 아내 카미유의 죽음을 바라보며 붓을 들었고, 베르트 모리조는 언니와 갓 태어난 조카의 모습을 담은 <요람>을 제1회 인상파 전시회에 출품했다.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셰익스피어가 햄릿의 입을 빌려 말했듯이 삶과 죽음, 존재와 상실 외에는 우리네 삶에서 그다지 중요하다 여길 일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아내의 출산을 바라보던 아들 아빠는 그 위태로운 전장 위에서 길을 헤매는 종군기자 아니, 종군화가가 되었다.